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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형식 당인리대안정책발전소 부소장.
 한형식 당인리대안정책발전소 부소장.
ⓒ 신정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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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말을 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처음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사건 관련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맑스주의 역사강의>의 저자 한형식 당인리대안정책발전소 부소장은 인터뷰를 꺼렸다. 설득 끝에 지난 11일, 그가 활동하는 마르크스주의 기반 연구·교육공간인 '세미나네트워크 새움'(서울시 합정동, 이하 새움) 사무실에 마주앉았다. 그는 먼저 '담론의 과잉'을 우려했다.

"지금처럼 너도나도 전문가라고 떠드는 상황에서는 어떤 합리적인 이야기를 하더라도 묻힌다. 상품처럼 소비될 뿐이다. 특히 '경기동부나 이석기가 잘했네, 잘못했네'와 같이 평가하는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보통 언론에서 지식인들이 '나는 이석기를 싫어하지만...'으로 논의를 시작하는데, 그것 자체가 논점을 흐리는 거다."

상품처럼 소비되는 '이석기 비판'

그러면서 한 부소장은 이 문제를 언급하는 지식인과 좌파들이 상당히 불순한 의도를 갖고 있는 것 같다면서 비판했다. 그는 첫째로 사람들이 이슈화된 사건을 계기로 진보판에서 이름을 날리려는 욕심이 있는 것 같다고 지적했다.

"1990년대 초, 소련 등 사회주의권이 붕괴하자 운동권 중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낡은 좌파로 몰아붙이면서 포스트주의를 택해 자유주의로 전향한 이들이 있다. 이들이 구좌파와 함께 공격 목표로 삼은 게 바로 NL(민족해방파, 자주파), 민족주의였다. 이들은 김대중, 노무현 정권 때 구좌파와 민족주의를 비판하면서 진보 명망가가 됐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으로 교체되면서 입지가 좁아졌다가 지금 다시 이름을 낼 수 있는 '장터'가 열린 거다. 이제 부활할 수 있겠다 싶어서 말을 많이 하는 것 같다."

또한 한 부소장은 이석기를 비롯해 경기동부를 비난하는 진보진영 인사들의 심리 중 압도적인 부분이 두려움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문제가 공권력에 의해 밖에서 불거진 상황에서 사람들이 NL이나 경기동부의 노선이 맞네, 틀리네 논쟁하는 것은 노선 자체를 논의하기 위한 의도라기보다는 자기 몸을 사리는 것"이라면서 "'나는 그들과 관계없는 착한 진보, 착한 좌파다'라는 얘기를 경기동부 비난하는 것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토끼굴에서 하얀 토끼랑 까만 토끼가 싸우다가 둘이 결판이 안 나자, 조금 불리한 하얀 토끼가 문을 살짝 열어서 여우를 토끼굴로 불러들인 거다. 하얀 토끼는 여우가 까만 토끼를 다 잡아먹으면 토끼굴이 다 자기 것이 될 것이라는 속셈이겠지만, 여우가 토끼굴에 들어오면 까만 토끼, 하얀 토끼 가리겠는가. 다 잡아먹히는 거다."

"진보에 대한 사회적 동의선 크게 후퇴할 것"

한 부소장은 "이후에 진보운동의 큰 후퇴가 올 것"이라면서 이 사건이 진보진영에 가져올 파장에 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밝혔다. 그 나쁜 전조로 그는 임승수씨가 국가정보원에 신고된 사건을 들었다. 임승수씨는 경희대학교에서 교양과목으로 마르크스 자본론을 강의한다. 최근 이 학교의 학생이 "반자본주의 및 반미사상을 갖고 있다"고 임씨를 국정원에 신고했다.

김수남 수원지검 검사장이 26일 경기도 수원지방검찰청 대회의실에서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사건' 혐의에 대한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검찰,'이석기 내란음모혐의' 중간수사 발표 김수남 수원지검 검사장이 26일 경기도 수원지방검찰청 대회의실에서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사건' 혐의에 대한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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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한 부소장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임승수씨 사건을 해프닝으로 끝날 것으로 본다"며 "이유는 이전의 통념에 따르면, 아무리 보수적인 사람들도 '그 정도는 괜찮다'고 용인해주는 사회적 동의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그는 "그런데 그 신고를 대학교 1학년이 했다는 것 자체가 그 사회적 동의선이 깨지기 시작했다는 증거"라고 분석했다.

"이미 우리 사회 진보에 대한 사람들의 용인이나 수용 정도가 엄청 후퇴하고 있다. 일종의 가이드라인이 없어졌다. 보수 언론을 보면 NL이나 경기동부 노선에 대해 논박하지 않는다. '미친 놈'들로 몰고 간다. 그냥 이상한 애들이다. 그 딱지가 경기동부한테만 붙겠나? 앞으로는 진보좌파 모두에게 붙을 거다. 진보는 뭔가 삐뚤어지고 이상한, 비정상적인 애들이 되는 거다. 그런데 이 논리를 누가 앞장서서 만들어냈나. 진보 지식인들이다. 자기들은 합리적이고 건전한 이성을 갖고 있는데, 걔네(경기동부 등)들은 사고가 이상하고 잘못됐다고 말하면, 대중이 자기들을 그들과 구분할 수 있을까? 절대 구별 못한다." 

한 부소장은 "진보 스스로가 진보를 단죄할 칼자루를 지배권력에게 쥐어준 것이 문제"라면서 말을 이었다.

"경기동부가 한국의 운동이나 정치판 전체를 좌지우지할 힘이 있는 것도 아닌데, 국정원이 이석기 의원 한 명 잡는 게 무슨 큰 실익이 있겠나. 운동판 전체를 겁에 질리게 만들고 혼란에 빠뜨려 서로 욕하고 싸우길 바란 거다. 근데 진보진영이 국정원이 원하는 대로 다 해주고 있다. 그게 진짜 문제다. 이미 진보진영이 쪼개졌는데, 이후에 이 사건에 대한 입장차로 싸웠던 사람들이 하나로 뭉칠 수 있을까. 진보진영에게 큰 상처로 남을 것이다."

"현 상황은 NL의 업보"

한 부소장은 이미 운동의 후퇴를 경험한 1990년대 초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했다. 여기에는 1980년대부터 지켜본 NL진영 활동가들에 대한 마음도 들어있다. 그는 "토끼굴의 문을 처음 연 건 지금이 아니라 1990년대 초의 NL이었다"면서 "지금의 상황은 NL의 업보라고 생각한다"고 답답한 심정을 밝혔다.

"일부 운동권이 마르크스주의를 낡은 좌파라고 매도하면서 운동을 떠날 때 NL은 의회주의로 무게중심을 옮겨 민주당과 선거연대 등으로 활로를 찾았다. 그때 NL이 우경화하지 않고 좀 더 강력한 좌파연대를 만들어갔으면 이렇게 당하지는 않았을 거다. NL은 그 덕에 구청장도 되고 국회의원도 되면서 영향력이 커졌는지 모르지만, 그 영향력은 민주당이 준 거지 민중에 의해서 커진 게 아니다. 그렇게 기생적으로 생존을 이어나가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에 탄압이 와도 막을 수 없는 거다. 국정원도 이들이 힘 없는 걸 알기에 더 때리는 거고."

한 부소장은 의회주의의 한계를 강조했다.

"국정원이 공격하는 것도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의회까지 들어왔다는 거 아닌가. 그 때문에 국민, 특히 보수세력이 들고 일어나는 거고. 만약 이들이 의회 밖에서 활동했더라면 정치적 이용 대상이 되지 않았을 거다. 노조를 깨는 것과 같은 정공법을 택했지. NL 내부의 가장 큰 문제 역시 이론과 실천의 괴리다. 조직을 유지하려면 독자적인 노선이 있어야 하는데 실제로는 민주당이 하는 것과 다를 게 없다. 실천이 우경화되니까 조직 단속이 필요해진 거고. 5월 12일에 했다는 모임은 내부 단속용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합법 공간에서 영향력을 확대하자는 게 합리적인 선택일 수도 있는데, 지금 NL은 그 선을 넘어선 걸로 보인다."

그럼에도 한 부소장은 "지금은 연대하고 버텨야 할 때"라고 힘주어 말했다.

"'새움'은 멸종 위기 동물을 보는 듯한 시선을 받으면서도 10년 넘게 마르크스주의를 교육해 왔다. 좌파의 목소리를 대중적으로 확산하는 게 우리 운동의 방향인데, 우리는 어느 정도 각오하고 있다. 이번 사건 이후, 대중 단체에서 우리에게 강연해달라는 요청이 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지금은 운동 전체 영역에서 각자 하던 일을 흔들림 없이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하다. 국민에게 우리 얘기를 해서 동의를 얻고, 진보좌파에 붙은 '비정상'이라는 낙인을 떼는, 말 그대로 저변을 확대하는 작업이 선행돼야 한다. 옳다, 그르다 편 가르기를 할 때가 아니다. 모든 운동세력이 연대해서 국가권력이 단죄하는 모든 운동이 허용돼야 한다고 주장하고, 함께 운동의 폭을 넓혀야 한다."

진보정당 세대교체 해야

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석된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내란예비음모 혐의로 구석된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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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진보정당 운동과 관련해 한 부소장은 "'헌법 밖의 진보를 용납 못한다'는 심상정 의원의 발언은 헌정질서 내에서만 운동이 가능하다는 것으로 전형적인 자유주의 이념이다. 그런 입장이 있을 수 있지만 그걸 진보라고 해서는 안 된다"며 "통합진보당은 물론이고 정의당, 노동당 등 다른 진보정당도 기존에 조직을 운영하던 '얼굴 마담'을 바꾸는 등 세대교체하지 않으면 앞으로 진보정당 운동이 힘들어질 것"으로 내다봤다.

한 부소장이 쓴 <맑스주의 역사강의>의 저자 소개에는 '출판사 직원, 고시학원 강사, 입시학원 강사, 개인 과외, 부동산 중개, 주택 관리, 번역, 연구용역 보조, 대필 등의 일을 해왔다'고 소개돼 있다. 그렇게 생계를 꾸려가면서 그는 10년 넘게 마르크스주의 강의를 해왔다. 최근에는 체 게바라가 쓴 마르크스주의 입문서인 <공부하는 혁명가>를 번역했다. 현재는 인도 사회운동사를 담은 책을 집필중이다.

한 부소장에게 그가 그토록 붙잡고 있는 마르크스주의가 21세기인 지금도 필요한 이유를 물었다.

"자본주의의 위기 때문이다. 현재 가장 큰 모순이 자본주의라는 걸 인정한다면 당연히 역사적으로 봤을 때 자본주의에 대해 가장 체계적이고 논리적이고, 유력했던 반대논리인 마르크스주의를 활용해야 한다. NL이 마르크스주의자들과 손 잡고 좀 더 민중적인 의제를 들고 활동했어야 하는데, 자꾸 의회전술로 빠진 게 안타깝다."

한 부소장은 지난 3개월 동안 100여 곳에서 강연과 세미나를 했다고 한다. 그 정도 대중적 공간을 얻는 데 10년이 넘게 걸렸다. 현재 진보진영의 위기를 극복하는 데는 몇 년이 걸릴까?


태그:#한형식, #이석기, #맑스주의 역사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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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삶엔 이야기가 있다는 믿음으로 삶의 이야기를 찾아 기록하는 기록자. 스키마언어교육연구소 연구원으로 아이들과 즐겁게 책을 읽고 글쓰는 법도 찾고 있다. 제21회 전태일문학상 생활/기록문 부문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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