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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말이면 퇴직 2년이 된다. 하지만 아직도 나에게 교직 생활의 여운이 남아있음을 본다. 책을 읽거나 글을 쓰다가도 거실에 나가 TV를 켜면 어디에 체널을 맞추어도 대부분 광고 시간이다. 그때서야 시계를 보면 정각에서 10분 전 쯤을 가리키고 있다.

해직 기간을 빼고도 30년을 학교에서 살았던 탓인지 정각에 시작하여 50분 만에 끝나는 수업에 맞추어진 생체시계가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어 혼자 웃곤 한다. 그러면서 길들여진 사람의 버릇이 무섭다는 생각을 한다.

지난 세월의 기억은 털어내고 잊으려하지만, 내가 모르는 잠재된 교사의 직업의식이 얼마나 더 남아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그런 말을 했더니 웃고 만다. "자신은 모를 것"이라는 웃음이다.

나에게 학교의 시간에 길들여진 조건반사의 흔적은 많을 것이다. 몸에 밴 시간관념, 주변 정리에 대한 관심, 사람을 만나면 배우려하기보다는 나의 일을 설명하려는 태도 등은 나 역시 자각하는 버릇이다.

아마 그런 점 말고도 부지불식간에 '선생 티'를 내는 경우는 더 많을 것이다. 가끔 아내는 내가 자신을 학생 취급한다고 불만을 토로하는데 일상적인 언어에서도 몸에 배인 버릇은 쉽게 고치기 어려운가 보다.

이제 슬슬 농사를 준비해야겠다. 학교로 말하면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는 셈이다. 농사라고 해도 쌀 등 식량을 뺀 고추 마늘 채소 등을 재배하는 겨우 텃밭 수준이다.
또 생산한 농산물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형편도 아니다. 때문에 스스로 농부라고 내세우기는 어설프지만 그래도 누가 묻기라도 하면 나는 농부라고 대답한다.

농촌에서 2월은 영농설계의 달이다. 특히 정월 대보름이 지나면 볍씨 감자 등 씨앗을 챙기고 하우스 안에 씨고구마를 넣어야한다. 텃밭에 심을 작물의 종류와 위치를 정하여 이랑을 만들고 퇴비를 뿌리는 일도 숙지원에서는 2월에 하는 일이다.

야콘 심을 자리는 두둑을 높게 하고 두둑의 간격을 벌려야하지만 감자 심을 자리는 두둑이 작고 낮아도 괜찮다. 고추 고구마 심을 자리는 두둑의 간격을 넓히는 것이 좋고 생강 토란 심을 자리는 두둑의 간격을 좁히는 것이 좋다. 그런 설계 끝에 쉬엄쉬엄 흙을 뒤집고 두둑을 치는 일, 비닐 멀칭을 하는 일을 한다.

경운기로 갈면 반나절이면 족하겠지만 오직 괭이와 삽에 의존하니 3월초까지 이어질 것이다. 그렇지만 재촉하고 지켜보는 눈이 없으니 완급을 가려서 운동 삼아 놀이처럼 할 작정이다. 그렇게 농사를 하다보면 상대하는 대상이 사람이냐 식물이냐 하는 점이 다를 뿐 텃밭이 학교 같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밭 만들기는 학급경영계획 수립이요, 씨앗뿌리기는 출석부 만들기와 유사하고 싹이 터 자라는 모습을 보면서 틈틈이 김매기를 하는 일은 아이들의 인성교육과 비슷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또 여름 백중 무렵의 김매기가 끝나면 풀의 기세도 한풀 꺾이는데 그 시기가 농촌의 농한기라고 할 수 있다. 학교의 여름방학과 상당히 겹치는 시간이다.

가을 수확은 학교의 통지표와 같고 겨울 농한기는 그대로 학교의 겨울방학이다. 그렇게 비교하면서 밭을 갈고 씨앗을 뿌리며 수확을 기다린다. 조금은 억지스럽게 공통점을 찾고자 하는 태도 역시 몸에 밴 의식의 잔재를 드러내는 태도일 것이이다.

지난 해 10월, 하우스안에 비닐 터널을 만들어 채소를 심었다. 
겨우내 우리 가족의 채소 공급원이었다. 
봄 나물이 나오기까지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 채소밭 지난 해 10월, 하우스안에 비닐 터널을 만들어 채소를 심었다. 겨우내 우리 가족의 채소 공급원이었다. 봄 나물이 나오기까지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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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사?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하늘의 뜻이 절반'이라는 말처럼 농사는 인력으로만 되는 일이 아니다. 어느 정도 사람의 힘으로 자연의 재앙을 막을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고 시설이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자연의 변화가 예측할 수 없는 경우가 빈번해진 점이 불안요인이다. 더구나 농촌을 외면한 농업정책은 농민들에게 불리한 것이 사실이다. 또한 농부가 되는 것 역시 쉽지 않은 일이다. 

농사는 몸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농사는 도전해볼 가치가 있는 일이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과 사는 재미와 보람 사이의 균형을 잡는 일이 어렵지만 캄캄한 지하에서 석탄을 캐는 일보다는 백 배나 쉬운 일이다. 손님이 오지 않는 가게를 지키며 빈 금고를 지켜보는 일보다 마음편한 일이다. 특히 우리처럼 텃밭에서 우리 생활에 필요한 농작물을 자급자족하려는 수준이라면 뜻만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겨울 동안 우리는 채소를 아예 사먹지 않았다. 비닐하우스 안에 비닐 터널을 만들어 상추며 비트 쑥갓 청경채 쌈채소 시금치 산채나물 등을 제대로 키웠기 때문이다.

시골에 정착하여 두 번째 맞은 겨울이었다. 시골 살림의 '노하우'를 축적한 덕분인지 아니면 적응한 것인지 분간하기 어려우나 무난하게 겨울을 넘기고 있는 중이다. 가스 스위치만 올리면 난방이 되는 도시 생활에 비해 불편한 점도 있었다. 하지만 곰곰이 따지면 오히려 도시에서 느끼고 맛볼 수 없는 일이 많았다고 본다.

계절에 따라 변하는 자연의 풍경, 아름답고 진기한 모습의 꽃들, 태풍 가뭄 홍수에도 꿋꿋하게 버티는 농작물과 나무들을 통해 용기와 희망을 보았다. 눈이 오는 날 가을에 수확하여 쟁여놓은 고구마를 벽난로에 구워먹고 날마다 시간마다 위치가 달라지는 밤하늘의 차가운 별을 보는 즐거움은 또 어떻게 말로 할 수 있을 것인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우리는 시골에서 느림과 여유를 본다.

평화의 공간이요 치유의 공간이라는 생각을 한다.

하우스 한 쪽에 마련한 묘판이다. 
아내는 꽃씨를 뿌리고 이름표를 꽂았다.
▲ 꽃씨 묘판 하우스 한 쪽에 마련한 묘판이다. 아내는 꽃씨를 뿌리고 이름표를 꽂았다.
ⓒ 홍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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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쫓기고 잡무에 허덕였던 학교였다. 아이들과 동료들의 시선을 의식하며 말 한 마디 함부로 할 수 없는 곳이었다. 보충수업, 야간 자율학습, 생활지도, 성적관리…. 실수가 용납되지 않는 그래서 늘 긴장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곳이 학교였다.

그런 학교에 비하면 텃밭은 해방된 공간이다. 더구나 잊으려고 하지 않아도 옛날의 기억은 점점 희미해지고, 금방 손에 쥔 것도 둔 자리를 잊으며 욕실의 불을 켜놓는 일은 예사가 되어버린 나이가 되었다.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망각의 정도에 깜짝 놀라는 경우가 많은 나이. 종종 오늘 할 일을 깜박 잊는 경우는 더 빈번해질 것이다. 그런데 텃밭 농사는 잠시 깜박 잊어도 용서되는 일이다. 

텃밭은 출 퇴근 시간도 스스로 결정하고, 순간 변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긴장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다. 농사란 잠시 깜박 잊어 하루쯤 늦는다고 해도, 또 손님이 와서 잠시 미룬다고 해도 영영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에게는 생존에 위협이 될 망각은 본능적으로 경계할 능력이 있다고 했다. 우리가 보통 사람의 경계를 벗어날 시간이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어쩌면 그 판단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해줄 일인지도 모른다. 입춘이다.

계절을 미리 당겨 보는 느낌도 있지만 계절을 안내하는 이정표라는 생각을 한다. 숙지원에는 곧 붉은 매화 그리고 수선화가 필 것이다. 오늘 아내는 자연과 함께 가는 투명한 여정(旅程)을 기원하며 비닐하우스 한 쪽에 꽃씨를 뿌렸다. 싹이 터서 모종이 되면 봄날의 꽃밭에 옮겨 심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한겨레 블로그 등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꽃씨 묘판, #비닐터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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