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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대피소 앞에서
▲ 지리산 종주산행 노고단대피소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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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고 또 걷고 지리지리하도록 걷다

둘째 날. 지리산 노고단대피소에서 잠을 깼다. 일찍 밥을 지어 먹고 오전 7시 5분에 출발. 노고단대피소에서 천왕봉까지는 약 25.9km다. 반야봉은 5.9km, 노고단고개까지는 0.4km 거리다. 이제 노고단대피소에서 노고단 고개 가는 길로 접어든다. 아침 안개 자욱하고 습도가 높아 아침부터 후덥지근하다. 길은 젖어 있고 풀잎도 나무들도 인정스레 피어 흐드러진 야생화들도 물기를 머금고 있다.

젖은 잎사귀 사이에 붉게 노랗게 진분홍빛으로 핀 꽃들도 젖어 촉촉하다. 지금 지리산은 야생화들의 천국이다. 밤이면 하늘엔 별바다요 한낮엔 지상에 내려온 별 같은 야생화들의 바다다. 별바다 꽃바다, 별천지 꽃천지다. 걸음 걷는 곳마다 야생화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어 종주길 내내 지루하지 않다.

안개 자욱한 숲길 따라
▲ 지리산 안개 자욱한 숲길 따라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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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고단고개에 도착한다. 오전 9시에 노고단으로 올라가는 문이 열리기에 긴 긴 종주를 하려면 그때가지 기다릴 수 없어 아쉬운 대로 바위 봉우리 앞에서 사진 한 장 찍고 종주 길에 들어선다. 잦은 일기의 변화가 있는 지리산, 비 내린 지 얼마 안 됐는지 길은 젖어 진흙 밭인 곳이 많다. 젖은 숲길은 안개로 자욱하고 고요하다.

안개에 싸인 숲, 나무와 나무 사이에 뿌옇게 흐린 안개 속을 걸으면서 양쪽 길가에 지천으로 핀 야생화들과 일일이 눈 맞춤을 한다. 차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 자주 내 발걸음은 멈춘다. 노고단에서부터 종주 길 끝가지 이 야생화들이 함께 해주었다. 멈춰 설 때마다 가팔랐던 숨결이 잦아들고 거친 호흡과 걸음소리에 들리지 않았던 숲의 고요와 바람이 풀잎을 쓰다듬는 소리가 들리고 느껴진다. 걸음을 멈출 때 비로소 숲과 바람과 안개의 존재를 깊이 인식하고 깊은 고요를 만끽한다.

지리산의 야생화들...
▲ 지리산 종주산행... 지리산의 야생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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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노고단에서부터 벽소령대피소까지 가야 한다. 연하천대피소까지만 해도 상당한 거리지만 대피소예약 인원수용이 더 많아 예약이 비교적 용이한 벽소령을 택해 그것조차 아주 어렵게 예약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노고단대피소에서 벽소령까지는 기나긴 길, 머나 먼 여정이다. 안개 낀 숲길로 계속 이어진다.

이른 아침 숲속 어디선가 들려오는 청아한 새소리가 맑아 귀를 향기롭게 하고 젖은 숲 향기는 코끝을 향기롭게 한다. 안개 자욱한 길 따라 걷고 또 걷는 길. 벽소령대피소까지는 까마득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모든 것이 한 걸음부터라는 것을 등산을 통해 체감하지 않았던가. 한 걸음씩 걷고 또 걷다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달한다. 까마득하게 멀고멀어 보여도 한 걸음이 무서운 거다.

지리산 종주 길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힘들기는 마찬가지다. 낮은 산이든 높은 산이든 산은 산이고 그만큼의 힘듦이 있다. 힘들이지 않고 땀 흘리지 않고 한 걸음에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는 길은 없다. 한 걸음씩 인내하며 기다리며 내디딜 뿐.

노고단에서 임걸령까지는 부드럽고 순탄한 숲길로 이어진다. 참나무 숲 소로길로 이어진 이 길은 큰 변화나 변동 없이 완만한 숲길로 한동안 계속 걷는다. '노고단에서 임걸령을 향해 화살을 쏘고 말을 타고 달렸더니 말이 더 빨리 도착했다'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노고단에서 임걸령까지 가는 길은 순탄하다.

지리지리하도록 걷는 종주길에 야생화들 벗 되어 주고
▲ 지리산 종주산행 지리지리하도록 걷는 종주길에 야생화들 벗 되어 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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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 임걸령에 도착했다. 임걸령의 시원한 약수물을 마시고 물병에 시원한 물을 가득가득 채운 후 땀을 식히며 앉았다. 숲속 공터에 자리 잡은 임걸령 샘물은 사시사철 맑은 물줄기를 뿜어내고 끊이질 않고 물맛도 좋다.

지리산에는 물이 풍부해 좋다. 샘 중에 가장 맛있는 물이라면 선비샘과 임걸령 샘물이다. 선비샘이 첫째요 그 다음이 임걸령 샘물이라 할 수 있으리라. 임걸령 샘물에서 목을 축이고 땀을 식히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걷는다. 임걸령까지는 완만하고 순탄한 길이었지만 여기서부터 노루목까지는 계속해서 오르막 경사길이다. 몸은 땀으로 젖었다.

노루목에 도착하니 오전 10시. 임걸령에서 노루목까지 1시간 소요되었다. 노루목에서는 반야봉으로 올라가는 길이 있고 곧장 종주 길로 이어진 길이 나 있다. 사람들은 꽤 힘든지 여기서 자리를 깔고 누웠거나 앉아서 일어설 줄을 모른다. 땀으로 샤워라도 한 것처럼 땀으로 젖은 몸을 잠시 식힌 뒤 오늘도 반야봉은 옆에 두고 주 종주능선 길로 향한다. 노루목삼거리에서 삼도봉까지는 약 45분 걸린다. 삼도봉은 경남, 전남, 전북 3도 경계를 이룬 지점이라 이름 붙은 곳이다. 삼도봉에선 쉬어가기도 좋다.

흐드러지게 핀 야생화들... 운무가 깔리고
▲ 지리산 흐드러지게 핀 야생화들... 운무가 깔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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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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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이 이어진 길에서 길로 이어 걸으며 새삼 지리산 길이 길고 긴 길임을 다시 한 번 절감한다. 화재재에 도착한다. 한참을 걸어왔건만 화개재에서 연하천대피소까지는 4.2km 씩이나 남았다. 아으~ 화개재에서 토끼봉까지 진이 다 빠지도록 걷는 오르막 경사길이다. 토끼봉에서 평지길 조금 이어지다 다시 오름길, 가도 가도 끝도 보이지 않고 오르락내리락 몇 개의 산봉우리를 넘고 또 넘는다. 지리지리하도록 걷고 또 걷는다. 이따금 보이는 등산인들 모습도 긴 여정에 지친표정이 역력하다.

걷고 또 걸어 연하천대피소에 도착했다. 참 긴 여정이었다. 지치고 또 지쳐도 잠깐 잠깐 쉬어 다시 얼어서 걸었고 걷다보니 걸어졌다. 가야 하기에 쉬어 힘을 얻고 다시 걸을 수 있다. 아무리 먼 길이라도 단 번에 닿을 수 없고 쉬지 않으면 더 힘내서 걸을 수 없다. 걷고 잠시 쉬고 다시 걷고 또 걸어 도착했다. 무작정 걷는 것이 아니라 쉬어 걷는 것 또한 중요하다. 쉬어야 잘 걷는다. 

지리산
 지리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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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지 않으면 닿지 않고 걸으면 한 걸음씩 걸으면 결국엔 당도하는구나 그렇구나. 이 평범한 진리를 한 걸음에서 배우는구나. 꿈이 있다면 꿈만 꾸고 상상의 집만 지을 것이 아니라 한 걸음씩 작은 것 하나부터 시작하고 조금씩이라도 한걸음 내딛듯 그렇게 작은 성취들을 이루어 가야 하는 거다. 무슨 일이든지. 옷을 기워야 한다면 바늘에 실을 먼저 꿰어야 하고,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다. 많은 구슬이 있어도 실에 꿰지 않으면 아무것도 되지 않는 법이다. 텃밭을 가꾸려면 먼저 땅을 갈아엎고 옥토를 만들고 씨앗을 심어야 한다.

혹자는 연하천을 지리산 주능선 종주길 그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숲속의 별천지라고 표현했다. 해발 1,500m이상의 고산지대답지 않게 맑고 시원한 물이 작은 내를 이루며 흐르고 주위에는 온통 아름드리 침엽수들이 들어서 있어 그 분위기가 한없이 고요하고 포근하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리산의 산장들은 대부분 시야가 탁 트인 능선 상에 위치해 있는데 연하천대피소만은 보기 드물게 능선 한편의 숲속에 자리해 있다.

형제봉이 있는 길을 지나며
▲ 지리산 형제봉이 있는 길을 지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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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하천에 거의 다 왔다 싶을 때부터 빗방울이 성글게 떨어지더니 연하천대피소에 막 도착하자 천둥이 울고 소낙비가 퍼붓는다. 얼른 취사장으로 들어선다. 복닥복닥 사람들로 붐비는 취사장에서 라면을 끓여 먹었다. 산에서 먹는 라면 맛이 그야말로 꿀맛이다. 라면을 먹고 나자 다행히 빗줄기도 차츰 약해지더니 뚝 그친다. 생각 같아서는 힘에 겹도록 지치도록 걸어온 걸음이라 여기서 퍼질러 앉고 싶지만 벽소령대피소까지 가야 한다.

벽소령산장에서 시를 핥다

다시 힘을 내서 길 위에 선다. 벽소령대피소까지 가는 길에 빗방울이 떨어지는가 싶으면 안개가 자욱하고 오락가락한다. 습도가 높아 몸은 땀으로 흠뻑 젖은 지 오래다. 벽소령 가는 길에 국립공원직원이 예약하지 않고 올라온 사람들을 통제하고 강제하산 조치를 하고 있었다. 우리에게 예약했냐고 묻는 직원한테 벽소령에 예약된 상태라고 말하고 명단을 확인한 후 강제하산 당하는 사람들에게 뭐라 위로할 말이 없어 조심해서 내려가시라고 인사하고 열심히 걷는다.

벽소령대피소에 도착... 안개에 싸여 있다
▲ 지리산 벽소령대피소에 도착... 안개에 싸여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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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수록 짙어지는 안개,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다. 인적이 드문 형제봉 아래로 지나는데 오싹하기까지 해 찬송을 높이 불러가며 걸어간다. 예전 같으면 함께 걷는 사람들이 많아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었다. 한참을 찬송을 부르며 인적 드문 짙은 안개 속을 더듬어 가다보니 앞에 가는 사람들이 있어 반갑다. 휴~. 고개 넘어서니 벽소령이다.

벽소령대피소 주변은 비와 안개로 축축하게 젖어있다. 방 배정을 받고 젖은 옷을 갈아입고 비가 오는 날이라 유독 화장실 냄새가 진동하는 나무계단 길을 걸어 내려가 땀으로 젖은 몸 그대로 취사장에서 저녁을 지어 먹고 긴 숨을 내쉰다. 긴 긴 하루였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이 걸었던 하루. 벽소령대피소에서 여장을 풀었다.

벽소령에서 시를 핥다
▲ 지리산... 벽소령에서 시를 핥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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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여유가 생긴 저녁 시간. 산장 실내에 잡지꽂이에 꽂혀 있는 시집들을 들춰본다. 요즘 들어 책을 제대로 읽지 못해 활자갈증이 심한 상태라 여기서 만난 시집들이 반갑기 그지없다. 집에서 짐을 꾸릴 때 시집한권을 배낭에 넣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짐무게 때문에 다시 내려놓고 왔는데 마침 시집이 있어 시선이 꽂힌 것이다.

산장 거실에 카메라 충전을 시켜놓고 충전이 다 되기를 기다리는 동안 시집을 펼쳐놓고 시를 핥듯이 눈으로 읽고 입으로 읽는다. 지리산 산장에서 시를 읽는 시간, 행복하여라. 내가 좋아하는 시들도 더러 있어 반갑다. 김수영의 <풀>, 유안진의 <멀리 있기>, 황지우의 <너를 기다리는 동안>, 윤동주의 <별 헤는 밤> 등.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 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김수영, <풀>)

이런 시도 있다.

벌새는 1초에 90번이나/ 제 몸을 쳐서/ 공중에 부동자세로 서고/ 파도는 하루에 70만 번이나/ 제 몸을 쳐서 소리를 낸다// 나는 하루에 몇 번이나/ 내 몸을 쳐서 시를 쓰나(<벌새가 사는 법> 천양희)

꽤 오래 전에 좋아해 즐겨 외웠던 시, 유안진의 <멀리 있기>도 있구나.

멀어서 나를/ 꽃이 되게 하는 이여/ 향기로 나는 다가갈 뿐입니다// 멀어서 나를/ 별이 되게 하는 이여/ 눈물 괸 눈짓으로 반짝일 뿐입니다// 멀어서 슬프고/ 슬퍼서 흠도 티도 없는/ 사랑이여// 죽기가지 나/ 향기 높은 꽃이게 하여요/ 죽어서도 나/ 빛나는 별이게 하여요

정확하게 밤9시가 되자 소등되고, 어떻게 잠이 들었는지 모르게 곤히 잠이 들었다. 잠자리에 누워 잠깐 뒤척이다가 잠이 들었고 꿈도 없이 깊고 깊은 잠속으로 빠져 새벽 4시에야 일어났다. 어제 땀으로 젖은 채 온종일 걷고 걸어 지나치게 걸었던 하루였기에 꿈도 없이 죽음처럼 깊은 잠을 잘 수 있었나보다. 혹시 불면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지리산으로 오시라. 불면증은 깡그리 사라지고 없어지리니.

지리산 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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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명화

덧붙이는 글 | 산행수첩
2013년 8월 1일(목): 10시간 10분 걷다: 아침 안개, 오전 맑음, 오후 2시부터 비.
*노고단대피소(7:05)-노고단대피소(7:20)-돼지령(1,390m, 8:30)-피아골삼거리(8:45)-임걸령(약수터 1,320m, 09:00)-노루목(반야봉입구 10:00)-삼도봉(1,499m, 10:45)-화개재(11:40)-토끼봉(1,534m)-연하천대피소(2:15)-점심식사 후 연하천대피소에서 출발(3:05)-삼거리(음정 3:20)-형제봉(4:25)-벽소령대피소(5:15)



태그:#지리산종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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