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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20번지 운주사에 동이 틀무렵 경내를 감싸고 있는 안개는 신비스럽게 한다.
 전남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 20번지 운주사에 동이 틀무렵 경내를 감싸고 있는 안개는 신비스럽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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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4일 이른 새벽 화순 운주사로 향했다. 동이 트기 전 어둠이 깔린 운주사를 보고 싶어서다. 절터 바로 옆에 나주호가 있어서일까? 짙은 안개에 쌓인 절집은 범접하기 어려운 신비스런 느낌으로 다가왔다. 야트막한 구릉 사이의 분지에 터를 잡고 절집 앞마당과 양쪽 산 능선 여기저기에 천태만상으로 세워진 불상과 석탑은 전통적 기법보다는 자유분방한 상상력을 형상화해내고 있었다.

보물 제297호이며 팔작지붕 형태의 돌집으로 그안에 두 분의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남과 북을 정확히 바라보고 앉아 있다. 자세히 보면 남북의 문설주 위아래에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닳아진 것이 돌문이 달려있어 예불을 볼때는 열고 닫았을 거라 여겨진다.
▲ 석조불감 보물 제297호이며 팔작지붕 형태의 돌집으로 그안에 두 분의 석불이 서로 등을 대고 남과 북을 정확히 바라보고 앉아 있다. 자세히 보면 남북의 문설주 위아래에 구멍이 뚫어져 있는데 닳아진 것이 돌문이 달려있어 예불을 볼때는 열고 닫았을 거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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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의 불상들에서 느껴지는 것은 무언가에 대한 염원이다. 예불을 받는 부처님과는 거리가 멀고 차라리 낮은 땅에 엎드려 간절히 기원하는 중생의 모습으로 보인다. 엇비슷한 무표정으로 볕 쬐고 비 맞으며 수백년을 지냈을 것이다. 그 긴 염원의 열망으로 오랜 세월의 햇볕과 비바람에도 결코 풍화되지 않고 오히려 강렬하게 다가오는 것 같다.

보물 제796호이며 탑 높이 10.7M로 운주사에서 가장 높은 화사하고 수려한 탑이다. 가는 옥개석(지붕돌)과 처마의 끝이 백제식 목조건물처럼 치솟아 세련미가 느껴진다.
▲ 9층석탑 보물 제796호이며 탑 높이 10.7M로 운주사에서 가장 높은 화사하고 수려한 탑이다. 가는 옥개석(지붕돌)과 처마의 끝이 백제식 목조건물처럼 치솟아 세련미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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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 천불·천탑을 세운 사람들은 어느 때 누구였을까? 그리고 무엇 때문에 세웠을까? 그러면 도선국사는 왜 천불·천탑을 세웠을까? 아니면 운주사는 어떤 불교적 밀교의 장소였을까? 왜 미륵신앙의 성지라고 할까? 삼십여년 전부터 올 때마다 갖는 물음이며, 찾아 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품게 되는 의문일 것이다.

전남유형문화재 제276호이며 정사각형의 기단에 둥그런 원형을 둘러 그 위에 탑을 세웠다. 옥개석(지붕돌)이 육중하고 날렵해 활달한 남성적인 위용이 느껴진다. 기단석을 이렇게 반듯하게 다듬어 이곳으로 운반해 여기 꼭 이 탑을 세워야만 했던 까닭을 생각해보면 운주사 조성자들의 심오한 의도가 궁금해진다.
▲ 7층석탑 전남유형문화재 제276호이며 정사각형의 기단에 둥그런 원형을 둘러 그 위에 탑을 세웠다. 옥개석(지붕돌)이 육중하고 날렵해 활달한 남성적인 위용이 느껴진다. 기단석을 이렇게 반듯하게 다듬어 이곳으로 운반해 여기 꼭 이 탑을 세워야만 했던 까닭을 생각해보면 운주사 조성자들의 심오한 의도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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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10~11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해무리굽 청자조각과 순청자 접시조각 금동여래입상 등이 출토됨으로써 운주사 창건 시기가 고려 초기까지 소급되게 되었고 고려 중기의 상감청자조각과 14~15세기의 청자조각이 상당히 많이 발굴됨으로써 고려시대 전반에 걸쳐 매우 번창했음을 알 수 있다.
운주사 대웅전에서 입구쪽으로 바라본 풍경이다.
▲ 석탑과 불상 운주사 대웅전에서 입구쪽으로 바라본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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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창건 설화 중 이곳의 터가 여자의 음부에 해당하여 장차 제왕이 나올 군왕지지(君王之地)라는 것이다. 그래서 도선국사가 이를 제압하기 위해 도술을 부려 하룻밤 사이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천년의 비밀을 신비롭게 간직하고 있는 운주사, 결코 도선국사가 도술을 부려 하룻밤만에 세운 것은 아닐 것이다.

전남 유형문화재 제279호이며 너른 바위를 온통 기단석으로 해서 서있다. 
비스듬이 깎아지른 바위 위에 홈을 파서 탑을 세웠는데 그 건축 기술과 과학적 재치가 신비롭다. 얇은 옥개석에 처마귀가 솟은 걸로 봐서 백제계탑이다. 볼록 솟은 교차 문양은 동서남북 사방불을 상징하는 듯 싶다.
▲ 7층석탑 전남 유형문화재 제279호이며 너른 바위를 온통 기단석으로 해서 서있다. 비스듬이 깎아지른 바위 위에 홈을 파서 탑을 세웠는데 그 건축 기술과 과학적 재치가 신비롭다. 얇은 옥개석에 처마귀가 솟은 걸로 봐서 백제계탑이다. 볼록 솟은 교차 문양은 동서남북 사방불을 상징하는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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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국사는 전 국토의 풍수적 허점을 보완하는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도선의 국토비보에 따라 아마도 오랜 세월 주변의 이름 없는 민중들에 의해서 대대로 이루어졌을 것이다. 또한 이곳 일대에는 광범위하게 암반이 분포되어 있어서 그 작업이 용이했을 것이다.

5층석탑이며 일명 거지탑이라고도 한다.
 5층석탑이며 일명 거지탑이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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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제멋대로 자유분방하게 세워진 것을 보면 민중들의 염원이 철저하게 반영된 것이며 이 과정에서 미륵신앙도 접목되었을 것이다. 장차 다가올 미륵용화의 세계, 미래의 부처님이 와서 중생을 구원해주는 그 유토피아를 기다리며 이 땅의 사람들은 작업에 동참하였을 것이다.

운주사 경내 입구에 들어서면 우측 암벽에 기대고 있는 가족불상이다.
 운주사 경내 입구에 들어서면 우측 암벽에 기대고 있는 가족불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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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에는 '산 이름은 영구산(靈龜山)이요 절 이름은 운주사(運舟寺)다. 산에는 길고 작은 협곡이 있으며 절 주위에는 누워 있는 부처님과 석실을 비롯하여 천불·천탑이 조성되어 있어 그 장엄함은 이루 말할 수 없도다.' 또 발굴된 암막새 기와에서 '운주사환은천조, 홍치8년'(雲住寺丸恩天造, 弘治八年)이라고 적혀 있어 절 이름이 運舟寺가 아니라 雲住寺라는 것과 연산군1년(1495)에 중창된 적이 있음이 밝혀졌다.

경내에 널려 있는 불상
 경내에 널려 있는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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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運舟寺)와 운주사(雲住寺)는 같은 절을 두고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 '運舟寺'가 이곳의 풍수지리적 특성을 잘 나타내주는 이름이라는 점이다. 운주사는 도선국사의 국토비보사상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 사찰이라 할 수가 있다.

경내에 널려 있는 깨진 불상
 경내에 널려 있는 깨진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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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관도사는 그의 책 '터'에서 도선국사는 우리나라의 지형 전체를 배(舟)로 보았다. 그런데 선복(船腹)에 해당하는 호남땅이 영남에 비해 산이 적어 배가 기울 것을 항상 염려하였다. 게다가 우리나라 금수강산 삼천리의 빼어난 정기가 배가 기울어지는 동쪽으로 흘러서 일본으로 가는 것을 몹시 꺼렸다. 그래서 호남에서 제일 적격지를 골라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경내에 있는 얼굴없는 불상
 경내에 있는 얼굴없는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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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 동편으로 멀지 않은 곳에 돛대봉이 있으니 이는 운주사에서 노를 젓고 돛대봉에는 돛을 올린다는 생각의 반영이다. 또한 일봉암(日封巖)도 가까이 솟아 있으니 이것은 천불·천탑을 조성하는 동안 신들이 '해를 묶어 놓았다'는 전설을 글자에 나타낸 것이다.

떨어진 얼굴 부분을 몸체에 올려 놓은 불상
 떨어진 얼굴 부분을 몸체에 올려 놓은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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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비보설 못지않게 미륵신앙설도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운주사 불상들의 파격적이고 민중적인 이미지에서 보면 반란을 일으킨 노비와 천민들은 미륵이 도래하는 용화세계를 기원하였을 것이다. 신분해방운동을 일으켰던 그들의 염원으로 천불·천탑이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다. 특히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은 천불·천탑과 와불 이야기로 말미를 장식함으로써 운주사를 일약 미륵신앙의 성지로 부상시켰다.

가장 큰 부처와 가장 작은 부처상
 가장 큰 부처와 가장 작은 부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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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신앙은 불교의 형태 가운데 아주 완고하고 반항적인 형태이다. 장차 '세상에 오게 될 미륵'으로서 한반도에서 사회적 종교적 운동의 특징을 지니고 나타났다. 미륵신앙은 석가모니의 사바세계가 끝난 뒤 오천년의 기나긴 염원을 품고 미륵불이 이끄는 용화세계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운주사 뒷편 암벽에 기대고 있는 불상
 운주사 뒷편 암벽에 기대고 있는 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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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의 도래와 더불어 시작되는 지상의 정의로운 평화의 세계 즉 용화세계의 건설은 민중이 열망해온 소원이다. 지배자들은 이 신앙을 저항 세력으로서 두려워했다. 장차 이 세상에 오게 될 미래불, 미륵은 석가모니가 실현하지 못했던 것을 완성할 것이다. 그는 꼭 올 것이다. 그러나 용화세계는 외부의 힘으로 이룩되지는 않는다.

와불로 오르는 길목의 암반 밑에 세워진 불상들
 와불로 오르는 길목의 암반 밑에 세워진 불상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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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주사가 조영된 이래 신분해방운동을 일으킨 수많은 민중들은 그들의 기나긴 염원을 이곳에 실어왔고 와불이 일어나는 그날, 미륵용화의 세계가 이루어진다고 굳게 믿어온 것을 부인할 수도 없는 것이다.  운주사 하늘에 떠있는 구름은 오늘도 시리도록 서러웠던 민중들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염없이 흘러만 가고 있을 뿐이다.

전남 유형문화재 제273호이며 세계에서 하나뿐인 유일한 형태의 와불이다. 이는 열반상(부처님이 옆으로 비스듬이 누운 상)과는 다르게 좌불(앉은 모습)과 입상(선 모습)으로 자연석 위에 조각된 채로 누워있다. 이렇게 좌불과 입상의 형태로 누워있는 부처님은 세계에서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 와불 전남 유형문화재 제273호이며 세계에서 하나뿐인 유일한 형태의 와불이다. 이는 열반상(부처님이 옆으로 비스듬이 누운 상)과는 다르게 좌불(앉은 모습)과 입상(선 모습)으로 자연석 위에 조각된 채로 누워있다. 이렇게 좌불과 입상의 형태로 누워있는 부처님은 세계에서 하나뿐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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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운주사, #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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