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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부터 서울 서교동에 있는 함석헌기념사업회 건물에서는 매주 화요일마다 그의 대표적 저서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로 세미나가 열리고 있습니다. 7월 말에 1학기가 끝나고 9월부터 2학기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책 한 권을 장별로 나눠 각자 읽은 뒤 느낀 점을 이야기하고 쟁점이 될 만한 것을 정해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비록 수강생은 다섯 명에 불과하지만 저마다 준비를 열심히 해옵니다. 오후 7시에 세미나가 시작되면 오후 10시께 끝나기 일쑤입니다. 가끔 함석헌과 깊은 인연이 있는 분이 참석해 그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곤 합니다. 그럴 때면 수강생들의 눈은 더욱 초롱초롱해집니다.

지난 10월 15일 모임도 그랬습니다. 그날은 함석헌기념사업회에서 격월로 발간하는 <씨알의 소리>의 편집을 오랫동안 맡았던 박선균 목사님이 참석하셨습니다. 우리는 다른 때보다 세미나를 조금 일찍 끝내고 그분의 귀한 말씀을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들었습니다.

목사님은 작은 수첩에 깨알 같이 글씨를 써 갖고 오셨는데, 그것을 보면서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는 함석헌 선생님과 첫 인연을 맺은 때를 회고하면서 함석헌의 사상, 일과 생활, 잡지를 발간하게 된 경위 그리고 자신이 왜 그 일에 뛰어들었는가를 70대 답지 않게 또랑또랑한 말씨로 이야기하셨습니다. 다른 수강생도 마찬가지지만, 나도 그분의 말씀 하나라도 놓칠세라 갖고 있는 수첩에 중요 내용을 적으면서 그의 얼굴을 응시했습니다.

한 인간의 인생 항로 결정지은 함석헌의 답장

함석헌 선생
 함석헌 선생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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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 넘게 계속된 그의 이야기 중 내 가슴에 가장 깊이 와 꽂힌 것은 다름 아닌 '편지'였습니다. 시골에서 태어나 생활하다가 서울에서 뒤늦게 고등학교를 다닐 때 우연히 신문에서 그 당시 필명을 날렸던 함석헌 선생님을 보게 됐다고 합니다. 그때가 1958년인데 그는 21세였고, 함석헌 선생님은 58세였습니다. 평소에 선생님의 사상과 글을 좋아했던 그는 너무나도 반가웠습니다. 신문에 실린 선생님의 사진과 기사를 보고 그는 선생님이 자신과는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신기하게 생각됐습니다. 신문에 실린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그는 생각했었기에 신문을 보고 또 봤답니다. 그리고 그 기사 맨 끝에 적힌 선생님의 집 주소로 편지를 열과 성을 다해 써서 보냈습니다.

그 편지는 그가 함석헌 선생님께 늘 갖고 있었던 흠모하는 마음을 적은 것이었습니다. 그는 단지 신문을 보고 무척 기뻐서 그 기분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뒤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그에게는 믿어지지 않는 기적과도 같은 일이 눈앞에서 일어난 것입니다.

그는 그 날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1958년 12월 31일, 함석헌 선생님의 편지가 그의 집에 온 것입니다. 나도 그 기분을 알 것만 같습니다. 아니 그것은 누구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는 아마도 그 편지를 손에 쥐고 마당에서 덩실덩실 춤이라고 추었을 것입니다. 자신에게는 항상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존경의 대상이기만 했던 선생님이 자신이 보낸 편지를 보고 답장을 보내셨다? 이건 정말이지 현실이 아니라 꿈만 같은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습니다. 함께 세미나에 자리를 같이 하며 선생님의 글을 갖고 교정 작업을 하는 기념사업회의 사무국장이 모두가 깜짝 놀랄 만한 말을 한 마디를 했습니다. 목사님이 그 당시 받았던 편지를 지금 보관하고 있다며 잠깐만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그 편지를 지난 2007년 3월에 기념사업회에 기증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잠시 후 사무국장은 묵직한 파일을 하나 갖고 나와서 앞에 적힌 목차를 보고 해당되는 곳을 펼쳐서 우리들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것은 분명 함석헌 선생님의 편지였습니다. 21세인 고등학생이 보낸 편지를 보고 선생님이 정성껏 답장을 쓴 바로 그 편지였습니다. 1958년에 쓴 것이니까 지금으로부터 55년 전에 쓴 것입니다. 비록 색깔은 누렇게 바랬지만 그 당시의 일반적인 양식이었던 세로 쓰기와 국어와 한문을 혼용한 편지였습니다. 우리는 모두 그 편지 곁으로 몰려들어 세상에서 둘도 없는 귀한 보물을 보는 듯이 몇 번이나 보고 또 봤습니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그는 옛 상념에 잠긴 듯 묘한 표정을 지으며 바라봤습니다. 순간 나는 그 편지가 갖고 싶었습니다. 사무국장에게 그 얘기를 하니 다른 수강생들도 덩달아 갖고 싶다고 했습니다. 사무국장은 알았다며 사무실에 그걸 갖고 들어가서 복사를 한 후 한 장씩 우리들에게 나눠줬습니다.

다음은 함석헌 선생님이 그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분입니다. 될 수 있는 한 원문 그대로 적었습니다.

함석헌
 함석헌
ⓒ 함석헌기념사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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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균군께

군의 편지 감사히 읽었소.
참을 찾고, 正義(정의)를 사모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맘은 하나님의 灵(령)이 우리 안에 일으키신 것이니 스스로 감사하고, 내가 나 自身(자신)을 尊重(존중)하여 그 정신을 잃지 않고 키우도록 해야 할 것이오. 있는 자에게는 더 주어 豊盛(풍성)하게 하고 없는 자에게는 있는 것까지 빼앗는다고.

새싹이 첨 틀 때는 熱(열)이 나듯이 우리 맘이 첨 이러날때도 熱情(열정)이 이러나는 法(법)이오. 그러나 새싹이 熱(열)만 있다면 도리어 썩듯이 우리맘도 그저 熱情(열정)만으로는 오래 못가!

돋았는 싹에 물을 주듯이 冷靜(냉정)하게 생각하여서 넓게 깊게 靈魂(영혼)의 力量(역량)을 기르도록 해야 하는 것이오. 狂信的(광신적)인 宗敎(종교)로는 못써!

스스로를 돌아보게 됐습니다

상상도 못한 선생님의 편지 답장은 고등학생인 그를 그 자리에서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일개 학생에 불과한 자신이 쓴 편지에 대해 답장을 보낼 정도라면 선생님의 인품은 더 이상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는 선생님이 걸어가시는 길을 비록 많이 부족하지만 자신도 따라가기로 굳게 결심을 했습니다.

이후 그는 오로지 함석헌 선생님과 관련된 일만 했습니다. 그로 인해서 고초도 가끔 겪기는 했지만 자신이 이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는 선생님의 일이기에 즐거운 마음으로 이겨나갔습니다. 그는 간접적으로 선생님과 함께 한 수십 년의 세월이 정말 행복했다고 말해줬습니다.

함석헌 선생님이 보내주신 답장 하나가 그의 인생항로를 확고하게 결정지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부터 그런 생각을 막연하게나마 갖고 있었고, 그 이후에도 여러 인연이 얽혀져서 그 결정에 영향을 주었겠습니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선생님의 편지였습니다. 편지 하나가 한 젊은이의 인생좌표를 굳건하게 정해준 것입니다.

그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으며 나도 한 가지 교훈을 얻었습니다. 고등학생들과 늘 같이 생활하는 나는 이런 저런 일로 해서 편지나 카드·문자 등을 많이 주고받는 편입니다. 그럴 때에 나는 학생들에게 얼마나 정성을 들여 답장을 보내주었나 돌아보게 됐습니다. 부끄럽게도 정성들여 답장을 보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어떤 때는 아예 잊어버리고 안 보내기도 했습니다.

먼저 학생들에게 편지나 카드, 문자 등을 보내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학생들이 보내는 것에 대해서는 하나하나 잊지 말고 성의껏 답장을 보내주어야 한다는 것을 그의 사연을 들으며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이 세상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입니다. 나의 답장이 함석헌 선생님의 답장처럼 한 인간의 앞길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태그:#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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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요즈음 큰 기쁨 한 가지가 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오마이뉴스'를 보는 것입니다. 때때로 독자 의견란에 글을 올리다보니 저도 기자가 되어 글을 쓰고 싶은 욕심(?)이 생겼습니다. 우리들의 다양한 삶을 솔직하게 써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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