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젊은 시절의 아버지 사진. 매우 미남이라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젊은 시절의 아버지 사진. 매우 미남이라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 김준수

관련사진보기


아버지! 어느새 추운 겨울입니다. 자주 연락드리려고 노력했는데 최근에는 그렇지 못한 것 같아서 죄송해요. 외국에 나가서도 매달 안부를 묻곤 했는데, 요즘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뜸해진 것 같아요. 이제는 한 달에 한 번 통화하기도 쉽지가 않네요. 저도 아버지를 닮아서 기념일 챙기는 감각이 참 무딘 편이에요. 그래서 남들이 기념하는 날들, 저는 주로 무덤덤하게 보내는 편이에요. 그래서 아버지가 어떻게 느끼실지도 잘 알지만, 새해이니만큼 올해 첫 인사를 이렇게 드리려고 해요.

안녕하시죠? 여러 가지 이유로 다들 서로의 안부를 묻는 요즘이에요. 사실 지난 몇 년 동안 명절 외엔 잘 찾아뵙질 못했어요. 학자금대출로 쌓인 빚 청산하느라, 고졸 신분으로 일자리 구하느라, 그리고 비정규직으로 밤낮없이 일하느라 바빴죠. 그래도 긴 시간 동안 언제나 아버지를 떠올렸고, 그러면서 힘을 내곤 했어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제가 아버지를 자주 뵙지 못한 것의 적절한 핑계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은 알아요. 그래서 늘 죄송해요.

제가 군대를 갓 전역하고 일할 때, 아버지는 아버지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해주시곤 했죠. 밀양 농가에서 6남매의 넷째로 태어나, 겨우 끼니를 이어나갈 정도로 가난한 환경 때문에 학업에 뜻을 두지 못하고 혼자서 도시로 나와 일을 해야만 했다고. 국민학교 졸업식이 끝나고서 집에 들르지도 못하고 곧장 요금 80원 하던 완행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일하러 떠나야만 했다고. 그 뒤로 생판 모르던 사람의 집에 들어가 얹혀살며 일을 배웠다고 하셨죠.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도시에서, 다른 사람 밑에서 일하고 그 사람 집에서 머슴처럼 살았다. 밥도 그 집 식구들이 식사하고 남는 반찬으로 겨우 먹으며 지냈지. 그런데도 집안형편이 안 좋았고, 네 할아버지가 폭군처럼 너무 엄해서 밀양으로 돌아가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고. 객지생활 하고 우여곡절 끝에 마산에서 야간 중학교를 겨우 졸업했다카이. 그러고는 서울에서 공장 생활도 하고, 대구 내려와서 중앙로에 있는 안경점에서 일을 배웠지. 그 뒤로 대구에서 내 가게를 열고 30년간 안경점을 했다."

그 어린 나이에 고생했을 과거의 아버지를 생각하면서 저도 힘낼 수 있었어요. 어떤 경우를 겪더라도, '아버지는 이것보다 더 힘든 것도 이겨내셨을 거야' 하고 넘길 수 있었거든요. 평소 어떤 궂은 일이 생겨도 묵묵하게 버텨내시는 아버지를 보며, 저도 어느샌가 그런 모습을 배우면서 자라게 된 것 같아요.

평생 안경 만드는 일을 하시면서, 제가 초등학생일 적에 첫 안경을 만들어주시기도 했죠. 그리고 말수가 적은 분인데도 제가 힘들 때마다 "침착하고 한 발 물러서서 생각해보자. 늘 밝게 생각하자" 하시며 많은 이야기를 저에게 해주시고 도움을 주시곤 했어요. 아직 세상을 보는 눈이 흐릿하던 시절에 아버지가 제 앞을 밝혀주신 거였어요. 제게 늘 선물해주신 안경처럼요.

제가 열아홉에 아버지의 아내, 제 어머니를 잃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요. 누구보다 슬펐을 텐데도 아버지는 제 앞에서만큼은 흔들리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셨죠. 제가 힘들어 할까봐 옆에서 다독여주시기도 하고, 제 앞에서만큼은 밝은 미소를 보여주셨어요. 서툴던 요리도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하시더니 이젠 찌개도 국도 누구보다 맛있게 끓여주시기도 하고요. 덕분에 저도 좌절하지 않고 힘을 낼 수 있었어요.

늘 내게 선물해준 안경처럼, 내 앞을 밝혀주신 아버지

 아버지와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
 아버지와 주고받은 카카오톡 메시지
ⓒ 김준수

관련사진보기


무엇보다 가장 기억나는 건, 2010년 제가 호주에서 2년 3개월 만에 귀국해서 아버지와 낚시를 갔던 일이에요. 대구 교외의 호숫가로 먼지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차를 타고 가서, 텐트를 치고 서늘한 바람을 맞으며 함께 긴 대화를 나누었죠. 그날의 기억은 새파란 여름날 새벽하늘의 이미지로 선명하게 남아서 아직도 잊히지 않아요.

짙은 안개 때문에 어슴푸레 보이던 아버지의 옆모습, 잠자리가 낮게 날아다니는 서늘한 공기를 품은 하늘, 아버지도 저도 좋아하는 조용한 풀벌레 소리. 보이고 들리던 그날의 모든 것이 다 좋았어요. 간만에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서 그렇기도 했겠지만, "사는 게 사실 별거 없다"면서도 제 앞날을 걱정해주시던 그 마음 때문이었겠죠. 지난 29년을 든든하게 살아올 수 있었던 것도 다 그것 덕분이었다는 것을, 저는 이제서야 깨달아요.

"준수야."
"네."
"여자친구 있나?"
"지금은… 없죠."
"생기면 자상하게 잘해줘라. 남자가 많이 양보해야 된다. 그리고 친구도 그렇고, 니 사람이라고 생각되면 많이 챙겨주고."
"네. 아버지 아들인데 그런 건 잘해야죠. 보고 배운 게 있는데."
"허허, 고놈 참."

그날 아버지와 저는 아버지의 삶을, 그리고 제 삶을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대화의 소재로 삼았죠. 마치 적절한 무게로 떠 있던 수면 위의 낚시찌처럼, 그날 나눈 말들은 제게 잔잔한 울림을 줬던 것 같아요.

저는 당시 스물여섯이라 다 컸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날 김이 모락모락 나던 라면부터 따스한 침낭까지, 많은 것을 챙겨주고 알려주시려 애쓰던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아직도 나는 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생각에 기분 좋으면서도, 늘 커다랗고 우람하게 보이던 아버지의 어깨가 어딘가 쓸쓸하게 보여서 가슴 한 구석이 아릿하게 찡했어요. 먼 훗날 제 삶을 돌아볼 때, 떠오르는 많은 순간 중에 그날의 기억도 분명 한켠을 차지하고 있을 것 같아요.

늘 입버릇처럼 하시는 말, "이제 너 잘 되면 나는 다 괜찮다. 나야 늙으면 다 아프고 그런 거지. 내가 살아봐야 얼마나 더 살겠나" 하실 때마다 저는 가슴이 아파요. 지금도 아버지는 충분히 잘 지낸다고 하시겠지만, 저는 아버지가 더 많이 웃고 즐겁게 지내셨으면 해요. 그리고 제가 아버지의 행복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었으면 해요. 아버지가 저의 삶에 있어서 힘든 고비마다 더 쉽게 강을 건널 수 있도록 큰 디딤돌이 돼주셨듯이요.

새해를 맞아 저도 무언가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드리고 싶은데, 괜히 혼자서 추억에 잠겼더니 좋은 말이 많이 떠오르질 않아요. 그저, 건강하게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오래오래, 크게 아픈 곳 없이 저와 같이 잘 지내셨으면 해요. 그러면 그때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 더 많이 생각나서 이것저것 해드릴 수도 있겠지요. 그럴 수 있었으면 해요. 늘 건강하세요. 부족하지만, 이제 아버지보다 더 커버린 이 아들이 늘 곁에 있을게요.

2014년 새해, 아들 준수 올림


#덕담#아버지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