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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석제가 쓴 소설 <이 인간이 정말>의 표지.
성석제가 쓴 소설 <이 인간이 정말>의 표지. ⓒ 문학동네
소설가 성석제가 5년만에 새로운 책을 펴냈다. 2008년부터 2012년까지 발표했던 8편의 단편소설을 모아서 엮은 것이다. 각각의 짧은 이야기는 강렬하거나 돋보이지는 않지만, 잔잔하게 흘러가는 사건 속에서 찌질하고 못난 인물들의 일상을 조용히 비추고 있다.

그 중에서도 눈에 띄는 것은 첫 이야기인 '론도'와 책의 동명제목 '이 인간이 정말'을 꼽을 수 있다. '론도'에서는 지하주차장에서 접촉사고를 겪는 주인공의 시점으로 평범한 사건을 느리게 비추는데, 줄거리가 흥미를 잡아끌거나 인상깊은 메시지를 담고 있지는 않다. 그럼에도 상황과 인물에 대한 작가의 묘사로 이야기는 활기를 얻는다.

자신의 잘못으로 사고가 났음에도 고집을 굽히지 않고 젊은 주인공에게 훈계를 하려는 노인, "좋은게 좋은 거 아니냐"며 현금으로 합의를 보라고 은근슬쩍 떠밀어대는 보험회사 직원, 완벽하게 차를 고쳐놓겠다며 능청을 떠는 정비업체 사장. 각자 자신의 입장만을 고수하면서 부딪히는 군상들을 보고있자면 답답함이 밀려든다. "한번 읽으면 그만인 소설일 뿐이야"라고 되뇌이면서 책장을 넘기지만, 사실 우리네 일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이 인간이 정말'에 이르러서는 인물의 찌질함이 더욱 짙어진다. 주인공은 엄마의 소개로 소개팅에 나온 부유한 집의 아들인데, 맞선상대로 나온 여자를 앉혀놓고 혼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떠들어댄다.

"레그혼 품종 만 마리 기본 암탉이 단 삼세대 만에 이십오억 마리의 조상이 되고, 여기서 일 년에 칠천억 개의 달걀이 나와요. 칠십억 인구 한 사람당 백 개씩 돌아가니까 전 세계의 수요를 충족하고도 남죠. 이 닭들은 그저 알을 낳도록 프로그램이 되어 있어서 병이 들어도 알을 계속 낳아요. 정상적인 닭은 알을 낳고 휴식을 취하는데 이런 고성능 닭은 쓰러져 죽을 때까지 미친 듯이 알만 낳죠.

이런 식으로 돈을 짜내려는 방향으로 육종이니 품종개량이 계속되니까 유전적으로 문제가 생기고 문제를 해결하려고 또 약을 계속 퍼붇게 되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약학산업 기업도 돈을 벌고 동물을 공장식으로 사육하는 거대 기업들도 돈을 벌다보니 서로 사이가 좋죠." (본문 112쪽 중에서)

축산업계의 문제를 꼬집는 좋은 지적이다. 문제라면 맞선을 나온 여성과 고기요리를 먹으면서 비위가 상할 정도로 집요하게 자세한 묘사를 했다는 점이랄까. 상대방의 반응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자신의 관심사만 쏟아내던 주인공은 결국 퇴짜를 맞고, 겨우 자리에서 벗어난 여자는 조용하게 혼잣말을 뱉어낸다. "됐다 새끼야, 제발 그만 좀 해라"라고.

엉터리에 찌질한 인물들의 향연, 우리의 기억을 다독인다

앞서 언급한 2편 외에도 나머지 6편에 등장하는 인물들 대다수도 '속 빈 강정'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엉터리인 경우가 많다. 찌질함의 극치를 보여주거나, 지나치게 자기중심적인 언행으로 독자의 눈쌀을 찌푸리게 할 정도이다.

하지만 등장인물의 모습 때문에 기분이 언짢아지는 동시에 그들에게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 등장인물 중 누구도 극악무도한 악당이거나 초인적인 영웅이 아니라는 점이다. 바로 인물과 사건의 '평범성'이다. 어쩌면 작가인 성석제는 이런 소소한 이야기와 사람들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를 다독이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저자는 '작가의 말'을 통해 자신의 책에 실린 짧은 소설들에 대해 "격렬한 기후 변화와 세계화의 와중에 씌였다"고 말했다. 또한 "그만큼 울퉁불퉁해진 세상에서 균형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았다"고도 덧붙였다. 이를테면 급격하게 변해가는 시대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무언가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작가의 마음이 아니었나 싶다. 어제의 모든 것들이 변화의 물결에 휩쓸려가는 오늘, 불안한 우리가 기댈만한 곳은 결국 '일상'이라는 점을 포착한 것이 아닐까.

눈부신 추억의 힘으로 우리는 살아가지만, 정작 삶을 지탱하는 것은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평범한 일상'인지도 모른다. 마치 우리가 미처 느끼지 못하지만 중심을 잡도록 도와주는 중력처럼 말이다. '작가의 말'에 쓰인 마지막 문장을 인용하자면, "그러니 아직 견딜 만은 한 것"이다.

가벼운 분위기로 쓰여진 단편소설들을 읽고나서 내가 살아가는 현실이 한층 탄탄해지는 듯한 묘한 느낌이 든다. 제목 그대로 "이 인간이 정말!"하는 탄식이 터져나오는 이야기들로 인해 삶의 한 페이지인 오늘을 다시 살아갈 힘이 생기는 듯하다. 이것이야말로 화려하지 않은 성석제의 글이 읽는 이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라고 하겠다.

덧붙이는 글 | <이 인간이 정말> (성석제 씀 | 문학동네 | 2013.09. | 1만2000원)



이 인간이 정말

성석제 지음, 문학동네(2013)


#성석제#이 인간이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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