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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타리(대태이도)  이곳 풀신 신언길(61세)와 하우리 이장
섬타리(대태이도) 이곳 풀신 신언길(61세)와 하우리 이장 ⓒ 이재언

파시의 섬 대태이도

30리 백사장으로 이뤄진 신안 임자도 대광해수욕장. 이곳 앞바다에는 작은 섬 섬타리(대태이도)와 뭍타리(소태이도)가 있다. 임자도와는 지척이다. 물이 빠지면 뭍타리는 모래사장으로 건너갈 수 있을만큼 가깝다. 500m 거리로 임자도 나박바구에서 큰 소리로 사람을 부르면 섬타리 사람이 배를 갖다 대 왕래했다 한다. 섬 형태가 큰 귀처럼 생겼다 해서 대태이도라 부른다.  '타리섬'으로도 불리는 대태이도는 전국 제일의 민어 어장으로 목포에서 45㎞ 거리에 있다. 지난 수백 년간 타리 파시로 명성을 날렸던 곳이다.  '타리파시'는 섬타리, 뭍타리, 임자도 하우리 불등 등에서 열린 파시를 지칭한다. 일본 노인들이 전라도와 목포는 몰라도 타리섬은 알 정도로 국내외 최고의 파시였다. 섬타리쪽을 '타리' 또는 '나박바구' 라 한다. 타리는 섬을 뜻하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옛말이다. 인도네시아 수마트라도 수마(섬)+트라(타리)라는 뜻이다.

학교부지  1971년 5월5일 준공 표지판
학교부지 1971년 5월5일 준공 표지판 ⓒ 이재언

타리 파시는 1611년 허상옥이 타리어장을 개척하면서 시작됐다. 그 후 임자도 하우리로 타리 파시를 확대 발전시켰으며, 타리섬과 함께 임자도 최고의 어장을 열었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타리 파시가 바로 이웃섬 재원도로 옮겨 갔으나, 타리섬은 1980년까지 명맥을 유지했다.  타리에는 정유재란 이후 어항이 들어섰다. 타리어장에는 민어와 가오리, 부세, 농어, 숭어가 많이 잡힌다. 어획고는 1925년기준 연산 30만원 정도였다. 타리어장은 전국 제일의 민어어장으로 타리항으로부터 이삼십 해리 되는 곳에 있다.

민어잡이 전진기지인 타리항은 어선 500척 가량이 정박할 수 있다. 타리항 앞에는 뭍타리와 섬타리가 있어 서해안에서 몰려오는 바람을 막아줘 좋은 항구조건을 갖추고 있다. 타리항 앞바다에는 수십 ㎞에 이르는 긴 모랫등이 있다. 법성포에서부터 타리 앞바다를 지나 해남까지 이어지는 이 모랫등은 해수면 아래 생긴 모래산맥으로 수면 1m 아래로 드리워져 있다. 그곳에는 항상 흰 바다거품이 인다. 썰물 때는 지나가던 배 밑바닥이 걸려 오도가도 못하게 돼 뱃사람들은 이곳을 지나갈 때 항상 주의해야 했다. 타리어장에서 나는 민어를 '타리민어'라 한다. 이는 품질 면에서 동북아 최고로 평가 받는다. 타리민어의 특징은 건어물로 만들어 방망이로 두드리면 부러지는 다른 민어들과는 달리 고기의 육질이 솜처럼 부풀어 오른다. 이 솜처럼 부풀어 오른 민어 고기는 최고 맥주안주로 인정받았다.

학교  이곳 출신 신언길씨
학교 이곳 출신 신언길씨 ⓒ 이재언

매년 6~10월 파시 열려

타리에 민어어장이 들어서면 파시가 열렸다. 타리민어는 파시를 통해 전 조선과 일본에 팔려나갔다. 300여년 전부터 시작된 파시는 매년 6월 상순에서 10월 하순까지 5개월간 열리며 최대 성어기는 8월이었다. 따라서 타리파시도 8월이 되면 최고로 흥청거렸다.

타리에 파시가 열리기 전까지는 한 채의 집도 없는 모래사장에 불과했다. 그러나 매년 6월 상순이 되면 상인들이 모래밭에 듬성듬성 기둥을 세우고 벽과 지붕을 마람으로 인 초막을 지은 뒤 영업했다. 타리 일대는 무타리 앞에서 하우리까지 잇대어 지어진 수 백호의 초막과 항구에 정박한 어선들의 전기불로 불야성을 이루었다. 타리항에는 고기 사러 온 배와 팔러 들어온 배, 수 천명의 어부와 민어를 사러온 상인, 관광객들로 들끓었다. 마치 국제도시를 연상케 했다. 이들을 상대로 상인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봄이면 장사를 나왔다가 늦가을 파시가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갔다. 임자도 주민들도 파시에 나가 장사를 하거나 부업으로 파시촌에 한주(발효된 곡류나 고구마 등을 증류해서 만든 맑고 투명한 술)를 공급했다. 파시를 상대로 한 한주 제조는 당시 임자도 농가의 주요 수입원이 됐다.

임자도 하우리 뒷편 불등 모습  타리섬에서 바라다 보인다.
임자도 하우리 뒷편 불등 모습 타리섬에서 바라다 보인다. ⓒ 이재언

파시에 사람이 몰려들다보니 편싸움 등 별의별 사건이 빈번했다. 임자도 어부들은 타리파시의 무질서 상태를 스스로 바로잡기로 했다. 1925년 8월 3일 도구포 박종화, 정경남 등 어민 100여 명은 정경남의 집에서 모임을 갖고 '도구포 어업자 친목회'를 결성했다. 1925년 7월 타리에는 166척의 선박이 조업 중이었고 선원들은 684명이었으며 타리 파시는 전국적으로 유명해 산업시찰 대상지가 되기도 했다.

현존 유일 타리파시 사진자료 1936년 8월18일 오후5시10분에 촬영된 임자도 파시의 모습이다. 장소는 섬타리를 마주보고 있는 하우리 뒷 모래밭 '불등'. 촬영 당시 타리섬에는 '일본 수산'과 '하야시가네'회사 소속 생선창고를 가진 선박이 있었다. 이 배에다 생선을 채워 운송선에 실은 뒤 일본으로 보내곤 했다. 위 사진에 요리(御料理)라는 간판이 보인다. 요리집 이름이 일본어로 써 있음을 볼 때 일본인의 왕래가 잦았음을 알 수 있다. 여인 2명이 지나가는 행인을 보고 있다. 사진 촬영자는 돌절구를 찧던 여인이 사진기를 보자 도망갔다고 했다. 아래 사진은 타리파시 전경이 보이고 모래사장에 지은 20~30채 가건물에 생선을 사려고 줄을 선 손님들의 모습이 보인다. 앞쪽에는 한 여인이 화로에 불을 담고 있다. 손님맞이 옷을 다리려는 것인 듯하다. 당시 가건물 임대료는 5엔이었다. 파시를 따라 이동하는 사람들은 몽골텐트 처럼 집을 헐어 접은 뒤 배에 싣고 다녔다. 

타리파시 기생들의 슬픈 이야기

임자도 출신 김영회가 쓴 '섬으로 가는 역사'에는 타리 파시의 기생들에 대한 아픈 기록이 있다.  "요릿집 기생들은 미모에 문장실력도 좋고 창과 춤에 능하며 손님접대까지 잘해 '타리기생'이라는 별칭을 얻었다. 조선기생 뿐 아니라 일본 게이샤들도 이 곳에 찾아들었다. 타리섬에는 조선기생, 일본 게이샤 등 100여 명이 있었다.

타리섬 마을터  예전에 살았던 집터를 가리키고 있다.
타리섬 마을터 예전에 살았던 집터를 가리키고 있다. ⓒ 이재언

조선기생의 양산도 가락이 장구소리에 실려왔고 게이샤들의 소리도 끊이질 않았다. 시와 노래와 술과 춤이 외진 서해의 바닷가에서 어우러지던 곳, 그곳이 타리파시였다. 한일합방 직후 일본인 한 무리가 타리파시에 들러 조선기생들을 불렀다. 그들은 놀다 말고 장고를 치며 창을 하던 조선기생들에게 훈도시 차림으로 잠자리를 요구했다. 이에 대해 기생들은 "창이나 글이라면 모르나 조선여인인 우리가 당신들에게 몸을 허할 수는 없소"라며 잠자리를 거절했다. 술에 취한 일본인 한 명이 기생의 거절에 격분해 칼을 뽑아 그녀를 베고 말았다. 기생들은 주재소로 몰려가 항의 했지만 살인자는 처벌 받지 않았다. 파시 촌에 있던 타리 기생 30여 명은 동료의 억울한 원한을 풀 길이 없자 다함께 바다로 뛰어들어 자결했다. 그녀들의 죽음은 파시 뱃사람들에 의해 수습돼 하우리 쪽 모래밭에 함께 매장됐다. 모래무덤은 서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의해 조금씩 날아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들의 이름도 남겨지지 않았다"

목포와 군산 사이를 하루 4회 오가는 여객선 3척이 타리와 낙월도 두 섬을 경유했다. 일본의 저장선도 100여 척이 다녔고, 일본 큐슈 지방에서 온 어선들도 많았다. 일본에서 온 상선들은 조선과 일본의 어선들이 잡은 민어를 얼음에 재워서 일본으로 실어 날랐다. 수십곳의 요릿집, 색주가 선술집 등이 들어서고 잡화점과 선구상, 이발소, 이동 목욕탕 등이 생겼다. 매일같이 어부 상인, 색시들 수천명이 들끓어 임자도는 도시의 유흥가를 방불케 했다. 칠월 칠석이면 풍어를 기원하는 고사도 지내고 활쏘기대회와 노래자랑도 열렸다. 여름 철 두달간만 나타났다 사라지는 신기루. 지금은 그 흔적 조차 없다.

섬 둘러보기

필자와 대태이도 출신 신언길(60)씨와 함께 배를 타고 섬을 둘러봤다. 신씨는 어린시절 하우리 나박바구에서 타리섬을 헤엄쳐 다녔다고 회고했다. 대태이도는 사람 발길이 닿지 않아 여름이면 야생화와 해당화가 만발해 원시적 공간을 연출한다.

이미 폐허가 됐지만 해변의 백사장, 학교는 아직 그대로 남아있다. 1971년 준공 표지석도 보인다. 숲 곳곳에는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가 남아 있고 그릇, 어망 등이 나뒹굴고 있었다.
대태이도에서 태어나 20살에 임자도 하우리로 시집와서 50년을 살고 있다는 나봉임(71) 할머니는 당시를 삶을 들려줬다. "일제시대 타리파시는 민어파시로 유명 했었다"며 "당시 15가구가 살았다. 가장 힘든 일은 타리섬에 물이 귀해 임자도까지 배를 타고 가서 물동이에 물을 길어오는 것이었다"고 회고했다. 지금은 황량한 모래밭이지만 80년 전까지만 해도 파시로 흥청거리던 곳. 아직도 파시 때의 흥청거림이 들려오는 듯하다. 그러나 어부들 악쓰는 소리, 젓가락 장단, 색시의 구슬픈 가락소리…. 지금은 모든 것이 다 사라지고 없다. 모래언덕도 파도에 휩쓸려가고 파시의 꿈도 아득하다.

지리

대태이도는 신안군 임자면 하우리에 딸린 섬이다. 면적은 0.4㎢. 1973년 내무부 도서지에 보면 8가구 49명이 살았다고 기록돼 있으나 현재는 사람이 살지 않는다.

덧붙이는 글 | 이재언 목포대도서문화연구원 연구원



#타리파시 #대태이도 #하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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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연구원으로 2019년까지 10년간 활동, 2021년 10월 광운대학교 해양섬정보연구소 소장, 무인항공기 드론으로 섬을 촬영중이며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재정 후원으로 전국의 유인 도서 총 447개를 세 번 순회 ‘한국의 섬’ 시리즈 13권을 집필했음, 네이버 지식백과에 이 내용이 들어있음, 지금은 '북한의 섬' 책 2권을 집필중

이 기자의 최신기사책 '북한의 섬'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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