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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설업자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1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구치소로 가는 차량에 올라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 '금품수수' 원세훈 전 국정원장 구속 건설업자로부터 금품을 수수한 혐의로 구속영장이 발부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이 1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방검찰청에서 구치소로 가는 차량에 올라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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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은 오늘도 늦는다고 겸연쩍은 얼굴로 출근 전 인사를 대신했다. 굳이 왜 늦는 것인지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남편의 일이 요즘 많이 바빠졌기 때문이었다. 우리 부부의 첫 아이는 이제 갓 130일을 넘겼다. 남편과 아이는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며 남편은 대화를, 아이는 옹알이를 할 시간이 거의 없다.

남편은 요즘 제대로 쉴 틈이 없다. 갓 산후조리를 끝내고 몸이 완전히 회복되기도 전인 나의 몸 상태 이야기를, 급격한 체력저하를 호소하는 남편에게 꺼내기는 미안한 일이다. 남편은 범죄자들의 범죄를 세상에 알리고, 그들의 부조리한 범죄를 개혁하려 애쓰는 일을 한다. 남편은 공직자는 아니다. 이 나라는 남편이 게으르고 싶어도 게을러질 수가 없도록 부지런하게 사건을 만들어낸다. 남편은 이 나라의 국민이자 시민사회단체 활동가이다.

쉬지 않고 범죄를 저지르는 범죄자들 때문에 남편은 많이 바쁘다. 범죄는 정말이지 쉴 새 없이 일어난다. 오늘 남편이 늦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분명했다. 국정원이라는 국가기관이 저지른 공공의 범죄에 대한 분노 때문에 일찍 귀가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수없이 많은 분노들을 치유하기 위해, 또 분노하지 않은 자, 혹은 분노하지 못한 자들에게 그 분노를 알리기 위해, 그들 범죄의 폭주를 막기 위해 일할 것임이 분명했다.

남편은 이곳 대전에서 열리는 '국정원 규탄' 촛불집회에서 사회를 본다. 촛불을 켠 사람들의 뚝뚝 떨어지는 울분과 함께, 그리고 뚝뚝 떨어지는 눈물이 쉬지 않는 초와 함께하기 위해 오늘도 마이크를 잡을 것이리라.

남편이 늦을수록, 아이를 돌봐야 할 엄마인 나의 쉬는 시간도 연기될 것이었다. 다신 돌아올 수 없는 귀한 시간들 속에서도 남편이 선택한 건, 아이와 내가 아니라 초를 든 사람들이었다. 한스러웠다. 그저 한스러웠다. 그들이 가슴이 저릴 정도로 미웠다.

남편을 앗아가버린 그들... 대놓고 욕하고 싶어!

나는 어릴 적 아빠와의 추억이 매우 적은 편이다. 아빠의 성격상 표현이 없으셨고 그 때문에 자식들과의 소통에 어려움을 겪으셨다. 가정에 흔히 있을 법한, 무뚝뚝한 아빠와 그 자식들의 소통 부재. 그 흔한 스토리가 보고 듣는 사람들에겐 지루하게 보일지 몰라도, 직접 겪는 사람들에겐 절대 지루하지 않다. 폭격을 맞아 머리가 송두리째 날아가 버린 건물 앞에 서 있듯, 내 아빠와의 추억 앞에 서면 나는 늘 그런 기분이었다. 허망하고 쓸쓸했다.

그래서 이런 결심을 줄곧 했다. 자상한 남자를 만나 내 자식들에게 자상한 아빠를 선물해야지. 평범하고 소박한 꿈이었다. 하지만 내 자식들에게 평범하고 소박한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었던 선명한 꿈은, 첫 아이의 인생이 시작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흐릿해지고 말았다.

자상한 남편을 얻었지만, 그 자상한 남편은 너무 바쁘다. 추억을 만들 틈 없이 시간이 흘러간다. 자상한 남편이자 아빠이지만 아이와 추억을 만들어갈 시간을 처음부터 놓쳐버리고 말았다.

2일 대전역 서광장에서 열린 '국정원 불법 대선개입 진상규명 및 민주수호 대전시민 촛불문화제'
 2일 대전역 서광장에서 열린 '국정원 불법 대선개입 진상규명 및 민주수호 대전시민 촛불문화제'
ⓒ 오마이뉴스 장재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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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놓고 욕하고 싶다. 당신들 때문이라고. 아니면 차라리 아내와 아이를 잠시 선택하지 않은 남편을 탓할 수만 있다면 오히려 마음이 편할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 마음 편하자고 그렇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창피해지긴 싫었다. 그만큼 큰 사건이었다. 국정원 사건과 남편의 부재를 저울질해 남편을 탓할 수 있는 마음 편한 여자가 될 수는 없었다.

다만, 우리 가족의 소박한 꿈이 그들로 인해 송두리째 빼앗겼다는 사실은 지워내려야 지워낼 수가 없었다. 국정원이라는 공공기관이 저지른 민주주의 훼손이 내 삶을 불법으로 개조한 거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범죄가 없었더라면, 소박한 꿈의 좌절을 너무 일찍 맛보진 않았을 것이리라 단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촛불을 든 사람들 곁에서 목청껏 분노를 터뜨리는 남편과 함께하고 싶지만 도저히 함께할 수는 없었다. 남편이 일찍 귀가할 수도, 나와 아이가 남편 곁으로 갈 수도 없는 상황. 남편의 귀가를 종용할 수도 없고, 4개월 된 어린 아이를 데리고 내가 나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 아이의 첫 여름이 고요하게 지나가고 있다.

야속하고 미운 시간... 그래도 촛불을 응원합니다

유명 연예인의 결혼설, 열애설, 그리고 유명 스포츠인과 관련된 사건들은 국정원 사건에 대한 동요를 뒤덮어버리는 데 일부 성공한 것으로 느껴진다. 3·15부정선거와 다름없다며 이번 국정원 사건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던 한 지인은, 자신 앞에서 침묵했던 주변인들에 대한 안타까움을 최근 내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사색'보다 '검색'이 익숙해져버린 시대의 숙명이라고 여기기엔 너무나 분했다. 시간이 조금 지났을 뿐인데 포털사이트의 메인엔 다른 검색어가 활개를 친다. 그들의 큰 범죄 앞에서도 시간은 약으로 작용했다. 시간마저 야속하고 미운 시간들이다. 시간마저 그들의 편에 서 있다고 느껴져 더 슬펐다.

내 남편이 나와 아이와 보내는 시간보다, 촛불을 든 군중과 보내는 시간을 선택하는 것이 가능한 것처럼, 시간이란 존재가, 편을 들어줄 수 있는 대상을 선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분명 시간이란 친구는 촛불의 선명한 빛을 따라 움직일 것이라 믿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시간은 어떠한 선택이 불가능한 상태로 그저 흐를 수밖에 없는 존재라서 조건 없이 세월의 약이 된다. 시간의 기준엔 선과 악이 없다. '시간이 약이다'란 말이 이런 큰 사건 앞에서도 작용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란 적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래도 야속한 마음은 감출 길이 없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실망하기엔 이르다. 극명하게 민주주의를 훼손한 이 거대한 사건에 대한 관심을 신발 벗듯이 벗어버리는 민주국가의 국민은 많지 않을 것이리라 희망을 가져본다. 내 아이의 인생 시작에 아빠의 잦은 부재가 남긴 슬픔은 이미 커져버렸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부당한 공권력과 무심한 시간들 속에서 힘겹게 초를 밝혀 투쟁하려는 아이 아빠와 수많은 이들을 응원할 것이다.

아이의 추억은 흘러가는 시간이 야속할 정도로 이미 도둑 맞은 셈이지만 부당하게 훼손된 민주주의마저 되찾을 수 없다면, 훗날 아이에게 추억의 일부가 훼손된 이유를 설명할 길이 없다. 그건 굉장히 가슴 아픈 일일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http://blog.daum.net/bendit/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국정원, #불법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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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문화, 다양한 사회현상에 관해 공부하고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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