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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는 우울했다. 시차 적응하랴 지리 익히랴 하다보니 후다닥 보름이 지나갔다. 낮 열두 시만 되면 무섭게 머리를 바닥으로 내리찍게 만들던 졸음이 없어지고 새벽 두 시면 어김없이 찾아오던 백야도 끝났다. 잠은 밤에, 일은 낮에 하면서 육체적 적응이 끝날 즈음에는 새로운 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대학 때 포르투갈로 어학연수를 갔었다. 이베리아 반도의 끝자락에 셋방처럼 달려있는 포르투갈은 겨울에는 비가 온다. 혼자 있는 자취 방. 쌀쌀함에 비까지 내리면 고독은 땅바닥에 납작 엎드리게 만들고 바닥을 파고 들어 가다 못한 나머지 술을 권한다. 포르투갈 교육의 도시 꼬임브라(Coimbra)에서 만났던 학교 후배는 쓸쓸함에 무척이나 힘들어 했던 듯 했다.

이베리아 반도 끝에서 대학 후배가 느꼈을 법한 쓸쓸함이 나한테도 찾아왔다. 육체적 적응은 끝나기가 무섭게 또 다른 강적이 찾아온 것이다. 여기 멕시코도 오후 다섯 시면 어김없이 비가 왔다. 알고 보니 5월 말부터 11월까지가 멕시코 우기였다. 습기로 조금은 무거워진 실내 공기와 더불어 혼자 남겨진 나는 친구가 아내 옆으로 돌아간 시간부터 다음 날 아침 아홉 시까지 정신적인 방황의 시간이었다.

나는 밤에 혼자서 밖에 나가지 말라는 친구의 당부를 거부하기로 했다. 겨우 용기를 내어서 나간 곳이라곤 집에서 반 블록 떨어진 24시 편의점이었다. 여기는 빈 맥주 병을 가지고 가면 병 값은 받지 않고 말 그대로 맥주 값만 받고 교환해 준다. 맥주 2리터에 한국 돈으로 2천 원 정도 했었다.

편의점에서 코로나 맥주를 산다. 그리고 그 맥주와 같이 곁들일 파스토르(Pastor: 목동, 목사)를 1인분과 그린가(Gringa: 미국 여자를 지칭하는 속어)를 하나 포장해서 집으로 돌아오곤 했었다.

 타케로(타코 파는 사람) 에르미니오 씨가 잘 익은 파스토르를 능숙한 솜씨로 썰어내고 있다.
 타케로(타코 파는 사람) 에르미니오 씨가 잘 익은 파스토르를 능숙한 솜씨로 썰어내고 있다.
ⓒ 김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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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토르(Pastor)는 명칭에 대한 정확한 근거를 알 수 없었다. 터키 케밥에서 유래해 온 것이 아니냐는 설이 있지만 현재 명칭과 연결시키기 힘들다. 들판에서 목동(Pastor)들이 돼지고기를 꿰어서 구워먹어서 그런지 알 수도 없다. 여기 타코 체인점 중 엘 티손시토(El Tizoncito)가 원조라고 하는데 필자가 보기엔 한국에서 벌어지는 원조 논쟁과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타코스 알 파스토르(Tacos al pastor) 뜨거운  철판 위에 토르티야를 먼저 굽는다. 그 위에 얇게 썰어낸 파스토르를 올리고 기호에 따라 양파와 실란트로(cilantro) 잘게 썬 것을 얹고 마지막으로 파인애플 조각을 넣는다. 필자는 그 위에 매운 소스를 뿌리고 할라핀뇨를 넣고 레몬을 뿌리고 먹는다.
▲ 타코스 알 파스토르(Tacos al pastor) 뜨거운 철판 위에 토르티야를 먼저 굽는다. 그 위에 얇게 썰어낸 파스토르를 올리고 기호에 따라 양파와 실란트로(cilantro) 잘게 썬 것을 얹고 마지막으로 파인애플 조각을 넣는다. 필자는 그 위에 매운 소스를 뿌리고 할라핀뇨를 넣고 레몬을 뿌리고 먹는다.
ⓒ 김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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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라핀뇨, 아바네로(habanero) 고추를 세로로 길게 썬 할라핀뇨와 한국 청양고추보다 서른 배 가까이 맵다는 주황색의 아바네로가 놓여있다.
▲ 할라핀뇨, 아바네로(habanero) 고추를 세로로 길게 썬 할라핀뇨와 한국 청양고추보다 서른 배 가까이 맵다는 주황색의 아바네로가 놓여있다.
ⓒ 김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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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그린가(Gringa)는 명칭에 대한 정확한 설명이 된다. 좀 어이없기도 하지만 말이다. 미국 여자가 멕시코의 한 호텔에 투숙하고 있었다. 호텔을 나서던 여자가 호텔 앞 타코 집에서 꼬챙이에 꿰어진 파스토르를 보고는 큰 토르티야(tortilla: 옥수수 전병)에 치즈를 얹고 그 위에 파스토르를 올려서 먹은 것이 유래다. 미국 여인을 지칭하는 그린가(Gringa)가 그대로 이 음식의 명칭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그린가(Gringa)라는 단어에서 난 멕시코의 아픈 과거를 느낀다. 1846년 미국은 멕시코에서 전쟁을 일으킨다. 졸지에 멕시코 주와 애리조나 캘리포니아 등을 잃게 된 멕시코는 결사항전을 하지만 멕시코 동부 연안 베라 크루스로 상륙작전까지 감행한 미국에게 수도 멕시코시티까지 함락되고 만다.

이후 과달루페-이달고 조약으로 미국은 1800만 가량의 달러만 지불하고 뉴멕시코,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애리조나, 유타 주 등 한국 영토의 15배 정도 크기의 땅을 자국영토로 편입시켜 버렸다. 그때 미군이 입었던 군복 색상이 초록색(Green)이었다. 수도까지 무력으로 함락된 멕시칸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이 말 한 마디였다.

"Green, Go(미군은 물러가라)!!!"

합창으로 외쳤는지 삼삼오오 모여서 작은 소리로 전하는 말이었는지 알 수는 없다. 자국의 심장까지 들어와 버린 미군들에게 외치던 말은 시간이 지나면서 미국 남성을 지칭하는 그린고(Gringo: 미국 남자)가 되었고 스페인어 특성상 어미를 –a로 바꾸어서 성별을 구별하기에 미국 여자를 그린가(Gringa)라고 부른 것이다.

우리에게도 을사늑약으로 한일강제합병이 되어본 아픈 이야기가 있기에 그리고 3·1운동에서 불렀던 "대한민국 만세"라는 힘찬 함성이 있었기에 남 이야기 같지만은 않게 느껴진다.

십삼 년 전에 2리터 맥주 병이 담긴 검은 봉지와 포장된 그린가, 파스토르를 들고 돌아가던 길은 지금도 가끔 지나가다 보면 무척이나 우울해 보인다. 옆에 와이프가 타고 있지만 혼자 중얼거린다. '길 참 을씨년스럽네!' 환하게 밝던 편의점 계산대, 왁자지껄하던 타코 가게 '타코스 라 살사(Tacos la salsa)'.

거기를 등지고 검은 봉지를 든 채로 가로등도 없는 길을 따라 아침 아홉 시까지 혼자일 수 밖에 없었던 공간으로 돌아가는 내 모습이 아직도 보이는 듯하여 왠지 짠해진다. 하지만 밤의 무료함을 견디기 위해서 찾던 곳이 가족들과 즐기는 맛있는 야식 집으로 바뀌었으니….

 아직은 한가한 타코 가게에서 필자의 가족들이 야식을 먹고 있다. 체인점 형태를 한 El Tizoncito나 집 근처의 El caminero 등과 같은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 우리 가족은 이 곳을 더 좋아한다. 가격은 비슷하다.
 아직은 한가한 타코 가게에서 필자의 가족들이 야식을 먹고 있다. 체인점 형태를 한 El Tizoncito나 집 근처의 El caminero 등과 같은 식당에서 먹는 것보다 우리 가족은 이 곳을 더 좋아한다. 가격은 비슷하다.
ⓒ 김유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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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금요일이다. 아이들의 성화로 새로 개봉한 만화영화 <레고무비>를 보고나니 밤 열 시나 되었다. 한참 전에 영화 시간에 맞추어서 대충 먹은 저녁은 기억도 없다. 와이프와 눈이 맞았다. 가자! 둘째 놈은 집에 가자고 우기지만 큰 놈도 합세해서 3:1. 다수결의 원칙으로 둘째의 의견은 가볍게 묵살되었다.

가자! 파스토르(Pastor)와 그린가(Gringa)가 있는 추억의 야식집으로. 부에나스 노체스(Buenas noches!)!


#멕시코#타코#그린가#파스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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