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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열조차 삐뚤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가슴 아프게 한다. 한때는 너도 왕 대접 받던 족속이 아니더냐.
▲ 진열장 구석의 비 스마트 폰들. 대열조차 삐뚤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가슴 아프게 한다. 한때는 너도 왕 대접 받던 족속이 아니더냐.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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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ene 1. 이별의 순간

거룩한 의식을 원했던 건 아니다. 2년을 한 몸처럼 보듬고 살았던 그녀를 떠나보내는 길이 다만 구차하지 않기를 바랐을 뿐이다. 지척에 늘비한 '폰값' '똥값' 휴대폰 가게를 뿌리치고 굳이 통신사 대리점까지 다리품을 팔았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집에서 놀고 있던 옛날 휴대폰(2G)으로 기기변경만 하면 되는 일이었기에, 새 단말기를 사지 않아도, 눈치 줄 가능성이 최대한 적은 대리점을 택했다. 그녀와의 마지막 순간에 비굴함은 어울리지 않는다. (관련기사: 아내에게 "좋아요"라고 못하는 나...이별할란다)

세상일이 대부분 그렇듯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그녀와의 이별의 순간은 마치 휴대폰을 어디서 훔쳐온 사람 쳐다보는 듯한, 무시와 경멸의 눈빛 속에서 초라하게 진행되었다.

"이, 스마트폰을 없애고 이 휴대폰을 쓰고 싶은데요."
"기기 변경 말씀하시는 거죠?"

그 말속에는 '새 스마트 폰 구입은 안 한다는 거냐?'의 의미가 담겨있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았지만, 기계치에다가 솔직히 좀 미안한 감정도 있던 터라 "네"라고 한마디하며 시선을 회피했다. 전화번호를 묻고, 신분증 검사를 받은 후, 점원의 행동은 거침없지만, 매우 간단했다. 내가 건넨 두 개의 휴대폰에 들어 있는 USIM카드만 바꿔 끼우더니 "다 되었어요"라고 하는 게 아닌가?

"네?"

이렇게 간단하게?

"저기, 그럼 스마트 폰 요금제도랑 이 휴대폰 요금제도가 다를 텐데 그건...?"
(손톱 정리하는데 영양가 없는 전화가 걸려와, 턱밑에 전화기를 받쳐두고, 무성의하게 전화받는 딱 그 목소리로) "그건 똑같고요, 그냥 옛날 폰으로 전화만 가능하게 바꿔드린 거예요."
"그럼, 요금제 변경은?"
(그 자세에서 좀 더 신경질적인 목소리로) "그건 114에 전화하셔서 직접 하시면 됩니다."
"아, 네..."

2년 전 스마트 폰을 살 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전화번호 옮겨주는 것부터 시작해서, 개통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린다고 직장으로 직접 가져다주겠다고 하던 투철한 배달정신까지. 뭐 새 단말기를 팔아야 수익이 날 테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었다. 하지만 지난 10여 년 이상을 이 통신사에 납부한 각종 이용료와 전화요금이 떠오르는 순간, 상당한 불쾌함이 밀려왔다.

하지만 대형 이동통신사 앞에서는 항상 초라한 '을'일 수밖에 없는 소시민은, "고맙습니다" 라는 말을 남기고 돌아섰다. 그리고는 돌아오는 길에 스스로 납득할 만한 논리를 애써 만들었다. '콩나물은 다른 집에서 사고, 너한테 와서 대가리 좀 다들어 달라고 하면 좋겠냐' 뭐, 대충 이런 시답지 않은 자기변명이었다. (나중에 114에 전화 걸어 알게 된 사실은 대리점의 역할은 요금제 변경 등의 고객 서비스라는 것이다.)

오로지 한글작업만 할수 있도록 인터넷 연결도 끊어버린 구형 노트북. 나를 들여다 보는 심연의 창이다.
▲ 스마트 폰의 빈자리를 채워 줄 구닥다리 노트북 오로지 한글작업만 할수 있도록 인터넷 연결도 끊어버린 구형 노트북. 나를 들여다 보는 심연의 창이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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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장된 전화번호를 한 개씩 옮길 생각에 무거운 발걸음으로 돌아온 나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어준 건 역시 현명한 직원들이었다. "USIM 카드(사실 난 지금도 이게 뭔지 잘 모른다)에 복사해서 옮기면 돼요"라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불과 몇 분 만에 3백 개 넘는 전화번호를 뚝딱 옮겨주는 게 아닌가. 그녀와 함께했던 흔적의 일부라도 지킬 수 있어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그녀와의 작별 의식은 불쾌감 두 스푼에 안도감 한 스푼으로 막을 내렸다. 아내와 아이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해주고, 스마트한 문명이라는 열차에 태워 빛의 속도를 느끼게 해준 고마운 그녀. 김유신이 사랑하는 애마를 칼로 내리치며 느꼈을 이율배반적 감정이 역사의 시간을 거슬러 내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scene 2. 그녀를 보내고

"도대체 언제쯤이면 완전히 내 곁을 떠날 건지, 내 가슴에 남아있는 이 추억은 어떻게 지울런지..."

대학 시절, 목이 찢어져라 불러댔던 노아의 <사랑을 보내며>라는 노래의 첫 구절이다. 그녀를 보내고 며칠이 흘렀다. 님은 갔지만, 나는 완전히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다. 아니 껌딱지처럼 붙어 있는 습관 같은 그녀를 완전히 보낼 수가 없다.

2년 만에 만져보는 폴더 폰은 처음 스마트폰을 접할 때만큼이나 적응이 어려웠다. 무의식중에 자꾸 화면을 터치하기 일쑤고, 통화 버튼과 정지 버튼이 헛갈릴 때가 많다. 둘째 날인가 버튼을 잘못 눌러서, 화장실에서 큰일을 치르던 후배에게 영상통화를 거는 바람에 그 후배가 적잖이 당황하며 전화를 받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일하다가 중간중간 짬 나는 시간에 휴대폰을 열어 상단에 위치한 새 알림 표시를 확인하는 습관도 여전하다. 내 발로 걷어찬 네트워크 세상에 대한 미련 혹은 소외감이 초가을 바람처럼 밀려와 외로움을 느끼게도 한다. 나 없는 공간에서 그들은 점심 메뉴를 뭘로 하면 좋을지 묻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에 대한 의견들을 주고받으며, 더불어 사는 의미의 가치를 깨닫고 희희낙락하며 지낼 것이다.

그러한 생각에 잠겨있노라면 한편으로 배도 아프고, 부럽기 그지없다. 하지만, 그러면 지는 거다. 그녀의 빈자리를 대신한 자연 친화적(?)인 세상에 대한 자랑을 몇 줄 늘어놓아야겠다.

스마트 폰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난 지 일주일, 삶에 변화가 오기 시작했다. LTE급 속도로 밥을 먹으면 한 시간 정도 고스란히 남겨지는 점심시간에, 햇살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책을 읽는다. 수시로 그녀를 더듬느라 온전히 빠져들 수 없었던, 책 속의 세계로 한없이 몰입할 수 있다. 경우에 따라선 달달한 낮잠을 즐기기도 한다.

한쪽 벽이 창으로 된 나만의 공간. 점심 시간을 이용해 차도 마시고, 책도 읽고, 파란 하늘도 바라본다.
▲ 점심 시간의 여유 한쪽 벽이 창으로 된 나만의 공간. 점심 시간을 이용해 차도 마시고, 책도 읽고, 파란 하늘도 바라본다.
ⓒ 이정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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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 가든 충전부터 구걸하던 비렁뱅이 신세를 면할 수 있게 되었다. 특히나 2년 쯤 지나자 병약해진 그녀는 서너 시간마다 전기 충격을 줘야 정신을 차렸고, 전원이 꺼져버린 그녀를 품고 다니는 건 아내 몰래 딴 짓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나의 새 친구는 전화 걸고 받는 본연의 업무에만 충실하므로, 3일이 지나도 쌩쌩하게 살아있다. 굉장히 믿음직스럽다. (사실,지난 주말 동안 한 통의 전화와 두 개의 대리운전 메시지가 왔을 뿐이다.)

그리고 더디 가는 삶의 아름다움을 엿보게 되었다.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라는 영화의 제목처럼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는 여유가 생겼다. 빨리 무언가를 확인하고, 반응하고, 답변까지 요구하던 스마트한 세계에 등을 돌리자, 바람의 노래가 들리고, 나만의 우주와 끊겼던 교감이 시작되었다. 존재에 대한 질문의 답은 스마트 폰 검색으로는 찾아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제 불과 며칠 지났을 뿐인데, 전자파로 인한 두통이 사라졌느니 집중력이 상승했느니 하는 홈쇼핑다운 멘트는 피하려고 한다. 사실, 아직 잘 모르겠다. 다만, 밥상머리에서도 스마트 폰을 들고, 궁금하지도 않은 걸그룹 기사에 낚여 코로 넘어가는지 목으로 넘어가는지 모르고 밥을 먹던 중년의 사내는 사라졌다. 밥 한술을 씹어도 쌀이 주는 단내를 음미하며, 고마움을 생각하는, 더디 가는 인간으로 남길 바랄 뿐이다.

얼마 전 새로운 식구가 된 잔디 인형의 머리가 짙은 녹색으로 자라기 시작했다. 서로 물 주려고 아웅다웅하는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박웅현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잔디가 자라는 속도'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스마트 한 세상에서 한걸음 물러서니 탁 트인 평온한 세계가 다시 열린다.


태그:#스마트 폰, #USIM카드, #잔디가 자라는 속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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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이야기 위주로 어줍지 않은 솜씨지만 몇자 적고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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