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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국 전 청와대 연설비서관.
 강원국 전 청와대 연설비서관.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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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내줬던 숙제를 이제야 끝낸 셈입니다."

최근 <대통령의 글쓰기>를 펴낸 강원국 전 청와대 연설비서관. 3일 서울 상암동 오마이뉴스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책 쓰기'가 "노무현 대통령의 유지였다"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은 역사의 진보를 '소수가 누리는 권력을 많은 사람들이 나누고 함께 누리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러면서 청와대 연설비서관을 하면서 얻은 경험과 노하우를 혼자만 가지고 있지 말고 누구든 접할 수 있게 책으로 쓰라고 했습니다. 국정상황실에서 중간 점검까지 했지만 그 때는 정말 너무 바빠서 쓰지 못했는데 퇴임 후 봉하마을에서도 책을 꼭 쓰라고 권하더군요."

미루던 책 쓰기는 지난 해 11월 시작해 두 달이 꼬박 걸렸다. 청와대에서 일하던 시절 작성한 연설문 초안을 놓고 대통령에게 수없이 깨지면서 "뼈에 새긴" 글쓰기 경험이라 8년의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고 했다.

대우 사사 집필하다 청와대로 간 사연

강 전 비서관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모두 거치며 대통령의 말과 글을 다듬었다. 쉽게 찾을 수 없는 이례적인 경력이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곁에서 8년 동안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해 연설문의 초고를 쓰고 다듬는 일이 그의 몫이었다. 국민의 정부에서는 연설비서관실 행정관으로, 참여정부에서는 연설비서관으로 일했다.

그가 청와대로 가게 된 건 우연을 가장한 운명을 닮았다.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기자의 꿈을 포기하고 대우증권에 입사했다.

홍보실에서 일하게 된 강 전 비서관에게 처음 주어진 일은 대우증권 20년 사사(社史)를 만드는 일이었다. 집필자였던 한 퇴직 언론인을 보조하는 일이었는데 집필자가 다른 회사의 사사를 베낀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결국 계약은 파기됐고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사사를 집필하는 일은 온전히 그의 몫이 됐다.

강 전 비서관은 "괴발개발 썼다"고 했지만 20년 사사를 단숨에 집필한 '글쟁이'로 이름을 날리게 되면서 회장 비서실로 발령이 났고, 당시 전국경제인연합회 회장이 된 김우중 대우 회장의 연설문 작성을 맡게 됐다. 2000년 6월 청와대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전화를 받은 건 그런 인연 덕분이었다.

평양행 앞두고 그가 관장을 한 까닭

강원국 전 청와대 연설비서관.
 강원국 전 청와대 연설비서관.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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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8년의 시간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김대중·노무현 두 대통령의 공통점, 글에 관한 한 "이 정도면 됐다"가 없을 정도로 대단했던 욕심 때문이었다. 연설문 초안이 단 한 번에 통과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연설비서관실에는 연례행사처럼 1년에 한 번씩은 '폭탄'이 터졌다.

"대통령이 연설문 초안이 맘에 안들면 첨삭을 하거나 좀 심각한 경우는 한 쪽 전체에 가위표를 치고 아예 뒷장에 다시 쓰는 경우도  있어요. 문제는 초안 수정본이 아니라 아예 구술로 연설 내용을 녹음해서 내려오는 경우인데 그걸 '폭탄'이라고 불렀죠. 연설비서관실 구성원 누구나 폭탄을 맞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녹록지 않았던 청와대 생활은 그에게 난감한 '지병'도 안겨줬다. 과민성대장증후군이다. 한 번은 3·1절 기념사 준비를 위한 대통령과 회의 자리에서 신호가 왔다.

"2005년이었습니다. 대통령의 구술이 시작됐는데 배가 아파오고 식은땀이 났습니다. 대통령은 열정적으로 이야기하는데 차마 이야기할 수는 없고. 근데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벌떡 일어나면서 '대통령님' 이랬어요. 노 대통령이 상황의 위중함을 눈치 챘던지 (웃음) '다녀오게' 그러시는 거예요. 최대한 빠른 속도로 해결하고 돌아오니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어디까지 얘기 했지'라고 하면서 다시 구술을 시작했죠. 그런 배려가 정말 고마웠습니다."

강 전 비서관은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에는 '관장'을 하고 수행원으로 동행했다. 육로로 방북하는 중간에 혹시나 자신의 '볼 일' 때문에 대통령 일행 전체가 멈춰 서게 될까봐 걱정돼 완전히 속을 비운 채로  방북 길에 올랐다.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글쓰기 비법은?

강 전 비서관은 <대통령의 글쓰기>에서 두 대통령과 함께 한 글 쓰기 경험을 유쾌한 에피소드를 곁들여 쉽게 풀어냈다. 두 대통령의 글 쓰기 비법도 빼놓지 않았다. "글 쓰기 분야에서 최고"라고 평가하는 두 대통령의 공통점은 광적이라고 할 만한 독서, 열정적인 사색, 끊임없는 메모다. 날카로운 논리를 구사하면서도 적절한 비유법을 통해 쉽게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노 대통령에게 들은 꾸지람 중 가장 얼굴을 붉히게 했던 말은 '무슨 얘기를 하려는지 모르겠네'였다며 글 쓰기 최고의 적은 '횡설수설'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어떻게 쓸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쓸 것인가'를 고민해야 공허하고 수식어만 많은 느끼한 글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강 전 비서관은 "박 대통령이 참모들이 써준 공약을 그대로 읽었다"(김무성 새누리당 의원)는 발언에서 드러난 박근혜 대통령의 불통 징후에도 한마디 보탰다.

"김대중 대통령은 지도자는 먼저 말하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한발 앞서 이슈나 아젠더를 내놓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그런 측면에서 지도자는 자신의 생각을 말과 글을 통해서 직접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도 자기 생각을 글로 쓰지 못하면 지도자의 자격이 없다고 했죠. 지도자가 자신의 말과 글을 장악하지 못하면 아래 참모들에게, 또 글 쓰는 전문가들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또 자신의 진정성을 담아낼 수 없습니다. 국민과 소통도 불가능한 것이죠."

강 전 비서관은 요즘 <대통령의 글쓰기>를 펴낸 출판사 메디치에서 편집주간으로 일하고 있다. 또 책 출간과 함께 글쓰기 강연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그는 "출판사에서 다른 사람들이 쓴 원고를 읽으면서 두 대통령들이 하던 대로 글을 평가하고 수정하려는 모습이 불쑥불쑥 나온다. 대통령의 글 쓰기를 8년 동안 체화했으니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는 모양"이라며 웃었다.

강 전 비서관은 끝으로 "나와 생각이 통하고, 글쓰기의 대가인 두 대통령을 보좌할 기회를 얻었다는 점에서 나는 진짜 행운아"라며 "나는 (글쓰기에) 난쟁이였지만 거인의 어깨 위에 무동을 타고 있었다"고 말했다.


태그:#강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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