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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소령에서 다시 길 위에
▲ 지리산 벽소령에서 다시 길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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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목
 장터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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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벽소령에는 아침 안개가 자욱하다. 일찍 일어나 취사장에서 밥을 지어 먹는 사람들도 있고 앞마당 나무 탁자에서 아침을 먹는 사람들도 있다. 일어나자마자 신발을 잃어버렸다고 찾는 이도 있고 버너와 코펠, 스틱을 잃어 버렸다는 사람, 심지어 물통도 없어졌다는 사람도 있다. 몸에 밴 습관이 자기도 모르게 입에 담배를 물고 담뱃불을 붙이다가 직원한테 적발되어 벌금을 물어야 하는 상황에 놓인 사람도 있다. 밤새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나 보다.

간밤엔 깊이 잠이 들어서인지 몸이 개운하다. 아침 공기가 제법 차가워서 바람 잠바를 입고 앉아 있어도 입술이 새파랗게 질릴 정도로 기온이 차다. 배낭을 점검하고 다시 길 위에 선다. 벽소령에서 안개 낀 길을 한참 걷노라니 차츰 안개 걷히고 맑아진다. 숲속 나무들도 빛을 받아 몸속 깊이 빛을 받아들이고 빛은 또 연초록 이파리들을 어루만진다. 빛과 그늘이 만드는 음영이 숲을 더욱 싱그럽게 한다.

지리산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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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샘에 도착한다. 지리산 종주의 묘미 중의 하나는 맑고 깨끗하고 시원한 샘물이 풍부하다는 점이다. 종주 길에 만나는 샘물들은 노고단 대피소와 임걸령 샘물, 연하천 대피소에서 끊임없이 흐르는 물과 선비샘, 세석 대피소, 장터목 대피소 등에 맛난 물들이 많다. 그 중에서도 선비샘이 단연 으뜸이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걷는 길에서 만나는 샘물은 그야말로 사막의 오아시스다. 추수 때에 타는 듯한 갈증을 해소시켜 주는 시원한 얼음물이다. 산행, 특히 종주를 하다 보면 물이 최고로 맛있다는 것을 느낀다. 지리산에는 이토록 끊임없이 샘물을 내고 물 인심이 후하다. 지리산 품속에 파고들면 넉넉하고 안온하다. 그것이 주는 젖줄인 샘물은 하염없고 넉넉하고 후해 언제라도 좋다.

선비샘 가에 앉아 땀을 씻고 며칠 동안 감지 못한 머리에 차가운 물을 끼얹어 땀기를 조금 없애고 나니 조금 시원해졌다. 물병에 물을 채우고 다시 길 위에 선다. 노고단에서 벽소령까지 걷는 길도 멀고 긴 길이지만, 선비샘에서 세석까지의 5km 가량의 구간은 지리산 주능선 구간 중에서 가장 힘든 코스로 불리는 곳이라 꽤 힘든 코스다. 선비샘을 지나가다보면 일곱 개의 바위 봉우리인 칠선봉, 영신봉, 봉우리들을 넘어야 한다. 몇 개의 고개를 넘고 또 넘고 넘다보면 세석대피소에 이른다.

촛대봉으로 가는 길에 내려다 본 세석대피소
 촛대봉으로 가는 길에 내려다 본 세석대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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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또 걸어 자고 일어나 다시 걷고 걷는 종주길이다. 둘째 날인 어제 지리지리하도록 먼 길을 걸으면서 다짐했다. 이제 종주는 그만하자고. 편안하고 여유 있는 여행이나 산행을 하자고. 그런데 오늘 길에서 앉아 쉬다가 만난 78세 된 어르신을 만난 후 마음을 다시 바꾸었다. 그분은 가끔 지리산을 오긴 했지만 종주를 해 보지 않았는데 천왕봉에서 팔십이 넘은 분이 종주를 하는 걸 보고 65세에 정년퇴임한 후로 지금까지 일년에 두 번은 지리산종주를 한다고 했다. 그래 너무 일찍 마음 접으려 했구나 생각하며 마음을 고쳐먹었다.

세석대피소에 도착. 이제 종주 길도 거의 막바지다. 세석대피소에서 장터목대피소까지의 거리가 짧지 않지만 조금은 여유가 생긴다. 간단하게 라면으로 점심을 먹고 휴식을 취한 뒤에 장터목대피소로 향한다. 세석대피소에서 촛대봉으로 올라가는 길은 꽤 가파른 오르막길이라 쉬엄쉬엄 걷는다. 팔월의 뜨거운 햇빛은 찌르듯 쏟아진다. 촛대봉에 도착하니 가슴이 후련하다.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와 땀을 식혀주고 피로를 씻어주는 것 같다. 앞 뒤 옆 사방이 탁 트인 조망이 드러나는 촛대봉 꼭대기에 서서 내려다보니 12km, 약 30만평의 면적을 차지하는 세석고원과 세석대피소가 더욱 아름답다.  팔월의 무르익은 초록에 초원은 싱그럽다.

촛대봉에서 내려다 보다
 촛대봉에서 내려다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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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가 다시 밀려든다. 밀려오고 다시 밀려가기를 반복한다. 올망졸망한 바위군집으로 된 촛대봉에 서면 장쾌한 전망이 드러나 가슴이 후련하다. 연하봉, 제석봉으로 이어진 암릉길이 펼쳐져 있고 먼데 천왕봉까지 조망되어 지척인양 반갑다. 촛대봉에 앉아 넉넉히 쉬어 다시 걷는다. 이제부터는 자주 천왕봉을 일별한다. 이따금 안개가 몰려들기도 했지만 다시 햇살이 환하게 퍼진다.

길가엔 끊임없이 야생화들이 반기고 맑은 날 여름 햇살이 산 능선과 산 주름에도 나뭇가지와 이파리에도 빛과 그늘로 조화를 이룬다. 몇 개의 고개를 넘어 연하봉에 이른다. 잠자리들 무리지어 날고 무리지어 난만하게 피어 흐드러진 야생화들 위에 나비도 앉고 벌도 앉아 부지런히 꿀을 딴다.  한낮의 별밭인 야생화군락들이 마음을 밝혀주고 길고 긴 길을 벗해 주어 피로를 잊는다.

지리산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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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봉을 지나면 지척에 장터목 대피소다. 오래도록 걸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덜어낸 데다 고개를 여러 번 넘고 또 넘으면서 걷지만 여기저기 탁 트인 조망이 가슴 후련하게 해서인지 길은 흥미롭고 마음은 차츰 가벼워져 다시 지리산을 올 때를 손꼽아보는 마음이 된다. 힘들었던 순간들은 어느새 희미해지고 지리산에 있으면서도 지리산이 그리워진다. 이제 장터목이다. 기나 긴 길, 멀고 먼 길을 걸었다.  종주 여정은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힘들었지만 여기까지 왔다. 걷고 자고 또 걷고 자고 걸었다.

내 다리야 고맙다. 내 머리끝부터 발끝가지 몸 성한 것이 새삼 감사하다. 걸을 수 있다는 것은 복되도다. 그것도 지리산 종주라니 말해 무엇 하리. 짧지 않은 먼 길을 하염없이 걸었다. 더 이상은 체력이 남아 있지 않을 것 같은데도 조금 쉬고 나면 다시 걸었고 걸으니 걸어졌다.

천왕봉이 보이고
 천왕봉이 보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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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목대피소
 장터목대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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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하니 어느새 오후 5시 30분. 하루해가 저문다. 장터목 대피소의 오후. 안개가 감싸고 있다. 먼저 온 많은 사람들이 바깥 테라스에 앉아 쉬거나 저녁을 먹고 있어 웅성웅성 활기가 넘친다. 공사를 하느라 주변에는 좀 어수선한 분위기다.

장터목에 어둠이 내리고 별들이 초롱초롱 빛나기 시작한다. 밤하늘의 별들은 바로 이마 위에 있다. 별들의 운행과 별들의 이름들도 비밀들도 잘 모르지만 암호 같고 약속 같기도 한 별들을 보고 있노라니 이렇게 별을 보는 것이 얼마만인가 싶다. 별이 쏟아지는 장터목의 밤...지리산 종주가 다 끝나가는 여유를 가져보는 시간에 보는 밤하늘의 별들은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마 위로 쏟아질 것 같은 별들을 보고 있으니 윤동주의 시 '별 헤는 밤'이 떠오른다.

장터목에서
 장터목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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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터목에서 바라본 구름 기둥
▲ 지리산 장터목에서 바라본 구름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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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을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 속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하나에 추억과
별하나에 사랑과
별하나에 쓸쓸함과
별하나에 동경과
별하나에 시와
별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생략)..."

밤이 깊을수록 별빛은 더욱 또렷하다. 밤 9시에 소등. 별을 가슴에 품고 이제 잠을 청할 시간이다.

산행수첩
2013년 8월 2일(금)아침찬개. 오전 안개 걷힘, 맑음
벽소령대피소(8:00)-선비샘(9:25)-칠선봉(11:35)-영신봉(1,651m,12:55)-세석대피소(1:10)-점심식사 후 출발(2:20)-촛대봉(1,703m,2:50)-연하봉(5:00)-장터목대피소(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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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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