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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을 국빈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5일 오후 버킹엄궁 인근 근위기병대 연병장인 호스 가드 광장에서 공식환영식을 마친 뒤 엘리자베스 2세 여왕,남편 에든 버러공작과 함께 마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영국을 국빈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5일 오후 버킹엄궁 인근 근위기병대 연병장인 호스 가드 광장에서 공식환영식을 마친 뒤 엘리자베스 2세 여왕,남편 에든 버러공작과 함께 마차를 타고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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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깊어져갑니다. 변화무쌍한 날씨가 시절을 상징하는 것 같아 마음이 무겁군요. 하늘이 비를 뿌리더니 천둥번개까지 이어졌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 박근혜 대통령께서는 유럽을 순방 중이겠지요. 한복을 입고 각국 수반들과 샴페인을 터뜨리는 모습이 제겐 무척 어색하게 다가옵니다. 나라가 이렇게 시끄러운데, 핍박하는 자와 받는 자가 이토록 첨예하게 대립되어 있는데, 아무런 일도 없다는 듯이 외국을 돌며 활짝 웃는 대통령의 우아한 모습이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것으로 비춰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 대선 운동기간 동안 우리나라 국민은 반반으로 나뉘어져 서로를 손가락질했습니다. 막상막하(莫上莫下)의 경쟁에서 당신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습니다(대통령을 '당신'이라고 호칭해서 송구하오나 이 글이 서간문의 형식을 빌려 드리는 것인 만큼 이해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싸울 때 싸우더라도 일단 선거 결과가 나오면 패자는 승자에게 축하의 꽃다발을 보내고, 또 승자는 패자에게 따뜻한 위로의 말을 전하는 것이 제가 알고 있는 선거 뒤의 미덕입니다. 하지만 지난 대선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선거 이후에도 운동 기간 때만큼이나 패가 갈리어 서로를 비난하고 또 자신을 합리화하기에 바빴습니다.

거기엔 약방의 감초처럼 국정원의 불법 선거 개입이라는 문제가 내재되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그렇듯이 선거에도 규칙이 지켜져야 합니다. 크든 작든, 선거에 영향을 미쳤든 그렇지 않았든 편법이 동원된 게임은 심각한 후유증을 갖기 마련입니다. 국정원이 직원을 동원하여 특정 후보를 비난하거나 지지하고 또 경찰청까지 그 편법에 힘을 합쳐 선거에 개입했다면 어느 나라 누구라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가만히 있으면 그것은 정의를 차버리고 진리를 호도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야당과 시민단체 등 당신을 반대한 사람들이 당연히 문제를 제기했습니다. 그것에 대응하는 당신의 자세는 서툴기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국정원의 선거 개입으로 이익을 본 것이 조금도 없다는 둥, 국정원은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잘 수행하고 있다는 둥, 전 정권에서 일어난 일이니 사과할 수 없다는 등의 말로 당신과는 무관하다는 것만 강조했습니다.

당신 주위 사람들은 그 야비한 짓을 즐기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국정원장과 비서실장 등에 이미 황혼기에 접어들어 고정된 사고를 할 수밖에 없는 보수 원로들을 발탁하여 주위에 포진시켰습니다. 일을 하는데 나이가 뭐가 중요하냐, 생각이 젊으면 그만이지라고 강변할지 모르지만 아직까지 사람을 평가하는 데 나이만큼 객관적인 기준은 없습니다.

당장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남재준 국정원장이나 김기춘 비서실장이 자리에 앉고 나서 벌어진 일들을 보면 그것이 증명됩니다. 대통령의 정상회담 대화록은 기밀문서로 공개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남 원장은 그것을 일반문서로 급조하여 공개했습니다. 아무 근거도 없이 노 대통령이 NLL 포기 발언을 했다고 해서 그를 따르는 자들을 싸잡아 공격했습니다. 사초(史草)가 실종되었다며 고인이 된 노 대통령의 도덕성에 흠결을 내려고 했습니다.

굳이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망자(亡者)의 행실을 두고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야비한 짓에 속합니다. 왜냐하면 망자는 더 이상 자신을 변호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지금 당신을 비롯해 정부 여당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그 야비하고 추잡한 짓을 즐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초(史草)'라는 말을 한번 따져볼까요? 이것은 봉건 왕조시대 때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정사(正史)를 기록하기 위해 사관이 대충 정리한 초기 기록을 일컫는 것입니다. 역사를 정리해서 기록한 뒤 사초는 취사선택을 해서 버릴 것은 버리고 필요한 것은 따로 보관하는 것이 당시 관례였습니다.

대통령의 기록물은 엄격하게 따져 '사초'가 아닐 뿐 아니라 그가 메모해둔 것을 시시콜콜 다 보관한다는 것도 우스운 일입니다. 대통령 기록물 중 후임 대통령에게 또 국민을 위해 필요한 것만 보관 가치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의 정부는 마치 노 대통령과 그를 보좌하던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것을 감추기 위해 기록을 삭제 멸실했다고 몰아치고 있습니다. 참으로 역사를 모르는 무식의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대통령은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사람입니다. 지지자뿐만 아니라 그 반대쪽 사람들의 대통령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취임 이후 길지 않은 시간을 돌이켜 보면 당신은 지지자들만의 대통령으로 처신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지지하지 않는 사람은 상식을 초월한 방법으로 옭아매는 일들을 반복해왔습니다.

사람들이 40년 전의 유신독재 시대로 회귀했다는 말들을 공공연히 하고 있습니다. 제가 대통령의 자리에 있다면 비록 잘못이 없다고 해도 국민 통합을 위해 사과의 말을 건네고 앞으로 유사한 일이 재발하지 않도록 다 같이 노력하자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쉽게 끝날 일입니다. 그렇게 한다고 대통령의 위상이 떨어질까요? 도리어 그 반대일 것입니다.

'2대에 걸친 독재자'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겠지요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이관 문제와 관련해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6일 오후 서울중앙지검에 도착한 문재인 민주당 의원은 "국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 수호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사건의 핵심은 국정원이 대화록을 빼돌려 대선에 악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이관 문제와 관련해 참고인 신분으로 검찰 조사를 받기 위해 6일 오후 서울중앙지검에 도착한 문재인 민주당 의원은 "국민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 수호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사건의 핵심은 국정원이 대화록을 빼돌려 대선에 악용한 것"이라고 말했다.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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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당신은 그런 융통성을 발휘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반대하는 사람들을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았습니다. 이것은 과거 권위주의 시대 독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될지언정 21세기 이 나라가 요구하는 대통령이 할 일은 아닙니다. 깨놓고 생각해봅시다. 채동욱 검찰총장을 쫓아낸 것 말입니다. 유부남 채동욱이 다른 여성과의 부적절한 관계가 있는 것 같다는 혐의로 내쫓았지만 그것을 정상적인 인사권 행사로 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는 국가 권력의 한 축을 책임지고 있는 검찰총장이었습니다. 검찰청에 근무하는 하급 공무원도 이런 식으로 내쫓긴다면 발끈하고 저항을 했을 것입니다. 채 총장을 그만두게 하려면 조용히 불러 함께 일하기가 어렵겠다고 운만 떼면 그가 자진해서 진퇴를 결정했을 일을 왜 그렇게도 치기(稚氣)어리게 처리하셨습니까.

당신이 대통령에 당선되고 나서 제게 떠오른 상념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아버지 대통령을 뛰어넘어 여성 대통령으로서 진정 국민을 잘 섬기고 박수를 받으면서 퇴임하는 상(像)이 그 하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유신 독재로 18년 장기 집권을 하다가 부하의 총탄에 목숨을 잃은 아버지 대통령과 비슷한 길을 걸으며 어렵게 5년을 버티는 대통령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후자의 길을 당신이 가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대통령이라면 역사의 상세한 내용은 몰라도 대강의 흐름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역사의 무서움을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당신은 '부녀 2대에 걸친 간악한 독재자'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겠지요.

항간에 사람들은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은 군화발로 국민을 통치했지만 딸 박근혜 대통령은 공권력을 농단하며 국민 위에 군림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집권 10개월도 채 안 되었는데, 이런 말을 들어서야 되겠습니까.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감히 충언(忠言)합니다. 지는 연습을 좀 하시기 바랍니다. 양보하는 미덕을 배우시기 바랍니다. 상대방을 배려하는 아량을 갖기 바랍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신앙생활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라 오늘날 다양한 국민을 다스려야 하는 대통령에게도 요구되는 덕목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릴 때, 이런 우스갯소리를 주고받던 기억이 있습니다. 간신나라의 충신은 간신일까 충신일까? 주위에 득실거리는 간신배들만으론 박수 받으며 퇴장하는 대통령이 되기에 어렵다는 사실을 깨우치시기 바랍니다.

대통령 마음에 안 든다고 정당을 해산하라니...

대통령이 이성을 상실하면 보좌하는 사람들도 정부 여당 사람들 모두 이성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지금이 그런 상황이 아닌가 우려스럽습니다. 세상 삶에는 윤리 도덕이라는 것이 있고 또 상식이라는 게 있는데, 그것을 무시하고 날뛰는 당신 주위의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저 사람들이 과연 21세기 대한민국의 공기를 같이 호흡하고 있는 사람들인가 하고 의아해질 때가 많습니다.

좋은 나라, 살기 편한 나라, 국리민복이 보장된 나라 등의 거창한 구호보다도 지금 우리나라에 절실한 것은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만큼 계층 간에, 지역 간에 소통이 되지 않고 있다는 말이 될 것입니다.

며칠 전, 당신이 외국을 순방 중인 때를 이용하여, 국무회의에서 우리나라 제3의 정당인 통합진보당을 해산시켜달라며 헌재에 심판을 청구하기로 했더군요. 일부의 극우 보수 세력들은 쾌재를 부를 일이 되겠지만, 국민 전체를 염두에 둔 결정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대통령이 없는 데서 벌인 단순한 실수일까요? 삼척동자도 비웃을 일을 당신의 정부에서 하고 있습니다.

정당은 정부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국민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마음에 안 든다고, 대통령을 맹종하는 국무위원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정당을 해산하는 나라는 정상적인 나라가 아닙니다. 뻔한 이야기가 될 것입니다만 통합진보당이 지금 우리나라에 불필요한 정당이라면 선거를 통해 사라지게 하는 것이 민주 국가의 절차이자 방법입니다.

조폭 세계에서나 있을 법한, 그것도 통상적 차관회의도 거치지 않고 긴급 의안으로 올려 졸속으로 국가의 제3당을 해산시켜달라고 심판을 청구하는 것은 국무위원들의 저급한 수준을 말해주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저는 이런 저급한 아이디어가 대통령에게서 나왔다고 보지 않습니다. 국가와 국민의 장래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대통령에게 알아서 기는 무개념의 국무위원들의 작품이라고 봅니다. 그렇다고 대통령에게 책임이 없을까요. 이 문제의 책임은 전적으로 대통령 당신에게 귀결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당신이 국무회의의 수장이자 이 나라의 최고 통수권자이기 때문입니다.

용수철은 누를수록 더 많이 튀어 오릅니다

통합진보당 의원 5명(김선동, 김재연, 오병윤, 김미희, 이상규)이 6일 오전 국회 본청앞에서 정부의 정당해산 심판 청구에 항의하며 삭발한 뒤 단식농성을 위해 본청입구로 이동하고 있다.
▲ 통합진보당 의원단 삭발·단식 돌입 통합진보당 의원 5명(김선동, 김재연, 오병윤, 김미희, 이상규)이 6일 오전 국회 본청앞에서 정부의 정당해산 심판 청구에 항의하며 삭발한 뒤 단식농성을 위해 본청입구로 이동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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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석기 의원 사건도 그렇고 통합진보당 해산 심판 청구의 건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북한과 연결되어 있으니까 위험하다는 것 아닙니까. 저는 단언컨대 이들이 북한과 연결되어서 국가가 위태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신을 비롯한 집권 세력이 헌법에 보장되어 있는 국민의 자유권을 무시함으로써 국가의 위기가 더 빨리 온다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모든 면에서 북한을 멀리 앞서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6·25 직후의 반공 냉전논리로 국민을 대한다는 것은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하는 것임을 주지시키고 싶습니다.

이런 예를 들면 어떨까요? 대학생이 있고 그의 초등학생 동생이 있습니다. 동생의 친구를 그 대학생 형이 몹시 미워합니다. 동생이 초등학생 친구와 가깝다고 해서 대학생이 위기감을 느끼는 것은 정상이 아닐 것입니다. 북한과 연계되어 있지도 않겠지만 설령 연결되어 있다고 해도 그들에 의해서 우리나라가 위태롭게 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당신의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여러 가지일 수가 있습니다. 그 중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장기간 독재를 했다는 평가는 국내외에 널리 알려져 있는 내용입니다. 아버지의 전철을 밟고 싶습니까? 지금 이 나라 국민은 그때의 백성이 아닙니다. 많이 깨어 있습니다.

용수철은 누를수록 더 많이 튀어 오릅니다. 쥐도 피할 구멍을 주고 쫓아야 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극우 보수의 범주에만 머무르면 그만큼 작은 통치자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벗어나서 국민 전체를 아우르는 대통령이 되시기 바랍니다. 반대자들을 개념이 애매모호한 '종북'이라는 말로 낙인 찍어 멀리할 것이 아니라 정치의 한 파트너로 여기고 손을 내미시기 바랍니다.

시대는 많이 변했습니다. 세계는 한 이웃처럼 지내고 있습니다. 이른바 지구촌 시대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할 일은 많고 세상은 한없이 넓습니다. 그런데 한반도, 그것도 반쪽 남한에서 서로를 증오하며 이를 가는 것은 어느 모로 보나 시대에 뒤떨어진 낭비입니다.

대통령으로부터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대한민국이라는 공동체의 일원으로 자부심을 갖고 사는 길은 없을까요? 당신이 전체의 대통령 자리로 돌아올 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대하는 사람들을 사랑으로 끌어안을 때 가능합니다. 제발 가능한 한 빨리 이성을 회복하십시오.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으로부터 드리는 고언(苦言)입니다.

밤낮 기온 차가 큽니다. 외국 순방 길, 목적하신 결과 가지고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기내에서 새로운 정치를 구상하며, 소외받는 자 없이 국민 전체를 헤아리는 대통령이 되기를 소망하면서 두서없는 글월 이만 줄입니다. 무례한 표현이 있었다면 해량(海量)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만추의 계절에 경북의 한 서생이 올립니다.


태그:#박근혜 대통령, #통합진보당, #해산 심찬 청원, #국무회의, #해외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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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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