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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제7함대 항공모함이 전투기 77대를 탑재한 채 동해를 순시하고 있다(1951. 7. 1.).
 미 제7함대 항공모함이 전투기 77대를 탑재한 채 동해를 순시하고 있다(1951. 7. 1.).
ⓒ NARA,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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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을 떠나요

준기와 순희가 금오산 아홉산 골짜기로 피신한 지 보름이 지난 9월 하순 어느 날 밤이었다.

"엊그제부터 유학산 쪽에서 포격소리가 잦아진 걸 보니까 아마도 다부동전투가 끝난 모양이우."
"우리는 양쪽 군대에게도 쫓기는 몸이에요. 여기도 인민군 패잔병을 소탕한다고 곧 국방군이나 경찰들이 올라올지 몰라요. 그러면 영감님 내외분이 우리 때문에 화를 입을 거예요. 우리 이제 그만 이곳을 떠나요. 그게 두 분 은혜에 보답하는 거예요."
"기럽세다. 나도 이러다간 아두 벙어리가 될 것 같습네다."
"그러게요. 근데 벙어리 연기력이 대단해요."

"아, 갑갑해 미티갓소. 우리 오마니가 '전쟁터에서 입이 바우터럼 무거워야 살아올 수 있다'는 말을 하루에두 멧 번씩 곱씹으면 다딤햇디요."
"잘 했어요. 나랑 이 전선을 벗어날 때까지는 계속 입을 다무세요."
"알가시오."

준기는 순희의 말에 동의했다. 이튿날 아침, 그들은 금오산 아홉산골짜기를 떠나기로 했다. 그날 밤 두 사람은 계곡에 가 몸을 닦고 온 뒤 임시거처에서 꼭 껴안았다. 그런 뒤 새벽녘까지 서로의 몸에 탐닉했다. 그새 그들은 상대의 몸을 받아들이는데 상당히 익숙해져 있었다.

"내레 머릿속에 누이의 몸 냄새가 꽉 배어 있수."
"나도 그래요."
"우리 전쟁이 끝나 다시 만나믄 신랑각시가 되는 거우."
"나도 그럴 날을 기다려요."

순희는 준기 품에 얼굴을 묻으며 말했다.

금오산 도선굴에서 바라본 낙동강
 금오산 도선굴에서 바라본 낙동강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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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

이튿날 준기와 순희는 아침상을 치운 뒤 떠날 채비를 한 다음 해평 영감 내외에게 말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그동안 잘 지냈습니다. 이제 그만 산 아래로 내려가렵니다."
"무신 소리고? 와, 우리가 뭘 서운케 했나?"

해평 할머니가 화들짝 놀란 눈으로 물었다.

"그게 아닙니다. 아주 마음 편케 잘 지냈습니다. 이제 다부동전투가 어지간히 끝난 모양입니다."
"바로 가지 말고 좀 더 지내다가 가라."
"아닙니다. 저희들이 여기 있으면 할아버지 할머니가 다칠지 모릅니다."
"와?"
"……"
"이렇게 갑자기 떠나보내 우야노(어쩌나)."
"할아버지 할머니, 전쟁이 끝나고 남북이 통일될 때까지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우리가 그때까지 살지는 모르겠다만. 아무튼 잘 가라."

야은 길재 선생을 기리는 채미정으로 금오산 들머리에 있다.
 야은 길재 선생을 기리는 채미정으로 금오산 들머리에 있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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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한 자루

할머니는 방안으로 들어가 자루에다 쌀을 한 자루 담아왔다.

"피난 갈 때는 곡식이 제일이다."

그새 해평 영감은 짚으로 새끼를 꼬아 멜빵을 만들었다.

"섭섭해 우야노. 내 절마하고는(저 놈과는) 그새 정이 마이 들었는데…. 벙어리들은 말 몬 하는 대신에 눈치 하나는 빠르다고 했는데, 참말로 저 놈아는 정말 그렇더라. 마, 우리와 당분간 여서 함께 살았으면 좋겠다."
"……"

준기는 그 말에 고개를 흔들며 두 손을 모았다.

"할아버지, 할머니 주신 양식 아주 요긴하게 잘 먹겠습네다."
"조심해 가라."
"할아버지, 김천 쪽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야 빠릅니까?"
"지금은 난리 중이니까 차도 없을 끼고, 걸어가려면 길은 험하지만 금오산 뒤쪽으로 가면 더 가찹다(가깝다). 너들이 처음 왔던 길로 내려가지 말고, 그 반대 편인 금오산 뒤로 바로 내려가면 수점마을이 나오고, 계속 서쪽으로 가면 운곡리가 나올 끼다. 거기가면 김천으로 가는 신작로가 나온다. 그 길 따라 곧장 가면 김천이 나온다."
"네, 잘 알았습니다."

준기와 순희는 고개 숙여 깊이 두 번 세 번 절을 드리고 올 때와는 반대로 집 뒤 계곡 길로 떠났다.

산신령님

"내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걔들은 인민군 부대에서 도망친 인민군 같더구먼."
"내도 그래 짐작은 했지."
"어째 본께 남매 같기도 하고, 아인 거 같기도 하고."
"그래도 둘 다 상스럽지는 않더구만. 근데 내 말을 안 했지만 그 동생이라는 사내 녀석 벙어리가 아닌 것 같더라. 어느 날 밤에 내 통시(변소)에 가는 데 걔들이 쓰는  헛간에서 서로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리더라."

"임자도 알고 있었구먼. 내도 그 눈치는 챘지. 우야든동(어쨌든) 지(제) 발로 이 골짝을 탈 없이 떠났으니 우리도, 저들도 다행이지. 누가 뭘 물어도 임자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입 닫고 있어."
"내도 그만한 것은 아요. 서로 좋케 만나 좋케 헤어지는 게 혹 다음 만날 때도 좋지. 하마, 그라고 말고. 그래, 영감 눈도 귀도 아주 다 밝네."
"내가 그걸 더 이상 밝혀 뭘 할 것이며, 아, 저들도 살겠다고 일부러 벙어리 짓을 하는 데 그걸 까발기면 한 지붕 아래 못 살지."
"맞소. 우리 영감 그새 산신령님 다 됐네. 마, 이 참에 거적 피고 앉으소. 영감한테 금오산 산령님이 내렸다고 소문내믄 복채 들고 꾸역꾸역 마이 찾아올 꺼구먼."

"마, 시끄럽다. 난 할마이 하고 조용히 이래 사는 게 더 좋다. 산산령이 되면 사람이 아니라 할마이하고 한 번 하도 몬 하잖아. 나는 그저 산골사람으로 이래 조용히 사는 게 좋다. 마, 아무도 없는데 우리 오랜만에 함 하자."
"와이카코. 영감 참 얄궂데이."
"난 요새도 아침마다 불끈불끈 선다."
"영감, 산에 댕기며 몸에 좋다카는 건 혼자 다 먹는 모양이네."
"아 그럼, 이 재미도 없으면 이 산중에 무신 재미로 사노. 나중에 내 죽은 뒤 서럽게 울지 말고 영감 살아 있을 때 마이 섬기라."

해평 영감이 할머니 손을 끌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만 노소. 내 들어가꾸먼."
"거저 마누라는 젊으나 늙으나 앙탈할 때가 이뿌지."

잠시 후 문밖으로 해평 영감 할머니의 소곤거리는 났다.

"할마이 좋나?"
"아이고, 남세스러워라."
"이 산중에 누가 있다고…."
"아이구 주책도. 영감 고추는 아직도 맥아리가 있다."
"그래? 칠십에도 생남한타카더라."

약목 댁 막둥이 이야기

"아이구매 언성스러워라. 그라믄 큰일난데이. 아랫구미 상모동 약목 댁은 오랫만에 술 한 하고 마구잡이로 덤비는 영감 고추 맛을 본 기 제대로 걸려 그만 시집간 딸하고 함께 배가 불러 오더라 카대. 쪼매하고 얌전한데다 반가집 딸로 몹시 깐깐한 약목 댁은 동네 사람들과 사우(사위)보기 챙피하고 남세스러워 뱃속의 그 아이를 뗄라고 빌 짓을 다해도 안 떨어지더라 카대. 그래서 그 아이를 몰래 낳은 뒤 부석(부엌)에 버릴려고 하는데 그 갓난애가 빠꼼한 눈으로 저 어마이를 빤히 쳐다보는데 그 눈빛이 어떻게도 광채가 나는지 약목 댁이가 그만 아무 소리 않고 그 늦둥이를 키웠다고 카대. 친정 묘답 여덟마지기로 칠 남매를 키웠으까 막둥이는 제대로 얻어 먹기나 했겠나."
"마, 그래 큰 아가 깡다구도 셀끼고, 나중에 뭘해도 한자리 야무지게 할 끼다. 우리도 손자 같은 아들이나 손녀 같은 딸 하나 낳아보자."
"시끄럽소. 이젠 틀렸소. 내 나이가 맻인데…이젠 염감 양기 받아봐야 헛일이오. 그나저나 불쌍한 걔덜, 시월(세월) 잘못 만나 생고생 한데이."
"마, 지금쯤은 금오산 다 내려갔을 꺼구먼."
"우예든동 저 부모한테 잘 돌아갔으믄 좋겠다."
"내 보기에는 둘 다 디기 야무지더라. 가시나는 절에 가서 새우젖도 얻어먹을 게고, 머스마는 사막에서도 우물을 팔 녀석이더라. 아마도 걔들은 저거 집으로 꼭 돌아갈 끼다."

고려 이후 임진왜란 등 왜구들이 침략할 때마다 금오산 일대 사람들이 피난했다는 금오산성이다.
▲ 금오산성 고려 이후 임진왜란 등 왜구들이 침략할 때마다 금오산 일대 사람들이 피난했다는 금오산성이다.
ⓒ 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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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들과 답사 길에 직접 촬영한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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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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