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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6월 24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주재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6월 24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주재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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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막기 어렵게 됐다. 지금의 정치 상황이 그렇다. 결국 직접 선거로 뽑힌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퇴진 요구가 터져 나왔다. 그것도 암울한 70년대부터 '광야의 외침'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데 앞장서온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아래 사제단)의 전주교구 신부들의 입에서.

청와대와 새누리당은 박창신 원로신부가 강론 중에 한 연평도 포격 사건에 대한 언급을 '종북 발언'으로 문제 삼았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이 직접 나서 "이런 일들은 용납하거나 묵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홍원 국무총리는 더 구체적으로 "박 신부의 발언은 북한의 도발을 옹호하는 것으로 결코 좌시할 수 없으며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했다. 그러자 전국의 극우보수단체들이 들고 일어나 박 신부를 검찰에 고발했고, 검찰은 즉각 수사에 착수했다.

지지층을 편향되게 선동하는 박근혜 대통령

박 신부의 강론 중 일부 표현에는 국민의 동의를 받기 어려운 대목이 있다. 그러나 사제단 시국미사의 본질은 북한의 도발을 옹호한 것이 아니다. 그 본질은 '국가기관의 대선개입이 만천하에 드러났으니 부정선거로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은 퇴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대선에서 자행된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이 투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쳤는지 가늠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명백한 것은, 있어서는 안 될 국가기관의 불법 개입과 선거 부정이 광범위하게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은 사제단의 근본적 질문을 회피한 채 "죽음으로 나라를 지킨 장병들의 사기를 꺾고 그 희생을 헛되게 하는 일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로 지지층의 '편향적 세불리기'만을 꾀하고 있다. 잘못된 권력에 대한 비판과 퇴진 주장에 재갈을 물리려는 '편향적 동원화'는 표현의 자유를 압살했던 유신시대를 떠올리게 한다.

박근혜 대통령을 지지하는 국민들은 '유신 회귀'니 '민주주의의 위기'니 하는 우려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대통령의 한 마디에 검찰이 신속한 수사로 화답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는 아버지 박정희 시대처럼 총칼로 위협하지 않을 뿐, 다양한 표현의 자유와 공론의 장을 막는 민주주의의 위기 징후다.

5·18 민주화운동과 6·10 민주항쟁을 통해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아시아의 모범국으로 칭송받는 한국의 민주주의가 왜 이런 지경까지 왔을까? 사태의 발단과 인과 관계에 대한 복기가 필요하다.

지난 대선은 두 가지 '망령'이 지배한 선거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 사제들은 지난 22일 밤 7시 전북 군산시 수송동 성당에서 '불법선거 규탄과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미사'를 열었다. 사진은 미사를 마친 후 사제들과 신도들이 거리행진을 벌이는 장면.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 전주교구 사제들은 지난 22일 밤 7시 전북 군산시 수송동 성당에서 '불법선거 규탄과 대통령 사퇴를 촉구하는 미사'를 열었다. 사진은 미사를 마친 후 사제들과 신도들이 거리행진을 벌이는 장면.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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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은 두 가지 '망령'이 지배한 선거였다. 하나는 국가정보원과 국군 사이버사령부 등 국가기관이 음지에 숨어서 주도한 대선 여론조작이다. 대북 심리전을 위해 창설한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들과 군 사이버사 요원들은 북한 주민이 아닌 자국민을 상대로 선거 민심을 조작하는 이런 게시글을 사이버 공간에 유포하고 '봇'(bot) 프로그램으로 퍼날랐다.

내가 김대중 노무현 이름만 들어도 이가 갈리는데 문재인이라니...(ekff****)
NLL에 대한 사수 의욕이 없는 사람이 대통이 된다면 유사시 북한에 나라를 내주는 꼴이 될 것은 뻔한 이치이다.(zlru****)
몇달 전만 해도 죄인(문재인-기자 주)후보랑 손잡고 한밥 먹은 종북좌파 그녀(이정희-기자 주)...그러다 수 틀려 갈라서더니 지금 또 합방하려고 꼼수 부리고 있는거 아시죠? 결국 (문재인과 이정희는) 한통속이라는 거죠? 종북좌파!!(hung****)

검찰에 따르면 이처럼 국정원이 지난해 대선에 개입할 목적으로 트위터에 올리거나 퍼나른 글은 121만 건에 이른다. 국정원이 선거판에 '사이버 삐라' 121만 장을 뿌린 셈이다. 게다가 음지에서 생산한 사이버 삐라는 대부분 인신공격을 하는 등 정치혐오를 부추기는 내용이 많았다.

결과적으로 이런 활동은 야권 후보에 대해 확신을 갖지 못한 중간층에게 신념과 일치하는 정보는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은 정보는 무시하는 편향성을 확대하고, 지지층에게는 '편향적 세불리기'를 꾀함으로써 민주주의의 요체인 공론의 장을 파괴했다.

'죽은 노무현'을 끌어들인 NLL 망령

지난 대선을 지배한 또 다른 망령은 새누리당이 전면에 나서 주도한 이른바 'NLL(북방한계선) 포기 발언' 논란이다. 지난 대선에서 새누리당의 정문헌-서상기 의원과 김무성 선대위 총괄선대본부장은 '죽은 노무현'을 끌어내 김정일과의 정상회담에서 'NLL 포기' 발언을 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 또한 사실 무근의 정치공작이었음이 지난 6월 24일 남재준 국정원장의 대화록 유출 및 공개로 드러난 바 있다.

당시 남재준 원장이 1급기밀인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을 공개한 명분은 '국정원의 명예'였다. 남 원장은 국회에서 "야당이 자꾸 공격하니까 국정원의 명예를 위해서 (대화록을 공개)했다"고 답변했지만, 박 대통령이 대화록을 공개하는 과정에 어떻게 관여했는지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않겠다"고 피해갔다.

박 대통령은 남 원장이 대화록을 무단 공개한 다음날에도 대화록 유출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고 "NLL은 수많은 젊은이들이 피와 죽음으로 지킨 곳"이라고 딱 한 문장만을 언급했을 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이건 아니다. 이 땅의 수많은 젊은이들이 엄청난 피를 흘려가며 지켰던 휴전선을 없애는 것이 통일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군사적으로는 휴전선을 맞댄 '주적'이지만, 정치-경제적으로는 공동체 통합을 지향하는 '겨레'라는 '상황의 이중성'을 관리해 타파해 나가는 것이 국가지도자의 몫이다.

'유체이탈' 화법과 '편향적 동원화'에 성난 민심의 '남해박사!'

국정원 규탄 집회 "남재준 해임하라" 지난 7월 27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국정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규탄 및 진상규명 촉구 4차 범국민대회'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규탄하며 남재준 국정원장 해임과 철저한 국정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 국정원 규탄 집회 "남재준 해임하라" 지난 7월 27일 오후 서울 중구 서울시청앞 광장에서 열린 '국정원 정치공작 대선개입 규탄 및 진상규명 촉구 4차 범국민대회'에서 학생과 시민들이 국정원의 대선개입을 규탄하며 남재준 국정원장 해임과 철저한 국정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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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은 왜 그런 일(댓글 공작)이 생겼는지 전혀 알지 못하며 대선 때 국정원이 어떤 도움을 주지도, 국정원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않았다는 '유체이탈' 화법과 자신을 지지하지 않은 절반의 국민을 대선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불순 세력으로 몰아붙이는 '편향적 동원화'에 실망한 '촛불 시민'들과 거리로 나온 민주당이 이때부터 박 대통령에게 요구한 것은 딱 두 가지였다.

남해박사! 남재준 해임, 박근혜 사과다. 절반의 국민이 요구한 이 두 가지가 무리한 주장일까? 천만의 말씀이다. 댓글에서 시작된 부정선거 의혹은 무차별적으로 유포한 트위터 수백만 건으로 확대되고 있다. 국정원 일부 직원의 '일탈'은 다른 어떤 조직보다도 정치적 중립이 요구되는 군까지 가세한 사실상 전방위적 선거 개입으로 결말이 치닫고 있다.

어찌 보면 절반의 국민은 충분히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절반의 국민은 지난 11월 18일 첫 국회 시정연설에 마지막 기대를 걸었지만, 시정연설의 핵심은 "국민적 의혹이 제기된 사건들에 대해 책임을 물을 일이 있다면 반드시 응분의 조치를 취할 것이니, 대립과 갈등을 끝내고 정부의 의지와 사법부의 판단을 믿고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틀린 말은 아니다. 문제는 사법부의 판단이 나오기까지의 과정에서 자행되고 있는 국가기관의 불법적 혹은 퇴행적인 행동들이다. 국정원 대선 개입 사건 수사를 총지휘한 채동욱 검찰총장과 윤석열 특별수사팀장을 찍어내고, 수사팀의 수사방해를 하는 것이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법원의 판단에 맡기자고 하는 것은 자신의 무관함을 관철하려는 '뭉개기 전술'로 비칠 수밖에 없다.

선거로 뽑힌 대통령에게 퇴진을 요구하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이는 대통령이 사법부(법원)의 판단이 나오기도 전에 사법부(헌법재판소)에 같은 헌법기관이자 선거로 뽑힌 국회의원과 그 의원들이 속한 정당의 해산심판을 청구하는 시대착오적인 행동에 비하면 지극히 합리적인 결정이다. '남해박사'라는 호미로 막을 일을 '퇴진요구'라는 가래로 막게 될 일을 자초한 것은 박 대통령이다.

대통령에게도 야당에게도 유일한 '퇴로'는 특검뿐

결국 이제는 대통령에게도 야당에게도 촛불민심에게도 '퇴로'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젠 지난 대선에 불법 개입하거나 NLL 공작을 한 것으로 의심받는 국정원과 새누리당 등 국가 및 정치권력으로부터 독립이 보장된 특별검사가 아니고서는 부정선거 의혹을 규명하거나 절반의 국민을 설득할 방법이 없다.

국가기관의 대선 개입 의혹과 NLL 의혹 등을 통틀어 수사하는 '원샷 특검'이건, 어느 하나로 수사범위를 특정한 '원 포인트 특검'이건, 특검은 이제 야당뿐만 아니라 대통령에게도 유일한 '퇴로'다. 남은 임기 내내 지난 대선의 두 가지 망령에 시달리는 '식물 대통령'이 되지 않으려면 말이다.


#국정원#특검#NLL#남해박사#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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