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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를 지지하는 집회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를 지지하는 집회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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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9일 고려대 재학 중인 한 학생이 붙인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대자보가 화제입니다. 이 글을 띄운 페이스북에는 2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좋아요'를 누르며 공감대를 표했습니다. 일선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도 대자보 행렬이 들불처럼 일어났습니다. 여야 정치인들도 이런 대자보 열풍에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펜보다는 키보드가 익숙한 시대에 이런 대자보가 인기를 끄는 것은 신선합니다.

대자보를 지지하는 목소리들, 숱하게 내붙는 또 다른 대자보들, 정치권의 관심. 저는 이런 대자보 유행이 안녕하지 못한 우리네 현실을 바꿀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수십만, 수백만 명의 지지를 받아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유를 말하기 전에 한 가지 여쭙겠습니다.

"당신은 진보입니까?"

진보라고 한다면 한 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손해 볼 준비가 되셨습니까?"

진보는 우리 삶과 동떨어진 이상 사회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바꾸는 일입니다. 진보 진영의 주요 의제인 '복지'만 해도 그렇습니다. 무상 보육, 무상 의료, 무상 급식 등 소위 무상 시리즈, 국민 기본 소득제, 안정적인 일자리 증가. 진보적 의제를 현실화 시키는 것은 삶이 바뀌는 일입니다.

복지 정책을 실행하려면 세금을 올려야 합니다. 박근혜 정부가 지하경제 양성화 등을 통해 증세 없이도 할 수 있다고 했지만, 세원을 마련하기 어렵게 되자 복지 정책을 축소하고 있습니다. 결국 박근혜 정부의 여러 복지 정책이 실현되려면 증세 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복지 정책으로 관심을 받고 있는 스웨덴은 전 국민이 평균적으로 소득의 50%를 세금으로 내고 있습니다. 한국의 소득세율이 평균 20%대인 것을 감안하면 2배입니다. 즉, 내일 당장 받게 되는 당신의 소득세 고지서에 찍히는 금액이 20만 원에서 40만 원으로 늘어난다는 이야기입니다. 받아들이실 수 있겠습니까?

일자리 늘리기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은 이미 저성장 국가로 진입했습니다. 80년대 대학 졸업하고 원서만 넣으면 회사를 들어갈 수 있는 황금의 3저시대는 이제 없습니다. 정부에서 시간제 일자리를 주요 정책으로 추진하는 것도 일자리를 만들기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앞선 정부도 대기업 세금 깎아주면서 일자리 창출을 유도했지만 효과는 미미했습니다.  결국 파이를 나누려면 조정이 필요합니다.

당신의 근로 계약서가 바뀝니다. 주 5일 8시간 근무에서 주 5일 4시간 근무로. 당신의 희생으로 실업자 1명의 일자리가 생기지만, 당신의 봉급은 절반으로 줄어듭니다. 원자력발전소의 위험성 때문에 원자력 발전 비율을 낮추면, 전기요금이 오릅니다. 당신의 월급이 깎이고, 내는 세금이 2배 오르고, 전기요금도 오르는 상황을 감당하실 수 있으십니까?

진보란 이상적인 구호나 말로만 이뤄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토마스 모어가 상상했던, 모두가 행복한 나라 '유토피아'처럼 공허합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내놓아야 하고, 손해를 보아야 합니다. 나보다 우리를 생각하는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많아야 합니다.

'능력껏 일하고, 필요한 만큼 받는다'는 공산주의 사회를 구상했던 마르크스의 구상에 깔려있던 전제는 '성선설'입니다. 마르크스도 말년에는 '공산사회는 실현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공산 사회의 구상이 완전히 실패한 80년대 이후, '이기적인 인간'을 전제로 한 자유 경제 사회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부르주아 계급의 치밀한 전략 때문일까요?

조지 오웰은 '진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1900년대 초반, 이렇게 일갈합니다.

"입에 거품을 물고 부르주아를 규탄하는 이들, 맥주에 물을 타자는 개혁가들, 지금은 대유행이라 공산주의자지만 5년 뒤엔 파시스트가 되어 있을 운동권과 문단의 눈치 빠르고 젊은 신분 상승자들, 고상한 여성들과 샌들 애용자와 수염 기른 과일주스 애호가 등과 같이 죽은 고양이에게 파리 꼬이듯 진보의 냄새를 맡고 몰려드는 온갖 시시한 족속들이 그들이다."(위건부두로 가는 길/한겨레 출판)

그는 진보에 대해 단순한 호기심이나 지적 충족의 도구로 사용하면서, 자신의 삶에는 부정적인 영향이 미치는 것을 꺼리는 사람들을 경멸했던 것 같습니다.

철도 민영화에 반대하는 의견을 갖거나, 대자보를 쓴다거나, 체 게바라 티셔츠를 입는다고 진보주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당신은 진보입니까?"


태그:#대자보, #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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