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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 지명(地名) 유래의 근원이며 뿌리이며, 문헌속에만 있었던 안양사의 실존을 1100년만에 입증시켜준 '안양사명문와편(安養寺銘文瓦片, 안양사라고 새겨진 기와장)'
 안양 지명(地名) 유래의 근원이며 뿌리이며, 문헌속에만 있었던 안양사의 실존을 1100년만에 입증시켜준 '안양사명문와편(安養寺銘文瓦片, 안양사라고 새겨진 기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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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 안양시의 지명(地名) 유래의 근원지이며 시 정체성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천년고찰 안양사(安養寺) 터에서 나온 유물들이 처음으로 일반에 공개됐다.

안양문화예술재단은 지난 28일 오후 평촌아트홀 내에 있는 안양역사관 기획전시실에서 '안양사지 출토 瓦(기와) 특별기획전' 개막식을 열고 2009~2011년까지 3년 간 세 차례에 걸쳐 발굴작업을 통해 새롭게 빛을 보게 된 유물 150점을 오는 8월 26일까지 전시한다.

안양문화예술재단 김연수 전시기획부장은 "이번 전시를 통해 안양시의 역사적 의미와 정체성을 재조명하고, 안양사 부지에 건립예정인 복합문화예술공간 '천년문화관'에 대한 관심과 지역 문화재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기회가 됐으면 싶다"고 말했다.

'안양사'는 신라 효공왕 3년(900년)에 고려태조 왕건(王建, 877~943)이 세운 사찰로 그동안 문헌으로만 존재했을 뿐 실체를 찾지 못하다가 지난 2009년 안양시가 매입한 유유 공장 부지의 복합문화공간 활용에 따른 시굴 과정에서 안양사 흔적을 찾아내 것이다.

안양 지명 유래 근원지 '안양사', 1100년 만에 실존 확인

노재천 안양문화예술재단 대표이사가 28일 '천년고찰의 고즈넉함을 거닐다-안양사지 출토 와 특별전시회' 개막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노재천 안양문화예술재단 대표이사가 28일 '천년고찰의 고즈넉함을 거닐다-안양사지 출토 와 특별전시회' 개막식에서 인사말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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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사지 출토 瓦(기와) 특별기획전' 개막식
 '안양사지 출토 瓦(기와) 특별기획전' 개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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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사의 역사 기록을 보면 <동국여지승람>의 '금천불우조(衿川佛宇條)'에는 "안양사(安養寺)가 있어 그 절 남쪽에 고려태조가 세운 7층 전탑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 전탑지는 유유 공장 내 생산동과 사무동사이 공간에서 고려백자 연봉(연꽃봉우리 장식물)과 함께 고스란히 드러나면서 문헌 속 안양사의 실존을 거듭 확인시켜주었다.

또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최영(崔瑩)장군(1316~1388)이 7층 전탑(塼塔, 벽돌로 만든 탑)을 보수하고 왕이 환관(내시)인 박원계(朴元桂)를 시켜 향(香)을 보냈으며, 당시 승려 1000명이 성대하게 불사(佛事)를 올렸고 시주를 바친 각계의 인사가 무려 삼천 명이라 기록돼 안양사의 사세(寺勢)가 만만치 않은 대규모 사찰로서 고려 중앙정부와 긴밀히 연동되는 국가 중요사찰로 여겨진다.

또한 이숭인(李崇仁)은 금주안양사탑중신기(衿州安養寺塔重新記)를 남겼고,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은 안양사에서 승통(僧統)'능정'스님 진영에 참배했다는 기록을 남겼고, 고려 명종때 문신 김극기(金克己)는 "걸어서 아름다운 다리를 지나 감색으로 붉게 단풍진 사찰(감궁紺宮, 안양사)에 이르니, 좋은 구경에 모두 불자라 다행이었네, 푸른 못(벽담,碧潭)은 환하여 가을 달(추월秋月) 잠긴 듯하고"로 시작되는 주옥같은 한시를 남겼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이 충남온양으로 온천욕을 하러 가던 중 금천안양사에 거동하였다"라는 기록이 있고, 태종실록(太宗實錄)에는 과천현감 윤돈이 교대되어 서울로 올라갈 때 금천현감 김문 등이 안양사에서 전별하였을 때 김문이 소주(燒酒)에 취해 상(傷)하여 죽은 일화를 소개하는 등 중요사찰로 여겨진다.

기대했던 유물 별로 없어... 절터 위에 공장 지으며 이미 훼손

하지만 당초 기대했던 만큼의 유물은 나오지 않았다. 이는 통일신라 중초사, 고려 안양사가 존재했다가 일제강점기 포도밭이던 이곳을 (주)유유가 6·25전쟁 이후 매입하여 1959년 5월 안양공장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절터 대부분이 훼손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번 전시회에는 유유 공장 부지 발굴과정을 비롯 출토한 고려시대 기와들을 통해 조형적 아름다움과 그 변화 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또 20cm 크기의 귀면와, 연꽃무늬수막새와 백자연봉 등 안양사를 상징하는 유물과 각종 도자기 조각 등도 전시되어 있다.

전시된 유물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안양사의 실존을 입증하는 '안양사명문와편(安養寺銘文瓦片, 안양사라고 새겨진 기와장)'이다. 이는 지난 2009년 2차 발굴과정에서 승방지(僧房址)로 추정되는 터와 동쪽 회랑부근의 부속 건물지 등에서 4점이 출토됐다.

32cm×25cm 크기 와편에는 7cm 정도의 글씨가 3~4cm 간격으로 3줄로 안양사 명문이 뚜렷하게 적혀 있어 통일신라 중초사 절터 위에 고려시대 안양사가 세워졌음을 증명한다. 또 태정4년 명문 기와도 발견돼 안양사가 1367년까지 사세를 유지해 왔음을 보여준다.

발굴작업을 주도한 한울문화재연구원 장경호 이사장은 "안양사 명문 기와가 안양 지명의 뿌리라 한다면, 고려 귀면와는 그 모습이 아주 복스럽게 친근감을 주는 것이 특징으로, 안양시가 향후 시의 상징물로 이용하면 매우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안양사지 출토 瓦(기와) 특별기획전'
 '안양사지 출토 瓦(기와) 특별기획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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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사 터에서 발굴된 얼굴 형태의 귀면와
 안양사 터에서 발굴된 얼굴 형태의 귀면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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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역사관 학예사가 '안양사지 출토 瓦(기와) 특별기획전' 개막식에서 안양사의 실존을 입증하는 '안양사명문와편(安養寺銘文瓦片, 안양사라고 새겨진 기와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안양역사관 학예사가 '안양사지 출토 瓦(기와) 특별기획전' 개막식에서 안양사의 실존을 입증하는 '안양사명문와편(安養寺銘文瓦片, 안양사라고 새겨진 기와장)'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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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양시 지명 유래 상징 의미있는 행사에 정작 시는 무관심

한편 안양 지명의 정체성이자 뿌리를 찾아내 전시한다는 점에서 안양시로서는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지닌 개막식에 안양시장은 물론 관련업무 부서 국·과장 등이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아 문화예술에 무관심한 시의 현주소를 보는 듯하다는 쓴소리도 적지 않았다.

실제 개막식에는 주최 측인 노재천 안양문화예술재단 대표이사를 비롯 안양시의회 박현배 의장, 이재선 부의장, 문수곤, 박정례, 송현주, 이승경 의원 등 몇몇 시의원과 한울문화재연구소 관계자 및 시민 50여 명이 참석했을 뿐 시 관계자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박현배 안양시의회 의장은 "이처럼 의미있는 행사에 시 관계자가 참석하지 않은 것은 매우 유감스런 일이다"고 말했다. 또 "유유산업 안양공장 신축(1959년) 당시 절터에서 나온 안양사 유물을 소유자가 대승적 차원에서 국가 또는 지역사회에 환원해야 한다"며 "향후 안양시민사회가 이 같은 운동도 펼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강조했다.

1959년 유유 안양공장 건축시 청동용두, 사자향로발 등 다수의 매장 유물이 출토돼 현재 유유 본사 홀에 전시돼 있다. 2007년 안양시가 유유공장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유유 문화관 마련 등이 논의됐으나 흐지부지되면서 문화재 환원 또한 수포로 돌아간 상태다.


태그:#안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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