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우리들은 잉여다. 그리고 우리들은 가능성이다.
 우리들은 잉여다. 그리고 우리들은 가능성이다.
ⓒ 웅진지식하우스

관련사진보기

"얘야, 너에겐 무한한 가능성이 있단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처럼 요즘 세상에서 행복한 삶은 대체로 비슷하지만 불행한 삶은 제각각 다르거든. 영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대학 못 가면 잉여인간, 인간 떨거지 되는 거라고 말했다고 했나? 설령 좋은 대학에 들어간대도 크게 달라질 건 없단 걸 알게 될 거야. 부모님이 네게 바라는 그림 같은 인생이 극소수에게나 가능하다는 걸 깨닫기나 한다면 다행이겠다. 너는 삶과 분리할 수 없는 열정노동 속에 갈리고 갈리다 자의식을 거세당한 좀비가 되거나, 사이버스페이스로 달아나 비겁한 완장놀이나 하고 있는 유령이 되는 게 고작일 거야. 잠깐 토닥거려준 후에 다시 경쟁으로 등 떠미는 힐링과 너희만 힘든 게 아니니 징징거리지 말라는 다그침 사이에서 어디다 하소연할 곳도 찾기 힘들 거야. 애초에 너의 존재의미를 건네줄 만한 거대 서사나 역사적 소명은 이미 죽었고, 너는 역사-이후의 시공간에 던져진 '근거 없는 존재'로서 세상과 너 사이의 관계값을 알아서 구해야 해. 네 인생이 언제 어쩌다가 이 지경으로 쓸모없게 되어버렸는지도."

발음도 어려운 '잉여'라는 한자어가 이렇게 일상적으로 쓰인 적이 있었나 싶다. 빈도뿐만 아니라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도 달라졌다. 학교에서 배운 이 단어의 용법은 그저 '남는 것'이라는 가치중립적인 뜻이었다. 문학시간에는 손창섭의 <잉여인간>이라는 작품 정도, 역사 시간에는 역사의 발전단계를 설명할 때 빠지지 않는 잉여생산물, 즉 이윤이라는 긍정적인 뜻으로 쓰였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에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존재를 지칭할 때 잉여란 말을 쓴다. 그게 자기 자신이든 다른 누군가이든 말이다.

'잉여'란 여분, 불필요함, 무용함을 의미한다. 잉여로 규정된다는 것은 버려져도 무방하기 때문에 버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잉여는 불합격품, 불량품, 폐기물, 찌꺼기, 그리고 쓰레기와 의미론상의 공간을 공유하고 있다. 쓰레기의 목적지는 쓰레기장 쓰레기 더미이다. - 지그문트 바우만, <쓰레기가 되는 삶들> 중

<88만원 세대>라는 책을 기점으로 청년담론이 주목받기 시작한 지 5~6년이 지났고, 인터넷의 변방 디씨인사이드에서 주침야활(밤낮이 바뀐 생활)하는 '햏자'들이 나타난 지는 10년이 넘은 옛일이다.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들이 벌어졌기에, 그나마 경제 주체로서의 위상은 지키고 있던 청년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쓰레기 더미 취급까지 받게 되었을까?

스스로를 폐인이라 칭하면서도 유쾌하기 그지없던 햏자들의 놀이에, 어느 사이엔가 남의 신상을 털고 민주열사를 자랑스레 모욕할 정도로 음침한 빛깔이 섞여든 배경은 무엇이었을까? 디스토피아적 예언으로 평가받던 우석훈과 박권일의 주장이 오히려 더욱 파탄적인 방식으로 실현된 세상, 현재진행형으로 전개되고 있는 사회 현상의 이름과 같은 <잉여사회>란 책은 그에 대한 심도 있는 통찰을 내놓는다.

근대의 전체성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건 좋은데...

잉여가 등장한 역사적 배경을 다룬 1부 2장의 첫 챕터 제목은 '노동이 모욕이 된 꿈의 신세계'이다. 1970년대 초 전 세계적으로 일어난 신자유주의적 전환, 산업화와 민주화라는 양대 목표 달성 후 호기롭게 열어젖힌 개방의 문, 97년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국가와 자본이 합심해 가장 먼저 버리기로 한 노동 등의 익숙한 어구들이 큰 감흥 없이 시야에 들어온다. 최근 몇 년 간 출간된 사회학 서적이라면 한번 씩은 짚고 넘어가는 내용들이기 때문이다.

눈여겨볼 대목은 하얗게 타버린 노동 대신 자리 잡은 90년대의 신세대가 지향했던 '문화'를 어떤 거대한 상실을 메우기 위한 강박으로 보고 있다는 서술이다. 신세대의 탐색이 결국은 소비와 소유라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방식으로 귀결되었다는 한계를 빠트리지 않으며, 저자는 소비자-시민-대중이 카드를 긁으면서라도 잊으려 하던 상실이란 게 무엇이었는지 조금 더 파고 들어간다.

한 마디로 요약해 그것은 역사의 종언이다. 세계시장이 통합되며 만들어진 새로운 자본주의 체제, 지적이고 미학적인 영역에서 근대를 극복하려 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의 전면에서 희극과 비극의 행보를 반복하며 갈지자로 나아가는 대중. 각자 다른 목적을 가지고 근대를 뛰어넘으려는 동시다발적인 시도와 변화는 우리를 자의와 타의가 뒤섞여 탄생한 역사-이후의 시공간으로 안내한다. 이 역사-이후의 시공간, 거대 서사나 역사적 소명을 잃은 '근거 없는 존재'들의 막연함이 오늘날의 잉여를 설명하기 전에 필수적으로 짚고 넘어가야 하는 '역사적 배경'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 시점에서 저자의 탐구는 지금-여기라는 한정된 시공간을 넘어선다. 잉여들은 2000년대 중반 이후 한국 사회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존재가 아니라, 어떤 거대하고 연속적인 세계의 흐름 속에서 필연적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는 개연성을 얻는다.

세계는 어떻게 잉여를 만들고, 또 어떻게 쫓아내는가?

잉여는 무엇인가에 대한 본격적인 논의는 3장부터 전개된다.

오늘날의 잉여가 전체-체계가 만들어낸 기준에 의해 세계로부터 밀려나는 것들이라고 보았을 때, 자본주의 사회에서 잉여의 제1조건은 '자본주의 경제 질서에 유용하지 않을 것'이다. 요컨대 잉여는 팔수도 없고, 노동을 시킬 수도 없으며, 소비자로도 부적절한 존재들을 지칭한다. 잉여는 과잉을 통해서도 발생한다. 자본이 1세계의 노동자에게 요구하는 노동 능력의 수준은 자본주의가 일자리 수를 줄여가는 추세 속에서 점점 높아지고 지원자들 간의 경쟁은 격화된다. 이는 분명히 필요 이상의 자격들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잉여가 무엇인지 정의하고 잉여를 생산하는 두 가지 코드를 소개하는 대목이다. 결핍과 과잉은 상충하는 개념처럼 보이지만, 넘치든 모자라든 체제가 요구하는 기준에 부합하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결핍과 과잉을 통해 생산된 잉여들의 존재론적 위상에 가장 걸맞은 표상은 '유령과 좀비'이다. 땅도 육신도 없이 구천을 떠도는 희미한 목소리와 땅 위를 걷는 영혼 없는 육체. 우리는 유령이거나 좀비이고 혹은 둘 다이다. 어느덧 최우선과제가 되어버린 '먹고 사는 문제'에 짓눌려 우리의 육신이 좀비가 되어가는 동안 망각되고 내리눌린 우리의 일부는 유령이 되어 잊을만하면 제 존재를 서늘하게 일깨운다.

좀비와 유령은 각자가 지닌 힘은 미미하나 세상에 위협을 끼칠 위험성을 늘 가지고 있어 체제로 하여금 경계를 놓지 못하게 하는 존재들을 의미한다. 마찬가지로 잉여는 새로운 가능성이기도 하나, 그들은 자본주의를 잠시 놀라게 할 뿐 오히려 더욱 견고한 체제로 거듭날 교정의 계기를 제공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체제는 그간 존재했던 체제 중에서도 가장 훌륭하게 잉여를 처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중 하나가 의심할 여지없이 공공선이라고 받아들여지던 가치, '관용'이다.

왜 오늘날에는 그토록 많은 문제들이 불평등이나 착취나 불의의 문제가 아니라 불관용의 문제로 인식되는 것일까? 즉각 떠오르는 답은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속에 내재된 이데올로기, 즉 '정치가 문화화'되는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정치적인 차이(정치적 불평등이나 경제적 착취로 인해 발생하는 차이)는 '문화적'차이, 즉 '생활방식'의 차이로 변한다. 그리고 이런 차이는 이미 정해진 것, 극복될 수 없는 것을 인식된다. 그저 '관용'의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 슬라보예 지젝, <폭력이란 무엇인가> 中

체제가 시혜적으로 베푸는 관용을 통해 간신히 존재를 인정받은 잉여들이 체제에 위험해 보이는 짓을 조금이라도 시도할 때, 온화한 관용의 손길은 즉각 처단의 칼날로 모습을 바꾼다. 정해진 범위 안에서 마음대로 행동하도록 하되 무언가를 어긴다면 그 범위로부터 조용히 축출해버리는 것이다. 근대 사회에서 어떻게 특정 인구에 대한 추방과 사형, 구금이 가능한가? 안과 바깥으로부터의 보이지 않는 위협을 끊임없이 주입시키며 세계를 항구적인 비상사태로 만들고 있는 치안의 논리 때문이다. 그리고 위기를 재생산하는 체제를 비난하는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다. 치안의 칼날은 우리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누리고 있는 지위를 아래로부터의 상승욕망에 의해 위협받을 수 있다는, 그리고 나도 언제든지 세상으로부터 '불필요함'이라는 공증을 받은 잉여가 될 수 있다는 양쪽으로부터의 불안에 떠는 신자유주의 하의 모든 존재들에 의해서 말이다.

사이버스페이스에 출몰하는 유령들

아햏햏, 병맛, 이말년만화, 기승전병, 귀귀의 병맛 필화사건, 미트스핀, 라커 룸의 제왕, 성 정체성을 깨달은 아이, 후로게이, 키보드워리어, 진중권의 조선일보 독자마당 밤의 주필 취임 사건, 서울대생 ㅂ대첩(익명처리), XX녀 만들기, 2002년 한일 월드컵과 촛불시위, 황우석 사태, 타블로 학력위조 논란, 일베…….

여기까지 나열한 키워드를 보고 웃을 수 있는가? 이미 알고 있든 처음 보는 것들이든 마냥 웃기에는 좀 애매하다는 게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느낌일 것이다. 설령 매일같이 온라인 커뮤니티에 살다시피 하며 위 키워드가 유명해진 구체적인 내막을 훤히 꿰고 있는 잉여라 하더라도 이것들이 도대체 무슨 가치와 맥락을 지닐 수 있다는 건지 의아함이 먼저 앞서리라 본다. 그러나 저자가 2부에서 하려는 작업은 대다수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억누르고 묻으려하는 세상의 일부를 들춰내고 해석하며 의미를 찾는 일이다.

현실의 보잘 것 없는 우리들이 사교육 시장에서, 비정규직 노동의 장에서, 골방과 도서관 열람실에서 조금이라도 체제 안으로 편입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동안, 불필요한 장애물로 전락한 우리의 내밀한 욕망과 회한은 사이버스페이스에 출몰하는 유령이 된다. 저자의 말에 따르면 사이버스페이스가 금융 및 산업자본의 이해를 넘어서는 현대사회의 몇 안 남은 공유지이기 때문이다. 누가 잉여냐는 질문에 "제가 잉여인데요"라고 받아치는 저자의 대답에 진정성을 실어주는 부분이 바로 2부이다.

잉여문화를 만들고 즐기는 본인들마저도 깊이 생각할 가치가 없다고 자조해왔던 '짓'들을 하나하나 요약하고, 불연속적이고 뜬금없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보이는 각각의 사건들을 통시적으로 연결시켜 어떤 계보도 같은 것을 만들어내고, 의미부여를 한사코 거부하는 이들의 심리 상태까지 들춰내는 노력. 저자 본인이 그러한 문화를 한 가운데에서 몸소 체험하고 생산해내는 대(大)잉여, 본격 잉여가 아니고서야 수박 겉핥기 식 서술 몇 마디나 영양가 없는 사례 나열에 그치기 십상인 사례들이다.

'병맛 웹툰'으로 대표되는 잉여들의 서사에는 픽션보다 더한 부조리를 만들어내고야 마는 현실이 빠지지 않는다. 고자와 게이를 주제로 한 기괴한 농담에는 관계 불가능에 대한 자조와 공포가 내포되어있다. 십 원 한 장 안 나오는 가상의 커뮤니티에서 뭉치고 싸우는 키보드워리어들의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은 세계로부터 자리를 부여받기 위한 인정투쟁이다. 익명적 집단으로서의 힘과 그 힘에 대한 중독과 도취가 파국으로 치닫은 양상이 자경단과 십자군, 그리고 일베다.

인터넷이 낳은 잉여 문화의 단편들이다. 유쾌하거나 짓궂은 웃음은 부조리한 현실을 반영하는 씁쓸한 냉소가 되고, 가상의 연대를 통한 힘은 정의를 구현하기도 마녀사냥을 조장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취약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한바탕 웃음으로 승화시키며 다음 발걸음을 힘차게 내딛을 수 있다. 거울로부터 비겁하게 도망쳐 끊임없이 증오의 대상을 찾으며 익명 속에서의 배설의 쾌감을 누릴 수도 있다. 잉여들은 수많은 선택지들 사이에서 고요하게 진동하고 있다.

진짜 잉여가 무엇인지는 정의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세계가 잉여를 만들고 쫓아내는 견고한 메커니즘을 묘사하는 1부 3장과 4장에서 드러난 논리에 따르면 오늘날의 자본주의 체제는 점점 더 많은 잉여들을 만들어내고 있다. 체제 밖으로 내쳐진 것들의 목록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장기적으로 우리는 모두 잉여가 될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저자가 탐구하는 잉여의 범위가 서술의 편의에 따라 늘었다 줄었다 하고 있다는 느낌을 피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프롤로그와 1부 1장까지만 해도 저자의 서술은 청년담론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2장에서는 20세기 후반의 신자유주의적 전환과 역사의 종언을 언급하며 모든 존재의 시작점을 잉여로 규정한다. 그런데 정작 3장과 4장에 등장하는 예시는 빈곤층, 이주 노동자, 동성애자, 테러리스트 용의자, 철거민 등 특수한 계층이다. 이 책의 주요한 독자들이 그나마 공감할만한 것은 1세계의 과잉능력화된 청년실업자와 막대한 교육비용을 회수하지 못하고 빚더미만 짊어진 대학졸업자 정도일 것이다.

또한 4장에서는 오늘날의 체제가 가장 훌륭하게 잉여를 처리하고 있다고 하였으나, 시혜적 관용을 베푸는 것과 위기의 재생산으로 비상사태를 조장하는 방법이 딱히 현대에 들어와 새롭게 나타났다고는 보기 힘들다. 이는 세계의 안정성을 어느 정도 보장할 길이 있고 거대 서사와 역사적 소명이 살아있던 과거에는 잉여가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읽는 것이 가능한 2장과 상충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게다가 2부에서 탐구하는 대상은 사이버스페이스의 잉여적 에너지들인데, 여기서 잉여의 범위는 또 다시 2000년 이후 한국 사회의 20대 청년으로 한정된다. 왜 이렇게 개념 정의가 챕터마다 들쑥날쑥해서 독자에게 혼란을 안겨다주는가? 이에 대해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나름의 해명을 한다.

잉여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언제나 제기되는 하나의 물음이 있다. '누가 혹은 무엇이 진짜 잉여냐'는 물음이다. 그런데 진짜 잉여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을까? 사람들이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는 것, "너희들이 진짜 잉여냐"라는 물음에 이토록 힘을 쏟는 이유는, 막연한 불안감의 실체를 마주하고 나와 그것 사이에 명확한 선을 긋고자 하는 소망 때문이다. 때문에 중요한 것은 어떤 흐름과 경향에 대한 고민이다. 우리들의 시대가 더 많은 잉여들을 생산하는 방식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 그 속에서 점점 과거의 구분들이 무너져가고 있다는 것, 이 문제가 특정한 누구들에게 벌어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우리들(99%!)'에게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그렇다면 아예 이러한 전제를 첫머리에 밝힌 다음, 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2부에서 전개될 사례 연구에 맞게 1부에서 서술할 잉여의 범위를 미리 한정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사이버스페이스의 잉여문화에 잉여를 만들어내는 거대한 움직임이라는 배경을 만들어주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나, 260페이지 남짓한 대중교양서 한 권으로 끝내기에는 다소 무리한 작업이었을지 모른다.

시대를 막론하고 변치 않는 희망의 본질,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잉여는 나가는 문이 없는 자본의 시대에서 자본이 먹어치우지 못하는 것들이다. 예측이 불가능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이것들에 새로운 희망을 실어주기에는 우리를 옭아매는 체제의 그물이 너무나 질기고 굳건하다. 가장 암울하지만 현실적인 전망은 지금과 같은 상태로 세상이 계속 굴러가는 것이다. 우리 시대의 거대한 원동력인 자유와 욕망이 자본주의의 손아귀에 단단하게 붙잡혀 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가 주조해낸 형태의 자유와 욕망을 극복하는 또 다른 틀을 만들어내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동력으로 바꾸어놓지 못한다면, 반전의 전망은 그리 밝지 않다.

그건 뭔가의 번데기가 아닐까? - 우스타 쿄스케, <삐리리 불어봐 재규어> 中

잉여와 잉여적 에너지들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위의 한 마디로 요약 가능할 것이다. 모두가 바삐 움직이는 세상에서 움직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눈에 밟히는 정체불명의 초라한 물체. 마치 느닷없이 굴러들어온 불량품처럼 덩그마니 남겨져있을 뿐, 제 목소리를 내지도 영향력 있는 행동을 하지도 못한다. 연속된 시공간에서 칼로 자른 듯 떼어져 나온 존재이기에 고치를 짓기 이전에 자신이 무엇이었는지, 언제 어쩌다가 번데기가 되었는지, 앞으로 무엇이 되어 껍질을 째고 나올 것인지는 본인들도 알지 못한다. 어영부영하다가 부화할 기회 자체를 빼앗기는 일 또한 비일비재하다. 실을 뽑고 난 누에고치처럼 단물만 빨아 먹힌 채 쓰레기더미로 직행하거나, 생명을 잃은 번데기의 텅 빈 껍질이 간식거리로 팔려나가듯 더 뽑아먹을 것이 없을 때까지 이윤을 창출하는 데에 이용당하는 잔혹한 경우의 수 역시 이젠 누구에게나 가능한 시나리오가 되었다.

에필로그의 마지막 부분이자 이 책의 최종적 결론은 '잉여에게 제안하는 세 가지: 생존, 성장, 만남'이다. 순결한 희생자로 사라지기보다는 추악하지 않은 생존자로 잘 살아남기, 처절한 생존 투쟁의 와중에도 성장하는 법을 배우고 스스로의 모습을 솔직하게 받아들이기. 그게 가능해질 때가, 비로소 타의에 의해 정의되지 않은 우리가 만날 때라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후기에서 저자는 이 책에 뒤따를 불만족, 비판, 비아냥들을 자신이 감내해야 할 몫이라 인정했다. '이래저래 어려운 소리나 늘어놓다가 결론은 희망고문이냐'는 등의 냉소적인 반응들을 예상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본다.

언젠가부터 '희망'이라는 말은 '고문'이라는, 언뜻 보기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법한 단어와 세트처럼 쓰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시대를 막론하고 희망의 본질이란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아닐까? 과거 인생이라고 불렸던 사이클이 와장창 박살나는 모습을 눈 앞에서 보면서도 '그러나'라는 말이 악몽처럼 따라 붙는다. 실낱같은 반전의 가능성이라도 우리는 차마 버리지 못하고 책을 찾아 읽고 강연을 듣고 답이 안 나오는 대화를 하며 어떻게든 쥐고 있으려 애를 쓴다. 희망은 언제나 지푸라기 같은 것이란 점을 직시하지 않는 대안이란 어떤 출중한 저술가가 나타나든 애초에 불가능한 일일지 모른다. 여기까지가 자신의 한계라는 것을 저자는 담담히 받아들이며 3년 가까이 이어진 글쟁이의 투쟁을 마무리 짓는다.

나는 용서를 구하거나 빠져나갈 구멍을 고민하기보다는, 그 빈 공간을 채워줄 여러분의 이야기를 기대하려고 한다. 이 책은 개인적인 그리고 시대적인 답답함에 대한 하나의 신경질적인 외침이다. 그러므로, 답답하면 여러분도 쓰시든지. - 2013년 8월 어느 열대야에. 최태섭


잉여사회 - 남아도는 인생들을 위한 사회학

최태섭 지음, 웅진지식하우스(2013)


태그:#잉여사회, #최태섭, #웅진지식하우스, #2013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