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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을 연마해 성현의 도를 추구하는 데 주력했던 인물, 이황(李滉·1501∼1570)은 '동방의 주자'로 추앙되고 있다. 그는 현실정치에 참여하기도 하였지만, 그보다는 성리학을 학문적 바탕으로 하여 내면 수양의 기초가 되는 '인간의 마음 연구'에 주력하였다.

그는 인성교육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강조한 사람이다. 인성교육에 대한 그의 생각이 잘 나타난 책으로는 <자성록>을 들 수 있다. 이 책은 이황이 말년에 엮은 것으로 후학들에게 답한 편지를 추린 것이다. 그는 이 책에서 그 당시 선비들에게 '공부하는 자세' '바른 학문의 길' 등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다.

"어린 시절 이황의 이웃에 <천자문>을 읽을 줄 아는 할아버지 한 분이 살고 있었다. 꼬마 이황은 아침마다 세수하고 머리 빗고 그 할아버지 집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할아버지 집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울타리 밖에서 전날 배운 것을 여러 차례 외워 복습한 뒤에 들어갔다. 그리고 엄격한 스승을 대하듯이 공손히 절하고 배우기를 청했다."(신창호 <함양과 체찰> 중)

어렸을 때부터 반복과 암기로 공부했던 이황은 1501년 11월 25일(음력) 예안(禮安·지금의 경상북도 안동시)에서 진사 이식(李埴·훗날 좌찬성으로 추증됨)의 7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였기 때문에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12살이 되던 해에 숙부 이우(李堣)에게서 유교의 핵심 경전인 <논어>를 배우기 시작해 학문의 세계에 입문했다.

그 후 소과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며, 식년시(式年試·조선시대에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시행된 과거시험)에서 문과의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외교 문서의 관리를 담당했으며,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기도 하고, 충청도 어사, 성균관 교수직인 사성 등을 역임했다. 1545년 을사사화로 삭탈관직 되었다가 곧바로 복직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토계(兎溪)인근에 양진암(養眞庵)을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황은 단양 군수와 풍기 군수를 역임하기도 했는데, 이황은 풍기 군수로 있으면서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에 편액(扁額·건물이나 문루 중앙 윗부분에 거는 액자)과 서적, 학전(學田·고려 조선시대 유학을 가르쳤던 각 교육 기관의 경비에 충당하기 위해 지급된 토지) 등을 내려줄 것을 건의하였다. 조정에서는 이황의 건의를 받아들여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편액과 함께 면세와 면역의 특권도 부여하였는데, 이로써 소수서원은 조선 최초의 사액서원이 되었다.

1549년에는 또다시 병을 이유로 다시 관직에서 물러나 토계 인근에 한서암(寒棲庵)을 지어 거처로 삼고, 학문 연구에만 몰두하였다. 그래서 조정에서 벼슬을 내려도 사직 상소를 올려 받지 않았으며, 마지못해 관직에 올랐다가도 곧바로 사퇴하기를 되풀이하였다. 그 후에 사헌부 집의, 홍문관 부응교, 성균관 대사성 등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번번이 사양하고 물러났다. 이황은 이처럼 조정의 벼슬을 사양하고 고향인 예안에 머무르며 학문 연구에 힘썼다. 1561년에는 도산서당을 세워 후진을 양성하였다.

명종이 죽고 선조가 즉위한 뒤에도 여러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이황은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다시 낙향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계속해서 조정에 들어올 것을 청하자, 상경하여 홍문관과 예문관의 대제학을 겸직하였다. 그리고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그는 선조에게 <무진봉사>(戊辰封事)와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지어 바쳤는데, <무진봉사>는 왕이 바른 정치를 하기 위해 주의해야 할 것을 여섯 조항으로 정리하여 상소한 것으로 이이의 <만언봉사>(萬言封事)와 더불어 조선 성리학의 정치이념이 잘 드러난 저술이다. 그 후에도 이조판서로 임명되었으나 다시 병을 이유로 사양하고 낙향하여 후진을 양성하다가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사후에 그는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한 때는 <주역>에 심취하기도 하였으나,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간 뒤부터는 <심경부주>를 즐겨 읽었다. <심경부주>는 중국 송나라 때 학자인 진덕수(眞德秀)가 지은 <심경>에 정민정(程敏政)이 주석을 단 책으로, 인간의 마음 이해를 위한 성리학자의 필독서였다. <심경부주>는 그 당시 대부분 사람들은 구두조차 떼지 못할 정도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책이었는데, 이황은 "문을 닫고 방에 앉아 여러 달을 연구한 끝에 그 대강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퇴계선생언행록>에 기록하였다.

이황의 학문은 그가 살았던 시대뿐만이 아니라 이후 조선 사회에서 상당한 파급력으로 확산되면서 성리학의 정수로 인정받았다. 임진왜란 이후 그의 문집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일본에서도 주자학의 주류로 자리매김하였다. 오늘날 그에 대한 연구는 국내에서 뿐만 아니라 일본과 대만, 미국, 중국 등 국경을 초월해 이루어지고 있다. 아마도 그의 공부가 '인간의 마음 연구'였기에, 시공을 초월한 관심거리가 된 것이 아닌가 한다.

마음공부에 혼을 불살라 인성교육에 힘쓴 이황의 독서법

평생을 마음공부에 혼을 불살라 후학들의 인성교육에 힘썼던 퇴계 이황, 그는 어떻게 책을 읽었는지 그의 독서법의 세계로 들어가 보자.

첫째, 속뜻을 음미하며 책을 읽어라. 이황은 성장하면서 더욱 글 읽기를 좋아했다. 그렇다고 자만하거나 남에게 뽐내고 그러지는 않았다. 여러 사람이 모여서 글을 읽는 자리에서도 항상 벽을 향해 가만히 속뜻을 음미하고 책을 읽었다고 한다. 특히 동진시대의 전원시인 도연명의 시를 좋아하고 그 사람됨을 사모하였다.

둘째, 독서의 과정을 엄하게 세우되 서두르지 않았다. 이황은 남시보(南時甫)에게 답한 편지글에서 '책을 보는 것은 마음을 수고롭게 하지 않게 하여야 하니, 많이 보는 것은 매우 좋지 못하다. 다만 뜻에 따라 그 맛을 즐겨야 한다.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일상생활의 평이하고 명백한 곳에 나아가 간파하고 익히며, 이미 아는 바에 대해서는 편안하고 여유 있는 마음으로 음미해야 한다. 오직 착심(着心·어떤 일을 마음에 붙임)한 것도 아니고 착심하지 않은 것도 아닌 사이에 두고 잊지 말도록 하여야 한다. 그리하여 쌓기를 오래 하면 저절로 이해되어 얻는 것이 있을 것이니, 너무 집착하거나 얽매여서 빨리 효과를 보려 해서는 더욱 안 한다'고 했다.

셋째. 좋은 글은 초록하고 생각이 떠오르면 질서했다. 퇴계는 노이재(盧伊齋)에게 답한 글에서 '묘계질서(妙契疾書) 하는 일은 본받을 수 없으니, 어찌 나에게 저술이 있겠습니까, 일찍이 <계몽>(啓蒙)을 읽다가 뜻밖에 얻은 바가 있을 적마다 손이 닿는 대로 추려서 기록하여 잊지 않도록 대비하였는데, 뒤에 생각이나 행동이 꼼꼼하지 못하고 잘못된 곳이 있음을 발견하고 계속해서 수정하여 이미 두 번 초고를 바꿨으나 아직까지도 완성하지 못하였으니, 죽기 전에 조금이라도 진전이 있기를 바라므로 감히 남에게 보이지는 못하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묘계질서란 주희(朱熹)가 지은 장횡거(張橫渠)의 찬(贊)에 있는 문구로, 장횡거가 밤에 자리에 누웠다가 의리에 대하여 새로 생각나는 것이 있으면 곧바로 일어나 붓으로 빨리 썼다(질서疾書)는 데서 나온 말이다. 묘계는 미묘하게 알아냈다는 뜻이다.


#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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