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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바위는 원암마을 장라산 기슭에 있다. 1975년 문선명이 옛 암각을 헐고 다시 지어 '문암각'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문바위는 원암마을 장라산 기슭에 있다. 1975년 문선명이 옛 암각을 헐고 다시 지어 '문암각'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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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기사는 수더분했다. 나는 택시 안에서도 어디로 가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고 문득 지도를 보고 가장 가까이 있는 '문바위'로 가자고 했다. 지도에는 문바위 아래로 푸른 지석강이 흐르고 있었고 강변에 '안성현 선생 노래비'라고 적힌 자그마한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기사와 몇 번 의논한 끝에 안성현 선생 노래비를 들러 남평향교까지 가기로 했다.

남평 문씨의 탄생설화가 깃든 '문바위'

문바위(전남민속자료 제32호)는 '원적골'이라고 불리는 원암마을 안쪽 골목길 끝 장라산 기슭에 있었다. 처음엔 무슨 명문을 새긴 바위라 문바위라 이름 붙여진 줄 알았는데 남평 문씨의 시조 문다성의 탄생설화와 관련된 바위였다.

문다성은 신라 자비왕 때의 사람으로 전해진다. 전설에 따르면 옛날 남평 고을 원님이  이 바위 아래 장자연이라는 연못을 지나는데, 바위 위로 오색구름이 감돌면서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를 이상히 여겨 사다리로 바위 위에 올랐더니 돌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상자를 열어 보았더니 그 안에는 갓난아기가 들어 있어 거두어 길렀다. 세월이 흘러 아이가 다섯 살이 되자 글의 이치를 절로 깨달아서 글에 능하다 하여 성을 '문'으로 짓고, 사물의 이치를 잘 깨닫는다 하여 '다성'이라 이름 지었다.

아기가 있던 바위를 '문암'이라 이름 붙이고 이 아기를 문씨의 시조로 삼았다. 비록 전설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진실성이 뒷받침된 대표적인 씨족설화라 할 수 있는 이 이야기는 1731년(영조 21)에 쓰인 남평 문씨 창간보인 <신해보>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호남읍지>에는 기록되어 있다.

문바위는 남평 문씨의 시조 문다성의 탄생설화와 관련된 바위이다.
 문바위는 남평 문씨의 시조 문다성의 탄생설화와 관련된 바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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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바위는 산의 경사면에 있어 앞에서 보면 높이가 6m, 폭이 5m나 될 정도로 거대하지만, 둔덕과 연결된 뒤에서는 1m 정도로 보인다. 문씨들은 이 바위에서 문씨의 시조인 문다성이 태어났다고 해서 1851년에 문악연이 높이 1m 가량의 비석에 '문암'이라 새겨 바위 위에 세웠고, 1928년 문락홍이 중심이 되어 문암을 둘러싼 암각을 지었다고 한다. 지금의 전각은 1975년 문선명이 옛 암각을 헐고 다시 지어 바위를 둘러싸고 '문암각'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지석강변의 솔숲
 지석강변의 솔숲
ⓒ 김종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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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강, 디들 처녀의 슬픈 노래

지석강에 도착하니 말 그대로 유원지였다. 강둑은 길게 늘어선 차량들로 이미 만원이었고, 강변을 따라 우거진 솔숲은 더위를 피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몇 년 전부터 여름이 오면 이렇게 북적대요. 광주와 가까운 곳에 이만한 곳도 없으니게."

지석강변에 있는 '드들강 유래비'
 지석강변에 있는 '드들강 유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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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둘러보고 오라며 기사는 시동을 껐다. 입구에 서 있는 '드들강 유래비'가 장하다. 이곳에선 지석강을 드들강이라 부른다. 지석강(지석천)은 총 길이 53.5km로 화순 이양면에서 발원하여 능주면을 지나면서 충신천이라 불리고, 서쪽으로 방향을 틀어 화순천과 합류했다가 남평에 이르러 대초천과 합류하여 영산강으로 흘러든다.

그중 남평읍과 능주면 사이의 약 4km 정도를 이 지방에선 '드들강'이라고 하는데 그 이름에는 가슴 아픈 얘기가 전해진다. 고려 말엽 이곳 마을 주민들이 천신만고 끝에 지석강에 보를 쌓았으나 홍수로 파손되어 실의에 빠졌을 때 당시 고을 수령의 꿈에 백발도사가 나타나 마음이 곱고 효성이 지극한 숫처녀를 제물로 수장하여 보를 쌓으면 무너질 일이 없을 것이라 했다. 이에 숫처녀인 '디들'을 제물로 묻고 나서 무사히 보를 쌓았다고 한다. 그 뒤 '디들'이 '드들'로 음이 변하여 드들강으로 불렸다고 한다. 지금도 비가 오거나 강물이 넘칠 때에는 애처로운 디들 처녀의 슬픈 곡조가 들린다고 한다.

지석강에 쌓은 보에선 그 옛날 디들 처녀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물놀이하는 아이들로 가득하다. 지석강은 여름이면 물놀이 인파로 붐비는 곳이다.
 지석강에 쌓은 보에선 그 옛날 디들 처녀의 슬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물놀이하는 아이들로 가득하다. 지석강은 여름이면 물놀이 인파로 붐비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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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바로 여기였네!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 김소월 시, 안성현 곡

유난히 호소력이 짙은 정한적인 민요조의 이 서정시, 지은이는 익히 알려진 바와 같이 김소월이다. 1922년 개벽 1월호에 발표했다가 1925년 시집 <진달래꽃>에 수록됐다. 그러나 시인 김소월은 평안북도 정주의 바닷가 마을에서 태어났으니 '금모래 반짝이는 강변 뜰'과 '뒷문 밖 갈잎의 노래'는 일종의 꿈이자 갈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다 이 시가 안성현이라는 작곡가를 만나 이곳 나주 지석강에서 노래가 되었다. 소월이 갈망했던 금모래와 갈잎이 노래하는 노래비가 이곳에 남은 것이다. 안성현은 누구인가. 안성현은 박기동 시인의 '부용산'에 곡을 부쳐 불멸의 애가를 남긴 작곡가다.

지석강변에 있는 안성현 선생 노래비
 지석강변에 있는 안성현 선생 노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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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노래비가 생긴 것은 2009년, 안성현 선생의 고향인 남평읍 지석강 솔밭 백사장에 노래비를 세웠다. 동신대 김왕현 교수가 조각을 했고 시비와 주민 모금 등 3천만 원을 들여 제작했다고 한다.

유원지로 변한 지석강, 그래도 강변 풍경은 정겹다. 보 위로 흘러내리는 물살을 걷는 이, 낚시대를 드리운 이, 족대로 물고기를 잡는 부자. 물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 아이를 등에 업고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낙네, 나무 그늘에서 느긋하게 한낮을 즐기는 이들… 요즈음 좀처럼 보기 드문 풍경이 이곳에선 타임슬립이 되어 나타난다.

지석강엔 아직도 물고기를 잡는 소박한 옛 풍경이 남아 있다.
 지석강엔 아직도 물고기를 잡는 소박한 옛 풍경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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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강엔 아직도 물고기를 잡는 소박한 옛 풍경이 남아 있다.
 지석강엔 아직도 물고기를 잡는 소박한 옛 풍경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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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의 물빛 또한 얼마나 맑고 고왔으면 마을이 '쪽돌'이란 이름을 얻었을까. 드들강, 이곳에 서니 숲과 금모래, 갈잎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겠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

지석강엔 아직도 우리가 그리워하는 그 무엇이 남아 있다.
 지석강엔 아직도 우리가 그리워하는 그 무엇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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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석강의 서정
 지석강의 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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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블로그 '김천령의 바람흔적'과 코레일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태그:#문바위, #지석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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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의 미식가이자 인문여행자. 여행 에세이 <지리산 암자 기행>, <남도여행법> 등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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