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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기사는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왜 아프다고 말 안 했나?"

"좋은 회사 다닌다고 자랑한 게 누군데! 그만두면 아빠는 뭐가 되나!"

 

영화 <또 하나의 약속>에 나온 백혈병에 걸려온 딸과 아빠가 나눈 대화다. 귀에 낮익은 어느 회사 광고 또하나의 약속이 떠올랐다. 딸이 취직한 대기업은 엄마 아빠가 너무나 자랑스러워했던 직장이었다. 그래서 차마 힘들다는 말조차 못했다는 착한 윤미의 대사에 눈시울이 불거졌다.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과 희비가 교차되었다.

 

삼성반도체... 금기의 벽을 허문 이 영화 

 

6일 삼성반도체에서 근무하다 백혈병으로 사망한 황유미씨의 실화를 다룬 영화가 개봉된지 5일이 지났다. 이 영화는 개봉 전.후 상영관 축소와 외압설 등 논란이 일었다. 영화 제작의 어려운 악조건 속에서 2012년 11월 제작을 결심한 김태윤 감독과 제작진은 크라우드 펀딩으로 마련한 2억 원의 종자돈으로 영화를 만들었다. 지금까지 누적관객은 17만5837명(2/9일 기준)으로 현재 5위를 달리고 있다. 지금까지 112개관을 확보했다. 제작사 쪽은 앞으로 300개 스크린을 목표로 지속적으로 추가상영을 호소할 계획이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니던 3학년 윤미는 대기업 진성반도체 면접시험을 본다. 왜 입사하고 싶냐는 면접관의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

 

"아빠 새 차 사주고 엄마 용돈 주고 동생 대학 보내고..."

 

합격통보를 받은 윤미. 초등학교 밖에 나오지 못한 택시기사 아버지 상구(박철민)는 대기업에 취직한 딸을 온 동네에 자랑한다.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녀는 학생들은 3학년 1학기기가 끝나갈 무렵 대기업에서 특별전형 추천서가 들어온다. 대학진학을 목표로 하는 학생들도 있지만 실업계 학생들의 최대의 꿈은 대기업 취직이 목표다. 열악한 중소기업보다 대기업에 취직한다는 것은 본인과 학교의 자랑이다. 무엇보다도 좋은 근로여건과 복지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윤미는 입사 20개월 만에 백혈병을 안고 집으로 돌아온다. 그의 처지가 의금야행(衣錦夜行)격이다. 백혈병을 치료 중인 윤미에게 회사 측은 몇푼되지 않은 치료비와 보상금을 제시하면서 사직서를 강요한다. 또 회사 측과 이에 장악된 병원, 법률사무소는 산재를 본인의 건강 탓으로 둘러댄다. 누구하나 이들의 얘기를 들려주지 않는다. 결국 어마어마한 병원비에 부딪친 아빠 상구는 회사 측의 회유에 타협하려 든다.

 

6년만에 죽은 딸 약속지킨 바보 아빠

 


윤미는 병문환 온 동료가 같은 라인에서 또 쓰러졌다는 말을 듣게 된다. 이렇게 윤미가 일했던 '먼지 없는 방' 반도체 공장에서 동료들은 말없이 죽어갔다. 그들의 병명은 백혈병, 림프종 등 알 수 없는 희귀병이었다. 하지만 회사는 계속 쉬쉬한다. 죽음을 맞는데도 회사 담당자는 자잘한 '돈질'로 은폐하기에 바빴다.

 

윤미는 인터넷을 통해 자신의 병이 직업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매일 인터넷을 뒤지는 딸의 모습을 본 아빠는 쓸데없는 짓이라고 화를 낸다. 참다못한 윤미는 이렇게 말하며 아빠를 원망한다.

 

"아빠는 아는 게 뭐나? 진짜 바보 같다."

 

죽음을 예견한 윤미는 동생 윤석에게 뜨개질한 빨간 목도리를 선물로 준비한다. 동생에게 목도리를 주며 바닷가에 놀러 가자고 부탁하지만 철없는 동생은 데이트 약속을 이유로 누나의 부탁을 거절한다. 털모자와 목도리를 두른 윤미는 홀로 마지막 외출을 한다. 늘 자주 가던 바닷가였다. 이후 추운 겨울 바닷바람에 쓰러져 영영 일어나지 못한다. 스무 살의 꽃다운 딸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아버지는 자신의 택시에서 죽은 딸에게 이렇게 맹세한다.

 

"아빠가... 꼭 약속 지킬게"

 

이후 택시기사 아버지의 눈물 나는 투쟁이 시작된다. 세상은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를 안아준 것은 가족의 힘이었다. 그는 마지막 노무사 난주(김규리)를 찾아간다. 외면하던 난주는 윤미의 죽음을 보고 결심한다. 재판은 많은 시련을 맞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회사 측의 회유와 협박에 굴하지 않는다.

 

유미가 부르는 <회상>이 잔잔히 흐를때 여기저기서 흐느낌 들려온다. 영화에 대한 몰입보다 부당한 회사에 대한 억울함을 함께 나누려는 관객들의 분노가 더 컸으리라. 30여 년간 속초에서 택시운전 밖에 몰랐던 평범한 아빠는 재판에 뛰어든지 6년 만에 윤미씨의 산재를 인정받는다. 모두가 무모하다고 여긴 재판이었지만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직업병 승소판정을 받는다.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세상은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고 설파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이 영화에 대해 "한국 내 표현의 자유가 한발 나아간 사건, 한국 영화계에서 이례적인 일"이라고 논평했다. 우리가 이 영화를 꼭 봐야 하는 이유가 있다. 딸을 잃은 한 가장의 용기도 용기지만 성역화된 자본 중심의 불편한 진실을 용기있게 사회에 알렸다는 것은 이 사회가 한발 나아가는데 큰 성과다.<천안함 프로젝트>, <부러진 화살>, <변호인>처럼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제작이 훨씬 힘들듯 김태윤 감독의 용기가 위대한 이유다.

 

한편 고(故) 황유미씨 의 산재인정 판결에 대해 근로복지공단의 항소로 현재 서울고등법원에서 재판이 진행 중에 있다. 2014년 1월 현재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에 접수된 피해자는 151명에 이르며, 그 중 58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여수넷통> <전라도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또하나의 약속, #백혈병, #삼성반도체, #황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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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하고 싶은 일을 남에게 말해도 좋다. 단 그것을 행동으로 보여라!" 어릴적 몰래 본 형님의 일기장, 늘 그맘 변치않고 살렵니다. <3월 뉴스게릴라상> <아버지 우수상> <2012 총선.대선 특별취재팀> <찜!e시민기자> <2월 22일상> <세월호 보도 - 6.4지방선거 보도 특별상> 거북선 보도 <특종상> 명예의 전당 으뜸상 ☞「납북어부의 아들」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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