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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권력이라는 게 속성상 원래 그런 것인가 봅니다. 어제의 동지가 원수가 되고, 어제의 원수가 동지가 되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권력을 위해서라면 일가친척 피붙이쯤 때려죽이는 것도 서슴지 않습니다. 의기투합하다 배반하고, 이간질 하다 아부하고…. 참으로 치사하고 더럽고 역겨우리만큼 비열한 게 정치로 포장된 권력이라 생각됩니다. 조선시대의 정치가 그랬고, 유신과 군부독재정권은 물론 작금의 정치권에서도 어렵지 않게 들여다 볼 수 있는 잔상입니다.

흔히들 조선 건국에 있어 이성계의 역할이 '하드웨어'였다면 정도전이 한 역할은 '소프트웨어'라고 합니다. 무장출신인 이성계가 군력을 동원했다면 역성혁명을 하고 조선을 건국하는데 필요한 온갖 지략들은 정도전으로부터 비롯됐기에 그럴 겁니다.

이성계의 혁명동지였던 정도전은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방원(조선 3대 왕 태종)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지금으로부터 616년 전인 1398년 8월 26일(음력), 요동수복을 앞두고 송현방에서 느긋하게 술 잔을 기울이던 정도전은 졸지에 들이닥친 이방원 무리가 휘두른 칼에 목이 잘리는 것으로 생을 마무리합니다.

이방원이 고백하는 정도전 살해 이유 <정도전>

 <정도전>┃지은이 이재운┃펴낸곳 책이있는마을┃2014.1.24┃1만 3000원
<정도전>┃지은이 이재운┃펴낸곳 책이있는마을┃2014.1.24┃1만 3000원 ⓒ 책이있는마을
<정도전>(지은이 이재운, 펴낸곳 책이있는마을)은 정도전의 목을 그렇게 자른 이방원이 16년 후, 정도전의 제삿날 정도전의 아들 정진을 찾아 가 정도전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고백하는 내용을 줄거리로 삼은 소설입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고,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고 하지만 소설 속에서 아른거리는 역사적 배경을 통해 정치와 권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일 수 있는지를 가늠하기에 충분합니다.

"원래 망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벼슬이 한 품이나 두 품쯤 떨어지는 게 망하는 것이라면 오죽 좋으랴. 재산이 천 석에서 구백 석이나 팔백 석으로 줄어드는 것이라면 오죽 좋으랴.

그러나 망한다는 것은 있는 걸 다 바치고도 모자라 미래며 희망마저 모조리 빼앗기는 것이다. 목을 바치고도 모자라 아내를 적첩으로 빼앗기고, 자식을 노비로 잃는 것, 이것이 망하는 것이다."(<정도전 101쪽)

졸지에 패가한 정도전 일가, 수군으로 끌려간 정도전의 큰아들 정진과 손자 래의 삶을 통해 권력무상, 패자가된 권력이 얼마나 비참한가를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현장에 있던 두 아들이 목숨을 잃고, 큰아들 정진과 손자가 수군으로 끌려갔을 뿐 여느 역모자의 집과는 달리 정도전 일가는 더 이상 별다른 화를 당하지는 않습니다. 역모자의 집안이라면 응당 삼족을 멸하는 것은 물론 멸문지화를 당하는 것이 당연할 진데 어찌된 일인지 미스터리입니다.  

수군으로 끌려가 모욕적인 삶으로 목숨을 연명을 하던 정진과 그 아들 래는 서울 삼봉재에서 금고의 생활을 시작합니다. 삼봉재에서 16번째 정도전 제사를 지내던 날밤, 정도전의 아들 진과 손자 래는 누군가의 부름을 받고 집을 나섭니다.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다른 아닌 방원과 충녕(세종)이었습니다.

한때 이방원과 정도전은 호형호제하던 사이였지만 지금은 아버지를 죽인 철천지원수입니다. 충녕과 래를 보증인처럼 앉힌 방원은 자신이 정도전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묻고 답하는 식으로 낱낱이 설명합니다.

"내가 금릉에 갔을 때 주원장이 뭐라고 했는지 모르지? 주원장이 말하기를 '우리 명나라는 누가 뭐래도 우리 주씨 집안의 기업이야. 그런데 왜 호씨가 끼어들어 마음대로 짐의 모사를 죽이고, 멋대로 인사를 하지? 황통이 흐려지면 나라는 망하는 법이야. 그래서 내가 호씨 일당을 잡아 죽였지.' 하더군. 결국 조선은 이씨의 기업이지 정씨의 기업이 아니라는 말이었어. 자신은 호씨를 죽였으니 넌 정씨를 죽여라. 이런 뜻이었단 말이야. 물론 난 듣기만 할 뿐 대답은 하지 않았지."(<정도전> 214쪽)

정도전의 죽음은 정치적 살인이었다

그랬습니다. 이방원이 정도전을 죽인 진짜 이유는 정도전을 없애 달라는 주원장의 요구에 응한 충실한 개 노릇이었습니다. 또한 이방원이 뭐라고 설명해도 정도전을 그토록 비참하게 살해한 것은 권력을 독점하려는 정치적 살인일 뿐입니다.

그렇게 죽임을 당했음에도 정도전 일가가 추가적으로 별다른 화를 당하지 않은 것 또한 그럴싸한 변명과 온갖 미사여구로 설명하지만, 역사적으로 있었던 사실들은 정치가 갖는 두 얼굴이며 권력이 휘두르고 있는 이중적 폭력일 뿐입니다. 더럽고 치사한 정치, 비굴하면서도 잔인한 권력이 낳은 인간적 비극입니다.

책에서는 권력을 잡은 자가 자신의 과오를 어떻게 합리화하고, 정당화 하는지를 생생하게 읽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권력을 위해서라면 국가와 민족쯤 하시라도 배반할 정치 모리배들이 작금의 우리나라 정치에서도 기웃대거나 우글대고 있는 것은 아닌가를 뒤돌아보게 합니다.  

정도전이 꿈꾸던 나라가 '하늘을 섬기는 민본국가'였다고는 하지만 실현되지 않은 정치는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고 하지만 소설 속에서 아른거리는 권모술수와 권력 등이 정치와 권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비인간이고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가늠하기에 충분합니다.

덧붙이는 글 | <정도전>(이재운 | 책이있는마을 | 2014.01.24 | 1만3000원)



정도전

이재운 지음, 책이있는마을(2014)


#정도전#이재운#책이있는마을#이방원#송현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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