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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동안 한가로이 탄자니아 음트와라에 죽치고 있으니 정신이 맑아진다. 게으름이란 혹은 느림이란 그것이 현실이라는 벽에 좌초한 패자의 습성이 아니라면 나름대로 괜찮은 것이다.

우리는 인생의 여러 갈림길에서, 매사 부닥치는 선택의 와중에 서 있는 불안한 존재다. 따라서 다가올 미래를 결정하는 긴장의 순간에서, 내면의 불안을 잠재울 각종 구실로 종교나 과학 같은 것을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인간의 이성에 집중하게 되었고, 보다 정교하고 세밀한 방법을 찾기에 이르렀다.

그것은 가장 이상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판단의 근거로서 자신과 대상을 주도면밀하게 분석하는 것인데, 즉, 문제 해결과 판단, 예측의 도구로서 합리성과 과학성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된 것이다.

서구 계몽시대를 지나 근세로 넘어오던 시대, 불행히도 때는 서구 제국주의의 팽창이 절정에 달하여, 세상의 삼분의 이를 점령한 시기였다. 그리고 그들이 신봉했던 가치들은 물밀듯이 세상 밖으로 퍼지고, 무력의 칼날에 마비된 식민지의 자손들은 오늘날까지 세상의 유일한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데 주저함이 없게 되었다.

번잡하지 아니하고, 성급하지 않은 몸과 마음의 여유는 굳이 합리성이라는 돋보기를 들이대지 않더라도, 제대로 박힌 정신머리로 하여금 가끔씩은 훌룡한 선택을 하고 만다. 아니 심신의 여유로움이란 객관적으로 보아 최악의 선택에 따른 암울한 결과에 있어서도, 항상 그렇듯이 '허허, 그렇게 됐네' 하고 웃으며 보듬을 정도로 긍정적인 것들로 가득차 있다.

그러니 가끔씩은 머리 싸매지 말고, 멍 때리는 것도 괜찮은 듯 싶다.

밑창이 닳은 운동화를 수선하는 아저씨
조그만 얘기에도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이 끊임없다
▲ 신발 수선공 밑창이 닳은 운동화를 수선하는 아저씨 조그만 얘기에도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이 끊임없다
ⓒ 이근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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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지 못한 무지렁이에게서, 경쟁에서 밀려난 소외된 자에게서, 많은 사람들이 하루 2달라 미만으로 살아간다는 아프리카 땅에서, 발견하게 되는 소박함과 인간적인 교감들, 그리고 내가 가지지 못해서 질투하는 넉넉함들은 아마도 이것들이리라.

세상과 투쟁하기보다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는 것, 문제점을 찾아 해결하려 하기 보다는 공존하는 것.

인간의 존재 이유가 행복이라면, 행복은 어디에 있는가. 행복의 수단일 뿐인 물질이 목표가 되어버린 듯한 이 착시의 시대에, 세상의 모습을 얘기함에 있어, 경제발전이라느니, 가난이라는 지렛대를 세상을 판단하는 유일한 진리인 양, 함부로 들이밀지 아니함이 좋을 듯하다.

난 그들의 세상의 모든것에 관한 너그러움이 정말 부럽다.

3000실링짜리 여관방엔 다행히도 삐그덕 소리를 내며 돌아가는 선풍기가 머리 위 천장에 매달려 있다. 그런데 그 옆으로 희미한 백열등이 붙어 있어, 돌아가는 선풍기 날개와 함께 불빛도 나이트 클럽의 병든 조명처럼 온 방구석을 싸돌아 다닌다.

선풍기도 돌고, 불빛도 돌고, 내 머리도 뱅글뱅글 따라 돌아간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요지경 세상 속에서 지도를 펴 놓고 한참동안 멍하니 정신줄을 놓았다. 점차 한 곳이 눈에 들어온다.

에머랄드빛 인도양과 만나는 탄자니아 동쪽 해변은 멀리 위쪽의 탕가로부터 펨바, 잔지바르, 마피아 그리고 아래의 음트와라까지 오염되지 않는 자연 환경으로 많은 곳이 해양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사시사철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는 잔지바르를 제외한하면, 나머지는 국립공원이라는 명칭에 걸맞지 않게 소박한 모습을 가지고 있다.

그중의 하나인 음심바티 반도는 모잠비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탄자니아 남쪽의 맨끝에 위치한 곳으로서, 인도양을 향해 갈코리 모양으로 굽어 있는 반도이다. 그러나 남쪽 끝 외진 곳에 어느 외국인이 오겠으며, 조그만 소도시인 음트와라에서도 소풍 올 사람도 별로 없을 터인, 다른 한적한 어촌과 별반 다르지 않는 곳이다.

음트와라에서 출발한 달라달라는 얼마 되지 않아  조그만 마을인 음심바티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목적지인 바닷가 루블라 마을까지는 교통 수단이 없다. 어차피 한가로운 시간, 여관이라도 있으면 하루 묵고 천천이 여정을 이어가도 좋으련만. 구멍가게 두 곳이 전부이고, 흔한 식당 하나 보이지 않는다.

길은 똑같은 방향으로 세 갈래 길인데, 반드시 오른쪽 길로 가라고 몇 번을 거듭한다. 가르켜준대로 걸어가 보니, 신작로는 끝이 나고  지붕도 없는 가엾은 벽돌집에서 한 사내가 뛰어나온다. 여기가 공원 입구이고 1만 실링 짜리 표를 사야 한단다. 옥신각신하다가 5000실링으로 표를 끊어 나오니, 어느새 오토바이가 기다리고 있다. 루블라까지는 8킬로미터 거리고 유일한 이동 수단일 오토바이 삯은 1만5000실링이란다. 묻지도 않았는데 잘도 말한다. 아마도 모두 다 하루에 고작 몇 명일 관광객만 나타나기를 하루 종일 기다렸을 터.

해변을 따라 걸어간다. 걷는 데에는 이골이 났으니, 이십리 길은 식은 죽 먹기다. 더우기 아름다운 풍광이 함께 하니, 저절로 콧노래가 나온다. 높다란 야자수 아래에서 땀을 식히고 걸음을 재촉한다. 하얀 모래밭 위로 두 사내가 갓 잡은 문어를 보여주며 자랑한다.

음심바티에서 루블라로 가는 해변 길.
문어를 잡은 어부가 싱글벙글 집으로 돌아간다.
▲ 루블라 가는 길 음심바티에서 루블라로 가는 해변 길. 문어를 잡은 어부가 싱글벙글 집으로 돌아간다.
ⓒ 이근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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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늦게 루블라의 유일한 숙소인 사파리 호텔에 도착하였으나, 가격표에 놀라 저절로 입이 벌어진다. 하룻밤에 7만 실링. 가난한 여행자이니 깎아 달라고 흥정할 여지도 없는 가격이다. 여태까지의 시간동안 오천 실링 이상인 여관에서 자본 적이 없는 놈에게 7만 실링이라는 가격은 마른 하늘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리다.

그렇다고 다시 돌아갈 수도 없는 일. 음심바티엔 머물 여관도 없고 해가 지면 음트와라행 달라달라도 끊길테고…. 3만5000실링이 마지노선이라는 여주인은 보기에 답답한지 자리를 떴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제까지 옆에서 지켜보던 키가 크고 홀쭉한 한 남자가 다가와 앉았다.

"정말 돈이 없는 거야?"

묻기를 몇 번 하더만 바깥으로 나가버린다. 그러다가 한참만에 그가 다시 나타났다.

"걱정 마, 내가 얘기했다. 5000실링만 주인한테 주고 여기서 나랑 함께 잠자면 돼."

잠시후 그가 경비원들이 밤이슬을 피하러 만든 원두막으로 그물로 짠 나무 침대와 이불을 가져오고 모기장까지 쳐 준다. 그리고 호텔 안으로 들어가 빈 방안의 화장실로 안내해주고 수건과 비누까지 챙겨준다. 말라붙은 바닷가 염분을 씻어내기가 무섭게 그가 부른다. 배가 고플터이니 밥 먹으라고.

오늘은 손님이 없는 날이라 물고기를 사지 않아 반찬이 마하라게(콩)뿐이라고 미안해 하기까지 한다. 배고픈 속에 우갈리와 마하라게가 꿀맛이다. 항아리에 모아둔 빗물이지만 깨끗한 윗물을 떠온 거라며, 물까지 대령이다.

탄자이아 서민들의 주식인 우갈리(옥수수 가루를 찐 것으로 우리의 밥과 같다) 와 마하라게(콩)
▲ 우갈리와 마하라게 탄자이아 서민들의 주식인 우갈리(옥수수 가루를 찐 것으로 우리의 밥과 같다) 와 마하라게(콩)
ⓒ 이근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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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로운 오후의 수영. 그리고 땅거미가 지는 저녁, 바다 한가운데에 정박해 있는 고깃배. 해변에 피운 모닥불가에서 고기를 팔러 왔다는 모잠비크 어부들과의 즐겁고도 유쾌한 대화. 붉은 황혼의 끝자락을 붙잡고 너울거리는 돛단배, 배 위에서 하루를 정리하려 분주한 사람들 그림자.

시원한 바닷바람을 맞으며, 배 갑판 위에서 자도 된다는 소리에 솔깃했지만 걱정하는 호텔 식구들이 맘에 걸려 아쉬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시간은 황홀하게 흘러간다.

고기를 잡다가 어둠이 오자  탄자니아 루블라 해변에 정박한 모잠비크 어선. 아프리카인들에게 국경의 의미는 대단하지 않다.
▲ 석양 고기를 잡다가 어둠이 오자 탄자니아 루블라 해변에 정박한 모잠비크 어선. 아프리카인들에게 국경의 의미는 대단하지 않다.
ⓒ 이근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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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3시. 그가 나를 깨운다. 일어날 시간이다. 음트와라로 출발하는 달라달라는 음심바티에서 오전 5시에 출발하는 것이 유일하다. 그리고 여기 사파리 호텔에서 음심바티까지는 오로지 걷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전날 했던 약속처럼, 그는 나를 깨우고 반달이 구름에 걸린 검푸른 밤에 음심바티를 향해 앞장을 선다. 깜깜한 밤인데다가 바다 옆 오솔길은 모래로 덮여 있어 걷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다. 모랫길에 미끄러지고 푹푹 빠지다 보니 이내 지치고 만다. 그러나 폐타이어로 만든 슬리퍼를 신은 그의 걸음걸이는 사뿐사뿐 날아가는 듯하다. 그리고 쉴새없이 떠드는 그의 입심이란.

처음에 못 알아듣더라도 몇 마디 "사와"(그래) 하며 추임새를 넣어 줬더니, 내가 스와힐리어를 잘 한다고 생각하나 보다. 끊임없이 재잘거리는 그의 입과 잰 걸음을 좇느라 온몸이 땀으로 젖는다.

그의 고향집과 어머니, 지금 살고 있는 루블라 마을 사람, 오늘 아침 들판에 매어둔 소가 다쳤다는, 왜 요즘은 물고기가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는지에 대한 이야기 등등…. 두 시간 동안 걸어가면서 퍼부은 수많은 얘기에 머리에 쥐가 날 정도다.

달라달라가 서는 골목에 나를 데려다 주고, 그가 떠난다. 콩고에서 태어나, 곧 콩고에 남아 있는 가족을 데려올 계획이라는 호텔 경비원 피터가 등을 돌리고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잘 가"라는 그 흔한 말 한마디 없이, 그 낯짝이라도 확인하려는 그 흔한 헤어짐의 공식 없이 그가 등을 돌리고 떠난다.

살아가면서 부닥치는 수많은 만남과 사랑과 이별들에 피터는 아쉬워 하지 않을 것이다. 인생의 굽이치는 굴곡점에서 피터는 과도한 의미 부여없이 그의 모습대로 천천이 걸어갈 것이다.

그러나 언제라도 나같은 사람을 만나면, 오늘 그랬던 것처럼 검푸른 달밤의 여행을 함께 해줄 것이다. 그 사람은 내가 아닌 피터이니까….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11년 10월께 글쓴이가 탄자니아를 여행한 기록입니다.



태그:#탄자니아여행, #탄자니아국립공원, #탄자니아해변, #음트와라, #행복한 아프리카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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