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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애가 주문한 절임배추가 오후 5시쯤에 도착했습니다. 20kg짜리 두 상자입니다. 깔끔하고 싱그럽습니다. 한 줄기 뜯어서 먹어봅니다. 짜지도 싱겁지도 않고 간이 딱 알맞습니다. 지금 바로 김치를 해야 합니다. 내일 아침에 하면 밤새 싱그러운 맛이 달아나버려 겨우내 맛없는 김치를 먹게 됩니다.

절임배추 겨우내 맛있는 김치를 먹게 됩니다.
▲ 절임배추 겨우내 맛있는 김치를 먹게 됩니다.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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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둘렀습니다. 그런 나를 보고 남편이 한마디 합니다.

"내일 하지 그래, 금방 어두워지잖아." 
"전깃불 켜 놓고 하면 되지 뭐."

내 생전 처음으로 절임배추로 김장을 하게 된 것은 딸애 덕분입니다. 직장생활로 바쁜 중에도 딸애가 신경을 써서 지난 9월에 싱겁게 절여달라는 글과 함께 절임배추를 신청해두었습니다. 그 절임배추가 도착일자를 어기지 않고 방금 택배로 온 것입니다.

절임배추는 편합니다. 배추를 사다가 우거지를 떼고 반으로 잘라 소금물에 밤새 뒤척여 가며 절여서는 다음 날 흐르는 물에 여러 번 씻어 소쿠리에 건져 물기를 빼는 제일 힘든 과정이 없습니다. 그러나 편한 만큼 절임배추는 생 배추보다 두 배 이상이나 비쌉니다. 우리 동네 마트에서 배추 한 망에 삼천 원, 그러니까 한 포기에 천 원입니다.

지금은 배추를 세 포기씩 망에 담아서 짐짝처럼 쌓아놓고 팔지만 몇 년 전만 해도 시장에 가면 밭에서 갓 뽑아 쌓아놓은 듯한 싱싱한 배추더미들이 줄을 지어 있었습니다. 그때는 한포기도 팔았습니다. 두터운 군밤모자를 쓴 장정이 흙물이 든 면장갑 낀 손으로 내 키보다 높은 배추더미에서 가볍게 한 포기를 집어 비닐봉지에 담아주면서 "배춧국 끓이실려구요?" 하고 씩 웃던 그 정감 어린 모습이 생각납니다. 

장미무늬 배추 2005년 '첫 사랑은 아직도 거기 서있었습니다'에 올렸던 사진입니다.
▲ 장미무늬 배추 2005년 '첫 사랑은 아직도 거기 서있었습니다'에 올렸던 사진입니다.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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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과 달리 요즘 배추들은 통이 크고 길더라. 그러니까 배추 고를 땐 갓이 얇고 기장이 길지도 짧지도 않고 쪼글거리는 푸른 이파리들이 폭폭 여며진, 끝 모양이 장미무늬인 배추를 골라야 해." 

나는 친정어머니의 말대로 언제나 장미무늬 배추들을 고르고는 했습니다. 망에 담긴 배추를 살 때도 갓이 얇고 기장이 길지 않은 장미무늬를 찾았습니다. 장미무늬 배추로 담은 김치는 유난히 아삭거리고 맛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 절임배추들은 장미무늬 배추인지 아닌지를 알 수가 없지만 갓이 얇고 기장이 적당합니다. 상자에서 절임배추들을 꺼내어 소쿠리에 차곡차곡 담는데 남편이 사방에 전등불을 밝혔습니다. 기분이 이상합니다. 전등불 밑에서 김장을 해 보기는 처음인 것입니다.

남편이 시키지도 않았는데 마늘 깔 준비를 합니다. 전등불빛에 기분이 밀린 모양입니다. 마늘은 어제 미리 뿌리 부분을 조금씩 자르고 물에 담가 놓아서 껍질이 불 대로 불었습니다. 그냥 슬쩍 누르기만 해도 하얀 마늘이 쏙 삐져나옵니다.

남편이 소파에 앉아 마늘을 까면서 물었습니다.

"배추 간은 괜찮아? "
"아주 딱 알맞아, 짜지도 싱겁지도 않다구."

남편은 요즘 심하다 싶을 정도로 싱겁게 먹고 있습니다. 싱겁게 먹는 게 보약보다 낫다는 친구의 조언도 있었고 가끔씩 텔레비전에서 그런 점을 일깨우기도 합니다.

"거 고맙네, 고객 입에 딱 맞게 배추를 절여서 보내 주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사업이니까."
"사업이라 해도 그렇지."

김장김치 담그기 남편이 마늘을 깐다.
▲ 김장김치 담그기 남편이 마늘을 깐다.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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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남편이 텔레비전을 켰습니다. 레슬링 중계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남편이 좋아하는 레슬링 경기입니다. 기가 막히게도 방영시간에 딱 맞춰서 텔레비전을 켠 것입니다. 재방송인데도 봅니다. 재방송은 왜 보나. 마늘이나 얼른 까주지. 나는 공연히 화가 납니다.

김장김치 담그기 준비중입니다.
▲ 김장김치 담그기 준비중입니다.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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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에서 무채 썰 준비를 하는데 남편이 이쪽을 보고 한마디를 합니다. 그새 중간광고 시간인 모양입니다.  

"나 자랄 땐 말야 배추에 굵은 꼬랑지가 달렸었는데. 거 참 맛있었는데."

지금은 배추가 통이 크고 꼬랑지가 없습니다. 그 시절에는 배추들이 재래종이라 통이 작았고 실한 꼬랑지가 붙어 었습니다. 시골에서 자란 남편은 어렸을 적에 꼬랑지를 깎아 먹던 일이 생각나는 모양입니다. 나는 단발머리 시절에 먹던 배춧국이 생각납니다.

김장을 도와주러 온 외할머니가 가마솥에 굵은 마른새우 두어 줌을 넣고 배추된장국을 끓입니다. 외할머니는 상자쪼가리를 깔고 아궁이 앞에 앉아 활활거리는 장작불을 부지깽이로 건사하면서 배추꼬랑지를 하얗게 깎습니다. 온 집안에 배추된장국 냄새가 가득해지면 그제야 외할머니는 구부정한 허리를 펴고 일어나서 드르륵 하고 가마솥 뚜껑을 절반쯤 열고는 양은 양푼에 소복한 배추꼬랑지들을 쏟아 넣습니다. 그리고 중얼거립니다.

"일찍 넣으면 배추꼬랑지가 물러지고 단맛도 없어지지."

그때 이후로 나는 외할머니가 끓인 배춧국 같은 구수한 배춧국을 먹어본 적이 없습니다.

레슬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광고시간도 아닌데 남편이 마늘을 깨끗하게 씻어서 작은 소쿠리에 건져놓고 믹서기를 꺼내 놓습니다. 나는 무채를 썰다가 말고 얼른 다가가서 적당량에 새우젓과 마늘 생강을 믹서기에 넣고 생수를 부어주고 돌아섭니다. 착한 도우미인 남편이 재빨리 작동 버튼을 눌렀습니다. 얼른 끝내고 나서 레슬링을 편히 봐야겠다는 눈빛입니다.

요즘은 무채 소를 많이 넣지 않습니다. 배추김치에 무채 가 많으면 털어내고들 먹습니다. 그래서 무채를 조금만 만들어 내 방식의 소를 만듭니다. 무채에 믹서기의 양념을 붓고 파와 고춧가루를 넣고 생수를 부어 아주 걸쭉하게 소를 중간 양푼 가득히 만듭니다. 고춧가루 물이 든 소의 빛이 황홀할 정도로 곱습니다. 예상대로 간이 짜지도 싱겁지도 않습니다. 남편의 입맛을 딱 맞추었습니다. 비로소 나는 식탁 앞에 서서 배추포기 사이사이에 소를 바르는 듯이 넣기를 시작합니다. 

나는 김장을 늘 혼자서 합니다. 친구들이 오면 계속 수다를 떨면서 소를 넣습니다. 나는 그게 싫습니다. 비위생적인 느낌도 듭니다. 혼자 하는 게 마음도 편하고 좋습니다.

레슬링 경기가 끝나자 남편이 슬슬 오더니, 배추 사이에 소가 흘러나오지 않게 줄거리 하나를 당겨 이파리를 펴서 배추를 앙팡지게 여며놓는 것을 보고 빙긋 웃습니다.

"그렇지, 양념이 새지 않아야 해. 그래서 우리 집 김치가 맛있다니까. 근데 배고프지 않아?"

나는 대꾸하지 않습니다. 부지런히 손을 움직일 뿐입니다. 사실 배가 고픈 줄을 모르겠습니다. 소를 넣은 절임배추들이 김치냉장고를 점점 채워가는 재미에 손을 쉬지를 못하겠는 것입니다. 이런 재미에 이런 기쁨에 그 옛날 어머니는 큰 대독 가득히 김장김치를 누구의 손도 빌리지 않고 혼자서 거뜬히 해 넣으셨나 봅니다. 그리고 다음 날 몸살을 앓아도 얼굴 한 번 찌푸리지 않고 웃으셨던 것 같습니다.

김장김치 담그기 김치냉장고에 넣고 남은 김치
▲ 김장김치 담그기 김치냉장고에 넣고 남은 김치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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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8시가 거의 돼서야 김장이 끝났습니다. 이상합니다. 다리도 아프고 어딘가 결리는 데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원래 허리 병이 없기도 하고 잘 드러눕는 성질도 아닌데다 힘든 과정을 줄여 준 절임배추로 김장을 해서 그런 듯 합니다. 절임배추가 효자입니다. 아니 딸애가 효녀입니다.  

남편이 저녁이 늦었으니까 간단히 찬밥이나 볶아 먹자고 합니다. '그러지 뭐' 하고 대답을 하면서 김치냉장고의 뚜껑을 마치 보물 상자인양 가만히 닫고 돌아서는데 가슴 가득히 뿌듯함이 차올랐습니다. 올 김장김치도 아주 맛있을 것입니다.


#절임배추 #김장#마늘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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