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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오를 듯 뛰다
 날아오를 듯 뛰다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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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일. 우리 부부는 어린이주일도 앞두고 있어 아들딸 얼굴이나 보고 오자고 집을 나섰다. 하지만 잠깐 고장 난 노트북을 컴퓨터 수리점에 맡겨놓고 나오는 동안 문자가 날아왔다. 엊그제 미리 얘기했건만 딸은 "오늘은 경주 갈 일이 생겨서 못 만난다"고 "밥은 다음에 먹자"고 했다. 통보문자였다. 날은 잔뜩 흐리고 마음도 착 가라앉고 괜히 우울해 시내 나온 참에 기분전환 삼아 영화라도 보자 싶어 영화관을 찾았지만 마땅히 마음에 와닿는 영화가 없어 다시 밖으로 나왔다.

시장이나 좀 보고 집에 가서 방에 틀어박혀 책이나 읽자 싶어서 마트 쪽으로 향했다. 어디서 흘러나오는 소릴까. 확성기에 대고 외쳐대는 소리는 먼데까지 울려퍼지고 있었다. 약장사라도 온 걸까, 아니면 빨간 띠 두르고 데모라도 하는 걸까. '이 소음은 뭐지?' 하고 고개를 들어 소리의 진원지를 눈으로 찾았다. 고개 돌려보니 눈앞에 초등학교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학교에서는 운동회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한번 가볼까?' 서로를 쳐다보고는 발걸음을 학교로 향했다. 가까이 갈수록 확성기에 바짝 대고 소리소리 치는 교사의 목소리는 흥분되어 있었고, 그저 지루하고 지리멸렬한 운동회가 될 법도 한데 확성기에 대로 뜨겁게 소리치는 교사의 목소리는 운동회에 뜨거운 활기와 생기를 한껏 불어넣고 있었다. 먼데까지 울려퍼지는 짐짓 극성스럽고 흥분돼 있는 격한 목소리는 그 소리만으로도 흥분된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날개라도 돋아 높이 날아오를 듯
 날개라도 돋아 높이 날아오를 듯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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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도착한 초등학교 교문 앞 운동장으로 들어섰다. 학교 운동장으로 들어가면서도 '희한하네 내가 여기 왜 왔지?' 멈칫 했다. 그러면서도 발걸음을 운동장에 들여놓고 있었다.  오봉산 자락 아래 하늘 높이 울려 퍼지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힘찼다. 햇빛을 가린 차일 아래 의자에는 젊은 학부모들이 두런두런 앉아 있었다. 방금 그렇게 소리소리 치며 환호했던 것은 학부모들의 달리기 때문이었다. 이제 아이들의 계주경기를 할 차례였다. 저학년에서부터 고학년까지 달리기를 잘 하는 아이들을 뽑아서 바통을 받아가며 달리기 하는 시간.

야, 재밌겠다. 나도 모르게 호기심이 동했다. 어? 그런데 내가 언제부터 달리기를 좋아했지? 내가 잘 못했던 달리기, 대리만족감을 느껴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내 참. 내 어린 시절만 해도 운동회는 좋아하지 못했다. 운동도 못하고 달리기는 더더욱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 마디로 고역이었다. 언니나 동생은 운동이라 하는 것은 다 잘했지만 나는 달리기를 비롯해 잘하는 운동이 없었고, 또 자신도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운동에 주눅 들었고 못한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더 못했었던 것 같다.

달리기를 매력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언젠가 읽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회고록 <달리기를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통해서였던 것 같다. 그 역시 나처럼 운동회 같은 것을 어지간히 싫어했던 것 같다. '자, 해라' 하고 강요된 운동이었던 학교 체육시간을 참을 수 없어했다고 쓰고 있다.

그랬던 무라카미 하루키가 달리기를 시작한 것은 소설가로 살게 되면서부터였다. 그는 '소설 쓰는 방법의 많은 것을 매일 아침 길 위를 달리면서 배워왔다"고 했다. 매일같이 하루도 쉬지 않고 달린다던 무라카미 하루키를 생각하며 달리기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었다.

잘 한다. 모두 모두 잘 한다.
 잘 한다. 모두 모두 잘 한다.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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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작가의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에 보면 '가끔 별난 충동을 느낄 때가 있다. 목청껏 소리를 지르고 손뼉을 치고 싶은 충동 같은 것 말이다. 마음속 깊숙이 잠재한 환호에의 열망 같은 게 이런 충동을 느끼게 하는지도 모르겠다"라고 글이 시작한다. 우연히 버스를 타고 지나가다가 마라톤 때문에 버스가 가지 못하고 한참을 멈춰 서 있게 되자 차에서 내려서 마라톤 하는 광경을 보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갈채에의 충동을 느껴볼 참으로 마라톤을 구경하는데, 이미 1등을 한 마라토너는 지나가 버린 상태, 맥 빠진 마음으로 무감동하게 바라보다가 꼴찌 주자를 보게 된다. 그 꼴찌 마라토너의 얼굴에서 정직하게 고통스러운 얼굴을 본 작가는 꼴찌를 향해 열렬한 박수를 보내며 환성을 질렀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뜻밖의 장소에서 환호하고픈 오랜 갈망을 마음껏 풀 수 있었던 내 몸은 날아 갈듯이 가벼웠다. 그 전까지만 해도 나는 마라톤이란 매력 없는 우직한 스포츠라고밖에 생각 안 했었다. 그러나 앞으론 그것을 좀 더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그것은 조금도 속임수가 용납 안 되는 정직한 운동이기 때문에. 또 끝까지 달려서 골인한 꼴찌 주자도 좋아하게 될 것 같다. 그 무서운 고통과 고독을 이긴 의지력 때문에."

"그러나 그날 내가 20등, 30등에서 꼴찌 주자에게까지 보낸 열심스러운 박수 갈채는 몇 년 전 박신자 선수한테 보낸 환호만큼이나 신나는 것이었고, 더 깊이 감동스러운 것이었고, 더 육친애적인 것이었고, 전혀 새로운 희열을 동반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마음 깊은 곳에 환호에의 열망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회색빛 도시 속에서 질식할 듯 파리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풀길 없는 환호에의 열망을 스포츠 관람을 통해 풀기도 하고, 노래방에서 고래고래 소리치며 노래로 풀기도 하나보다. 수 년 전에 있었던 월드컵 땐 온 나라 안이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던 것만 봐도 그렇다.

나는 초등학교 운동회에 와서 흥분하고 있었다. 구김살 없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 설레고 기대와 흥분으로 내 눈은 빛나고 있었다. 내 속에도 열광하고픈 환호에의 갈망이 숨어 있었던 걸까. 그래서 엉뚱하게도 우연히 지나다가 초등학교 운동회에 와서 뜬금없이 열광하는 걸까. 푸훗~.

우연히 지나다 보게 된 운동회. 마음 활짝~.
 우연히 지나다 보게 된 운동회. 마음 활짝~.
ⓒ 이명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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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드디어 환호소리와 함께 '땅!' 하는 소리와 함께 두 아이가 달리기 시작했다. 처음엔 별 차이 없이 나란히 출발했지만 차츰 바통을 주고받고 이어달리기를 하면서 격차가 심해졌다. 나중엔 두 아이 모두 마치 날아오를 듯이 두 다리를 한껏 높이 넓게 좍좍 펴며 잘 뛰었지만 처음부터 나기 시작한 간격을 좁히지는 못했다. 아이들은 마치 금방 하늘로 높이 날아오를 듯이 솟구치듯 가볍게 그리고 힘껏 뛰었다. 달리는 도중에 등 뒤에 날개라도 돋아 봄하늘 위로 날아오르는 건 아닐까 생각되었다.

누가 승리를 했든 상관없이 모두들 잘 뛰었고 역동적인 그 모습은 멋졌다. 남편과 나는 열심히 응원을 했다. 와아~ 함성을 지르며 누구한테라고 할 것 없이 아이들이 달리기 하는 그 광경 자체가 좋아서 신이 나 있었고 모두를 위해 응원을 했다.

누가 보면 어린 손자 손녀나 늦둥이 아이라도 있는 줄 알겠다 싶어 옆을 살짝 돌아보니 아이들은 뜨거운 응원을 보내고 있었지만 정작 학부모들은 대부분 무덤덤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생각해도 우리 부부가 웃겨서 쿡쿡 웃음이 나왔다. 남편은 더 신이 나 있었다. 좀 우울했던 마음도 아이들 뛰는 모습을 보며 사라졌고 먹구름으로 뒤덮였던 하늘도 맑게 개였다. 맑은 봄하늘엔 만국기가 휘날렸다.

나는 아이들 운동회를 보면서 내 어린 시절의 운동회 장면과 아들딸 어렸을 때 운동회를 다시 떠올랐다. 엊그제만 같은데 언제 이토록 많은 세월이 흘렀을까. 내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는 가물가물하고 아이들 어린 시절도 멀리 멀리 멀어져 있었다. 그래도 그 시절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흐려지지 않은 것만 같다. 내 나이 오십이라니, 아들딸이 벌써 이십대 중후반을 살고 있다니. 세월은 눈 깜짝할 사이인 것 같다.

지금, 다시 초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면 달리기를 잘 할 수 있을까, 쓸데없는 생각도 해보았다. 그땐 왜 그렇게 운동회를, 달리기를 싫어했을까. 나는 운동을 못한다고 생각하니 더욱 싫어했던 것 같다. 잘 못한다고 생각하니 다리는 무겁고 뒤처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나랑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초등학교 운동회에 우연히 와서 기대하지 않았던 즐거움을 얻었다. 남편은 어릴 적 생각이 나는지 운동회 마지막 순서로 음악소리와 함께 국민체조 하는 아이들과 함께 체조를 하고 있었다. 그 얼굴은 해맑았다. 젊은 학부모들 그 누구도 국민체조를 따라 하는 사람 없고 시큰둥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남편은 아이처럼 신이 나서 체조를 했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덞, 신나게 두 팔을 좍좍 펴고 옆구리를 굽히고 목을 돌리면서 음악에 맞췄다.

하늘은 맑게 개어 화창했고 반공중에 만국기가 봄바람에 팔랑거렸다. 좀 무겁고 우울했던 내 마음도 화창하게 갰다. 나랑 무관한 듯 보이던 아이들 운동회를 구경하다가 이렇게 우울하고 구겨졌던 마음이 펴질 수 있다니. 전혀 생각지 못했던 곳에서 내 마음은 어느새 가벼워져 있었다.


태그:#운동회, #환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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