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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차와 아이를 업은 노인(춘천, 1951. 4. 4.).
 전차와 아이를 업은 노인(춘천, 1951. 4. 4.).
ⓒ N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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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반도주

구미 형곡동 일대에 땅거미가 안개처럼 내리고 있었다. 그제야 준기와 순희는 잠에서 깨어났다. 그들은 화들짝 놀라 급히 옷을 챙겨 입은 뒤 출발에앞서 윗목에 남겨둔 밥을 챙겨 먹었다. 그리고 행랑채 방안을 깨끗이 치운 뒤 들여놓은 신발을 신고 끈을 바짝 조였다. 그러는 동안 어둠이 더욱 짙어갔다. 야반도주하기에는 안성맞춤 시간이었다.

"날래 갑세다."
"네, 그래요."

그들은 형곡동 마을을 벗어나 경부선 철로로 갔다. 마침 철둑 아래에 좁은 길이 있었다. 그들은 하늘의 별자리로 북녘을 가늠한 뒤 준기가 앞서고 순희가 뒤따르며 살금살금 괭이처럼 걸었다. 그 길을 10여 분 걷자 철교가 나오고, 그 아래는 시내였다. 금오산 계곡의 물이 흘러 내려오는 금오천이었다. 그들은 징검다리로 금오천 시내를 건넜다.

곧 구미 시가지가 나왔다. 그 무렵 구미는 면사무소가 있는 자그마한 촌락이었지만 전란으로 거지반 파괴되어 매우 을씨년스러웠다. 다행히 마을과 거리에는 인적이 없었다. 사실 밤길에 가장 무서운 것은 짐승보다 사람이었다.

구미 시가지를 20여 분 떠듬떠듬 지나자 둑이 나오고 다시 시내가 나왔다. 조금 전보다 큰 시내인 데도 징검다리가 없었다. 준기와 순희는 시냇가에서 신발을 벗어들고 둘이 손을 잡은 채 건넜다. 밤 시냇물이 차고 아주 시원했다. 시내를 다 건너는 지점에서 순희는 시냇물에 엎드려 얼굴을 씻었다. 준기도 따라 손을 씼었다.

"시냇물이 아주 시원해요."
"물맛도 돟구만요."
"하늘 좀 보셔요. 별이 아주 찬란하네요."
"기렇군요."

밤길

그들은 시냇가 모래톱에 앉아 신발을 신고 일어섰다. 다시 철길과 나란히 난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거기서부터 길이 넓어 두 사람은 나란히 걸었다. 사실 밤길을 걷는 데는 앞보다 뒤가 무서웠다.

초저녁이라 하현달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들은 밤하늘의 별빛으로 어슴푸레 짐작되는 길을 타박타박 걸어갔다. 차차 밤길에 익어가자 두려운 마음이 한결 사라졌다. 들판에서는 풀벌레들의 소리가 요란하고 이따금 반딧불이 앞길을 밝혔다.

"무섭디요?"
"아녜요. 준기 동생이 옆에 있잖아요."
"앞으로 이 길이 얼마나 순탄할디?"
"설사 위기가 온대도 우리 침착합시다."
"그럽세다. 네로부터 호랑이한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고 했디요."
"그럼요."

검문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걸었다. 야트막한 고갯길이었다. 바짝 긴장하여 걷는데 갑자기 앞에서 군인이 총을 겨누며 불쑥 나타났다.

"정지! 손들 엇!"

두 사람이 흠칫 놀라며 손을 번쩍 들었다. 한 군인은 계속 총을 겨누고 다른 한 군인이 앞을 막았다.

"이 밤중에 어딜 가시오."
"우리 집에 가요."

순희가 앞장서며 말했다. 탈출 이후 매번 준기는 평안도 말씨 때문에 뒤로 처졌다.

"동무들 집이 어디오?"
"서울이에요."
"뭐, 서울?"
"네, 그래요."
"여기서 서울이 어딘데 이 밤중에 걸어간다는 말이오."
"열차도 다니지 않고, 자동차도 다니지 않으니 걸어갈 수밖에요."
"이 동무들, 정신이 있나? 근데 여기는 어찌 왔소?"
"피난 왔어요."

"피난? 한강다리도 끊어졌는데도…. 서울에서 예까지 피난 왔다면 동무들은 반동 아니면 우리 인민해방군 도망병이로구만."
"아니에요."
"좋수. 아무튼 동무들은 전투지역에 내려진 야간통행 금지조치도 모르오?"
"미처 몰랐습니다."

다부동 왜관전투에서 전사한 인민군 유해들(칠곡군 왜관읍 금무봉, 1951. 9. 21.).
 다부동 왜관전투에서 전사한 인민군 유해들(칠곡군 왜관읍 금무봉, 1951. 9. 21.).
ⓒ 한 재미동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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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포

"안 돼요. 이 밤중에 다니는 사람은 무조건 체포요. 자세한 사정은 본부에 가서 말하시오."
"우린 집으로 가야해요. 제발 놓아주세요."
"메라구? 이 동무들, 덩신 나가서야."

총을 겨누던 다른 초병이 총구로 준기와 순희를 초소 옆 간이막사로 몰았다. 간이막사에는 석유등불이 희미했다.

"여기 얌전히 있다가 본부에 가서 조사를 받으시우. 허튼 짓하믄 야간 통행 탈주범으로 즉각 총살할 거야. 알가서?"
"……."

순희와 준기는 대답 대신 머리를 끄덕였다. 간이막사 근무자가 포승줄로 두 사람을 묶은 뒤 마루에 앉혔다.

"새벽녘에 본부에서 호송차가 올 거니 잠다코(잠자코) 이서라야."
"알겠습니다."

준기와 순희에게는 잠깐 새 마른하늘에 벼락같은 일이 벌어졌다. 하지만 그들은 이미 각오하고 있었던 듯 차분하고 담담했다. 곧 먼 남쪽에서 콩을 볶는 듯한 총소리가 들려왔다. 한밤중이라 칠곡 다부동 유학산에서 나는 총소리가 십여 킬로미터 떨어진 구미 북쪽 부곡동 마을까지도 크게 들렸다.

(*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덧붙이는 글 | 여기에 실린 사진은 대부분 필자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수집한 것과 애독자께서 제공해 준 것입니다. 본문과 사진이미지가 다를 경우 한국전쟁의 한 자료사진으로 봐주십시오.



태그:#어떤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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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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