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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가격 엘렌 러펠 셸, 정준희 옮김, 랜덤하우스(2010)
완벽한 가격엘렌 러펠 셸, 정준희 옮김, 랜덤하우스(2010) ⓒ (주)알라딘커뮤니케이션
"가난한 자들이 서로 피를 빨아먹는 구조."

페이스북 친구가 등록한 '둘러앉은 밥상'이라는 페이지에서 얼마 전 이런 글을 보았다.

"편의점 삼각김밥. 삼각김밥은 사실 살펴보자면 굳이 청년만의 문제도, 이 단품 먹거리만의 문제도 아닙니다. 가난한 자들이 만들고 배송하고 보다 싼 가격으로 식재료를 수급하고 만들고, 또 사 먹는 순환의 문제. 바로 사회의 문제입니다."

글 아래에는 페이스북에 걸맞게 사진 한 장이 첨부되었다. 그 사진에는 '서로 피를 빨아먹는 구조'가 간략하게 그려졌다.

"알바라도 해야 하는 청년 → 저임금 생산 근로자 → 고단한 배달부 → 먹어야 하는 청년 → 영세한 창업자 → 알바라도 해야 하는 청년…."

저렴한 임금은 저렴한 상품을 낳고, 저렴한 임금을 받는 청년은 저렴한 상품을 먹으면서 생계를 꾸린다. 그들의 돈은 편의점에 흘러들지만, 편의점 주는 본사에게 가입비와 교육비, 물품대금, 인테리어비 등 각종 사업비로 수입이 떼이기 일쑤다. 삼각김밥을 생산하는 공장주는 전국의 편의점에 삼각김밥을 제공하기 위해 최대한 저렴한 노동자를 고용하고 복리후생비를 최소화해 생산비를 줄인다.

보이지 않는 손의 멋진 신세계

이들은 서로 알지 못하지만, 생존을 위해 서로를 필요로 한다. 우리나라의 자유경제원이나 미국 시카고학파의 경제학자라면 이것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손'의 '멋진 신세계'라고 외쳤을 것이다. 가난한 사람은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해 고통 받을 염려 없이 살 수 있고, 영세한 사업가는 부유한 기업과 경쟁하면서 몰락할까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저렴한 상품은 가난한 자 뿐만 아니라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물론 이 '멋진 신세계'가 21세기의 전유물은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와 비슷한 풍경을 역사에서 발견할 수 있다.

18세기 후반 영국에서 곡물법(corn law) 폐지를 둘러싸고 지주계급과 자본계급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을 때다. 사유화된 토지에서 밀려난 농민들은 도시의 노동계급이 되었고, 자본가들은 노동자에게 들어갈 비용을 줄이기 위해 곡물가격이 낮게 유지되길 바랐다. 곡물가격이 낮게 유지되려면 유럽의 밀이 수입되어야 했다. 물론 토지를 소유하고 곡물을 생산하는 지주계급이 곡물 수입을 원할 리 만무했다.

이때 자본가들이 내세운 명분은 노동자에게 저렴한 곡물을 제공해야 임금을 낮게 유지할 수 있고, 상품의 가격도 낮아져 수출이 활발해진다는 것이었다. 곡물법이 폐지된 뒤에도 유사한 법률이 경제 위기 때마다 부활하긴 했지만, 곡물법 논쟁은 그 자체로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곡물법 폐지는 자본계급과 자유무역의 승리였을 뿐 아니라 자본주의가 원활하게 작동하기 위해서는 저렴한 노동력이 필요하다는 걸 드러내기 때문이다.

엘렌 러펠 셸의 <완벽한 가격>은 21세기의 곡물법을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2차 대전을 전후해 미국에서 대형마트가 팽창하면서 보다 저렴한 상품을 공급하려는 기업의 열정은 오늘날 극한에 다다랐다.

러펠 셸은 19세기 미국의 선도적인 기업가들을 살피면서 '유통의 역사'를 탐색하다가 뇌가 가격 신호에 따라 다르게 반응한다는 것을 행동경제학의 공리에 따라 설명한다. 이케아(Ikea) 같은 기업이 상품가격을 낮추는 전략을 검토함으로써 생산비용이 소비자는 물론 자연환경에도 전가된다는 것을 드러낸다. 장인(craftsman)은 사라졌으며, 권력은 생산 자본에서 유통 자본으로 이동했다.

월마트와 각종 아울렛 매장에서 값싼 소비재를 구매하는 소비자는 중국의 저렴한 노동력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 미국 중산층의 감소는 중국 노동자의 낮은 임금과 직결된다. 저렴한 곡물의 생산과 공급은 저개발국은 물론 전 세계적으로 점점 감당하기 어렵다. 책의 원제대로 이 모든 일은 '싸구려(cheap)'라는 키워드로 집약된다. 소비자가 저렴한 제품을 찾을수록, 그들은 저렴한 노동력을 착취하는 구조에 더 깊이 빠져든다.

유통업도 독과점 형성 중

러펠 셸의 분석은 대형마트가 유통을 장악하고 골목상권을 위협하는 한국사회에 딱 맞는 것처럼 보인다. 한국어판 해제를 쓴 우석훈 박사의 말처럼 한국은 "대형 유통업자들 사이의 경쟁도 마지막 단계로 넘어가, 독과점 시장이 형성"되는 중이다.

고도경제성장 시기를 지나 저성장·저출산·고령화시기에 들어선 한국은 언제까지 국민경제의 '성장'을 명분으로 대형마트의 팽창을 방관할 수 있을까? 우리는 값싼 삼각 김밥, 천원 숍의 상품과 1+1 상품의 유혹을 마지 못하는 척 인정해야 하는 걸까? 대량으로 양식된 태국산 새우가 들어갔을 새우버거와 쉬림프피자를 맛있게 먹어치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까? 물론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때문에 서울시는 대형마트 의무휴업과 판매품목 제한 등의 정책을 실시했고, 이런 정책은 다른 지자체에도 전파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롯데마트, 이마트, 홈플러스 등 국내 유통재벌은 지역 상권을 끊임없이 잠식하는 중이다.

약 16개월 동안 홈플러스 합정점 입점에 반대해 간신히 상생품목 지정에 합의했지만, 반경 1.5km 이내에 무려 두 개의 대형마트와 한 개의 기업형 슈퍼마켓(SSM)에 에워싸인 망원시장 상인들의 상황을 떠올려보자.

상황은 악화되는 중이지만 우리가 대형 유통기업의 시장 장악에 대응할 방법이 전혀 없지는 않다.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이나 로컬푸드, 시민지원농업(CSA)이 그런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윤리적 소비'와 '소비자 주권'을 내세움으로써 대형마트에 대항해 보다 건강하고 정치적으로 올바르며 생태적이고 윤리적인 소비를 할 수 있다고 믿는다.

가장 유명한 사례로 그린피스(Green Peace)가 세계적인 식품기업 네슬레의 인도네시아 벌목을 비판하는 유튜브 동영상을 만들어 배포하자, 네슬레가 법원의 허가를 받아 동영상을 삭제했다가 소셜 미디어를 통한 대중의 엄청난 비판을 받은 일도 있다. 러펠 셸의 주장대로라면 생산자본 보다 유통자본이 더 큰 권력을 가진 현재야말로 네슬레 같은 기업뿐만 아니라 거대 유통자본에게도 소비자 주권을 발휘해야 할 때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보이지 않는 손을 넘어서

하지만 러펠 셸이 책 마지막 장에서 미국의 유명 식품 소매점 웨그먼스(Wegmans)를 윤리적 소비의 사례로 제시할 때, 윤리적 소비 담론의 한계 또한 드러나는 것 같다. 웨그먼스는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공급업체와 협상해 일관된 가격에 매입하고, 매장 노동자들의 교육과 복리후생에 힘쓰며 근로 장학생 제도를 운영해 지역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한다.

무엇보다 러펠 셸이 유통 자본을 상대하는 소비자 윤리로서 '계몽된 이기주의', 즉 '보이지 않는 손'을 이야기하는 <국부론>의 애덤 스미스가 아니라 호혜적인 인간관계를 전제하는 <도덕감정론>의 애덤 스미스를 제시할 때 분석의 힘은 이내 쇠약해진다. '보이지 않는 손'(자본주의)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가슴'에 의존해 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장인정신이라든지 유통과 금융이 아니라 실물을 중심에 두는 사고방식으로 돌아가자는 등 지난 시대의 미덕을 환기하는 제안이 아무리 매력적이더라도, 그 제안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물어야 할 것은 따로 있지 않을까. 우리가 중국과 인도네시아의 노동자들과 만나는 최선의 방법은 '소비자로서' 관계 맺는 것뿐일까? 우리는 스스로를 '을(乙)'이나 '99%'라고 부르고 사회의 양극화를 비판하면서도 정작 '노동'이나 '계급' 같은 표현은 왜 극구 피하는 걸까? 다시 페이스북의 글귀가 머릿속을 맴돈다.

"가난한 자들이 서로 피를 빨아먹는 구조."

덧붙이는 글 | 완벽한 가격 - 뇌를 충동질하는 최저가격의 불편한 진실 | 엘렌 러펠 셸 (지은이), 정준희 (옮긴이)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7월



완벽한 가격 - 뇌를 충동질하는 최저가격의 불편한 진실

엘렌 러펠 셸 지음, 정준희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2010)


#완벽한 가격#대형마트#유통자본#윤리적 소비#보이지 않는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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