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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 초가집 양지바른 처마 밑에서 두 소년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어려운 가운데도 소년은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다(1951. 11. 18.).
 시골 초가집 양지바른 처마 밑에서 두 소년이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어려운 가운데도 소년은 해맑은 미소를 짓고 있다(1951. 11. 18.).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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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심

준기는 편지를 다 읽자 언젠가 올 일이 닥친 듯 오히려 담담했다. 결혼 후 그동안 준기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꾹 참고 살았다. 아내는 혼전에 남성편력이 있었다. 하지만 준기는 그런 일을 일체 들추지 않고 혼자 삭이며 지냈다.

처가 쪽 집안에서도, 아내도 자기가 이북 출신이라고 은연중 깔보는 그런 언행이 자주 있었지만 준기는 그 모든 걸 참고 살았다. 하지만 간밤에 준기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아내의 입에서 서슴없이 나온 '빨갱이 그년'이라는 말이었다. 하루가 지난 이튿날에도 준기는 그 말만은 도저히 그대로 삭일 수가 없었다.

준기는 그제야 사람의 정은 마음대로 잘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흔히들 모르는 남녀일지라도 서로 살을 부딪치고 살면 정이 저절로 붙게 마련이라고 했다. 하지만 준기는 그렇게 되지 않는 사람도 있다는 것을 뒤늦게야 깨달았다. 그날 이후 일 주일이 지나도록 아내는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김 교수 부인 장숙자가 집으로 찾아왔다. 아내 장미영은 친정에 머물고 있는데, 준기가 처가로 가서 데려오라고 권했다. 준기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부인이 밤늦도록 가지 않고 안달복달 준기의 답을 듣고 싶어 애원하기에 예의상 생각해 보겠다고만 대답을 한 뒤 돌려보냈다.

다시 한 달이 지났다. 이번에는 김교문 교수 부부가 찾아왔다.

"김 과장 황소 고집은 내 잘 알고 있지만, 부부간 사랑싸움에는 남자가 져야 집안이 편하다. 나도 집에서 늘 지고 산다. 아무소리 말고 내일 처가로 내려가 데리고 온나."
"다 참을 수 있디만 아이 엄마가 아직도 저를 '빨갱이'라고 말한 것만은 기낭(그냥) 넘어가디디 않습네다. 빨갱이라는 말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무서운 말입네다. 교수님, 더 이상 우리 부부 문제에 간섭치 마시라요."
"사람이 화가 나면 무슨 말은 못하나. 자네가 좀 참아야지."
"… 아무리 기래도 빨갱이란 말만은…."

전쟁 중에도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운동장에서 뛰놀고 있다(원산, 1950. 11. 1.).
 전쟁 중에도 초등학교 어린이들이 운동장에서 뛰놀고 있다(원산, 1950. 11. 1.).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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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표

다음 주 월요일, 준기는 대학부속가축병원에 사표를 내고 언저리를 정리한 뒤 아내에게 처음이자 마지막 편지를 썼다.

영옥 모 보시오.
당초부터 우리 부부는 해로할 인연이 아니었나 보오. 깨진 독에 물을 다시 담을 수 없듯이 앞으로 우리가 부부로서 다시 인연을 이어가기는 힘들 것 같소. 지금 내가 가진 전 재산을 모두 당신에게 보내오. 영옥이 양육비에 보태 쓰시오. 이제 나는 아무도 탓하지 않고 그저 모든 걸 내 운명으로 받아들이겠소. 그동안 고생했소. 영옥이 잘 길러 주시오.
단기 1966년 9월 26일
김준기

준기는 자기 이름으로 된 가옥대장 및 등기권리증, 그리고 부동산양도위임장 등 모든 서류를 갖추어 아내에게 보내는 등기편지 속에 넣었다. 대학 회계과에 자기 퇴직금은 처갓집 아내 앞으로 모두 송금토록 부탁했다.

준기는 언저리의 모든 정리를 마친 뒤 가방 하나를 달랑 들고 마지막 인사차 김교문 교수댁을 찾아갔다. 김 교수 부부는 김준기의 초췌한 표정에서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채고는 준기를 붙잡았지만 끝내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구미에서도, 대전에서도 내레 신세 많이 졌습네다. 기동안 두 분이 베풀어주신 은혜에 대한 고마움은 늘 간직하면서 살겠습네다."
"사람 참, 이렇게 매정할 수가."
"……"
"정히 그렇다면 마, 가라. 난 다시 자네 안 볼란다."
"김 과장님, 참말로 매정하고 독하오. 어린 아이를 봐서라도 참고 살아야지요."
"……"

준기는 더 이상 말없이 김 교수집을 물러났다. 준기가 대학부속 가축병원에 그대로 눌러 있자니 거의 날마다 김교문 교수를 보기가 민망했고, 집을 떠난 아내에게 뭔가 보상해 주고 싶었지만 가진 돈도 없었다. 그리고 아내와 살던 집에서 혼자 살기도 싫었고, 직장 내 다른 이들로부터 별거한다는 쑤군거림도 듣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준기는 대전을 떠나기로 마음을 정했다.

파주 봉일천초등학교 어린이들이 미군 장병들에게 감사의 위문공연을 하고 있다.
 파주 봉일천초등학교 어린이들이 미군 장병들에게 감사의 위문공연을 하고 있다.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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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행

김준기는 김교문 교수댁을 나온 뒤 곧 대전역에서 서울행 열차를 탔다. 준기는 서울역에 내렸지만 막상 기다리는 사람도, 갈 곳도 없었다. 뭔가 일은 해야겠지만 무슨 일을 어떻게 시작해야할지, 아무런 대책도 없이 서울에 왔다.

준기는 서울로 오는 동안 열차 안에서 느닷없이 머리에 떠오른 말이 "남대문 지게꾼도 순서가 있다"는 말이었다. 그런데 남대문 지게꾼은 얻어 걸리기가 만만치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준기가 들은 소문에 동대문시장에는 남대문시장보다 이북 출신들이 더 많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서울 역에서 곧장 동대문 행 전차를 탔다. 종로 5가에서 내리자 거기가 바로 동대문시장이라고 했다. 마침 한일극장 앞에 한 지게꾼이 보였다. 준기는 그들에게 말을 건넸다.

"내레 동대문시장 지게꾼이 되고 싶은데 어드러케 하믄 할 수가 있갓수?"

서울 시내 전차가 동대문 정류장에서 손님을 태우고 있다(1952. 10. 2..).
 서울 시내 전차가 동대문 정류장에서 손님을 태우고 있다(1952. 10. 2..).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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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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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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