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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금까지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제목의 학급 문집을 세 권 펴냈다. 그다지 많지 않은 양이다. 해마다 담임을 맡지 못한 이유도 있지만 게으름 탓이 크다. 가장 큰 이유는 교직 입문 초기에 학급 문집의 의의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데 있다. 나는 아직도 햇병아리 시절에 문집 발간을 소홀히 한 사실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2007년, 드디어 처음으로 학급 문집을 발간하기로 했다. 나는 우선 문집 발간과 관련한 '거창한' 욕심들을 버리기로 했다. 문집 발간의 일반적인 절차에도 구애받지 않기로 했다. 그 첫 단계인 문집 편집위원회 구성이나 이를 통한 내용 체제 결정 등 사전 작업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이다. 한마디로 '내 맘대로' 하기로 했다.

이유가 있다. 문집 편집위원회를 활용하는 데 어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먼저 담임과 편집위원회에 속한 아이들 간 의견 조율의 문제가 있다. 바쁘게 돌아가는 학교 일정 때문에 편집위원회에 속한 아이들이 활동을 여유롭게 하지 못하는 한계도 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담임이 모든 과정을 주도하게 되는 상황이 발생한다. 아이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어려워지는 것이다.

학급 문집 발간을 위한 몇 가지 원칙

그래서 나는 문집 발간을 위한 몇 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학급의 모든 아이가 문집 발간에 동참할 것, 둘째, '특별한' 주제의 글보다는 '일상의' 소박한 경험을 기록하는 데 초점을 맞출 것, 셋째, 아이들의 글쓰기 부담을 줄이기 위해 되도록 내용과 형식의 자유로움을 보장할 것 등이 그것이다.

이를 위해 나는 그해 학년 초에 두툼한 공책 두 권을 마련했다. 그리고 그 겉표지에 '홀수 ․ 짝수 날적이'('일기'의 순우리말 표현)라는 제목을 달았다. 표지 안쪽에는 '머리말'을 써서 붙였다. 날적이를 쓰는 요령과 의의 등을 서술한 짧은 글이었다.

'날적이' 쓰기 순번이 된 우리 반 한 아이가 날적이 공책을 펼치는 모습. '날적이' 쓰기는 대개 오후에 잡혀 있는 자기 주도적 활용 시간을 활용한다. '자기 주도적 활용 시간'은 우리 학교만의 특화된 수업 프로그램으로, 아이들 각자의 계획에 따라 교과 보충 학습이나 책 읽기, 과제 등을 하는 데 쓰인다. 우리 반에서는 이 시간을 학급 문고 책 읽기으로 활용하고 있다.
 '날적이' 쓰기 순번이 된 우리 반 한 아이가 날적이 공책을 펼치는 모습. '날적이' 쓰기는 대개 오후에 잡혀 있는 자기 주도적 활용 시간을 활용한다. '자기 주도적 활용 시간'은 우리 학교만의 특화된 수업 프로그램으로, 아이들 각자의 계획에 따라 교과 보충 학습이나 책 읽기, 과제 등을 하는 데 쓰인다. 우리 반에서는 이 시간을 학급 문고 책 읽기으로 활용하고 있다.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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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그 두 권의 날적이 각각에 하루에 한 명씩 글을 쓰면 되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하루 동안의 일이나 생각, 느낌 등을 중심으로 하고, 분량은 최소한 공책 절반 이상으로 하게 했다. 문장은 되도록 어문 규정에 맞게 쓰도록 했다. 하지만 꼭 필요하다면 통신어체나 그림 문자와 같이 10대의 색깔이 드러나게 해도 된다고 여지를 두었다.

문집 발간의 의미와 날적이를 설명하는 첫날, 날적이 관리 책임자를 선정하는 일도 잊지 않았다. 이들에게는 매일 아이들이 순서대로 글을 잘 쓰고 있는지, 그리고 공책이 다음 순번 학생에게 잘 전달되고 있는지 등을 확인하는 일을 맡겼다. 학년 말에 이루어지는 날적이 원고 입력과 편집은 담임과 학급 서기, 부서기 등이 하기로 했다.

그때부터 나는 2주에 한 번 정도씩 공책을 가져와 아이들의 글에 짤막하게 논평을 달아 주었다. 간단한 감상평을 중심으로 아이들을 격려하는 내용이었다. 한 달에 한 번씩 홀수 ․ 짝수 날적이에 내가 직접 글을 써넣기도 했다. 아이들에게 글쓰기에 대한 자극을 주기 위한 의도에서였다.

이렇게 해서 첫해 문집은 거의 날적이 글로만 채워졌다. 그러다 보니 책이 지나치게 단조로웠다. 볼품(?) 없는 두께도 맘에 걸렸다. 그래서 두 번째 문집을 펴낼 때에는 날적이 글 외에 '인생 계획서', '학급 문고 감상기' 등을 걷어 덧붙였다. 책이 한결 풍성해졌음은 물론이다.

날적이를 제외한 여타 주제의 글 원고는 일정한 시한을 정해 써 오도록 했다. 그런데 이렇게 하자 원고가 뜻대로 걷히지 않았다. 바쁜 학사 일정 탓에 아이들이 따로 시간을 내 글을 써 내는 일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맡은 교과 수업 시간을 적당히 활용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10대 후반을 뜨겁게 달려온 아이들의 역사 기록

나는 처음에 날적이를 제외한 다른 글들을 되도록 원고지에 쓰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A4 용지와 같은 일반 종이에 써 오도록 했다. 그런데 이렇게 하다 보니 학년 말에 원고 입력하는 데 많은 공력이 들어가게 되었다. 올해는 시한을 넉넉하게 정해 놓고 컴퓨터로 입력한 원고를 보내도록 했다.

이렇게 하는데도 시한을 넘기는 아이들이 제법 있다. 그럴 때 담임이 급하게 재촉하거나 다그치면 아이들은 형식적으로 글을 써서 보내오기가 쉽다. 따라서 아이들이 원고 제출 시한을 넘기더라도 학급 문집의 취지와 써야 하는 글의 의의 등을 차분하게 다시 이야기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1차 원고 마감은 여름 방학 전에 하고 2차 고사(옛 '기말고사')를 앞둔 10월까지는 마감을 해야 일정에 쫓기지 않는다. 기말고사 이후에는 원고 입력과 편집 등을 찬찬히 진행하면 된다. 이때 편집에 대한 욕심을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지금까지 한글 프로그램만 이용하여 아주 단순하고 소박한 형식으로 편집을 해 왔다.

문집 제목은 학급 회의 시간을 활용하여 정하면 좋다. 표지는 체육 대회나 소풍 때 함께 찍은 단체 사진을 쓰면 무난하다. 아이들과 함께 찍은 사진이 많으면 문집의 각 글 중간중간에 넣으면 책이 한결 다채로워진다. 머리말과 발문에 해당하는 후기 등은 담임이나 반장 ․ 부반장의 글로 채우면 될 것이다.

그간 펴낸 학급 문집 사진
 그간 펴낸 학급 문집 사진
ⓒ 정은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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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집 발간은 복사해서 제본하는 방식으로 했는데, 세 번 모두 25만 원 정도의 학급 운영비로 했다. 이 돈은 전교조 전북지부와 전북교육청 간에 체결한 단체 협약 규정에 따라 도내 모든 초중고 학급에 지원되는 것이다. 정식 인쇄를 하게 되면 그 비용이 크게 늘어나므로 형편껏 해야 한다. 올해는 <창비>와 <한겨레>가 학급 문집 만들기 캠페인을 하니 여기에 응모해 보는 것도 좋겠다. 예산 확보가 힘들면 학교에 추경 신청을 하는 것도 방법이다.

학급 문집은 글 잘 쓰는 몇몇 아이들의 경연장이 아니다. 글쓰기 연습을 위한 장은 더더욱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학급 문집의 초점을 일상의 기록에 두었다. 그것은 곧 10대 후반을 뜨겁게 달려온 아이들의 역사 기록이다. 자신의 현재 삶을 기록하는 일은 미래를 꾸리는 데 귀한 들무새가 된다. 그 자신의 역사를 기억하지 않는 개인이나 집단에게는 결코 미래가 없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한겨레 신문(2013.04.22.)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학급 문집, #날적이, #역사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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