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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여 년간 경복궁을 찾은 건 적어도 1년에 한 번 이상이었으니 열 번은 훨씬 넘는다. 돌이켜보면 경복궁만큼 자주 온 곳은 없는 것 같다. 그래도 봄에 찾은 건 한 번도 없다. 봄에는 창덕궁으로 발길을 돌렸기 때문이다. 올해만큼은 창덕궁을 버리고 경복궁으로 향했다.

광화문을 거쳐 홍례문에 들어서면 근정문과 마주하게 된다. 근정문으로 들어가려면 명당수가 되는 금천을 건너야 한다. 금천을 가로지르는 금천교가 창덕궁은 금천교, 창경궁은 옥천교, 경복궁은 영제교다. 금천교는 외부와 궁궐을 연결하는 통로로 여기서 발길을 머문 채 사악한 기운을 떨쳐야 한다.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복숭아꽃이 금천 따라 심어져 있다
▲ 복숭아꽃과 근정문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는 복숭아꽃이 금천 따라 심어져 있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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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 따라 복숭아꽃이 만발하여 복숭아 꽃 사이로 근정문이 보인다. 영제교 사방의 네 마리 천록(天鹿)으로 부족했는지 복숭아나무를 심어 놓았다. 민간이나 궁중이나 복숭아는 사악한 기운을 몰아내고 잡귀를 쫓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창덕궁 금천교 근처에도 복숭아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도 이와 같은 의미일 게다.

복숭아꽃에 취했는지 혀는 반쯤 내민 채 멍하니 금천을 바라보고 있다
▲ 영제교 천록 복숭아꽃에 취했는지 혀는 반쯤 내민 채 멍하니 금천을 바라보고 있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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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리의 천록 중에 혀를 반쯤 내보이고 있는 돌짐승은 복숭아꽃에 취해선지, 복숭아꽃이 제 역할을 한다고 믿어 마음이 놓였는지 몸을 축 늘어트린 채 방문객의 눈짓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연덕스럽게 금천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

금천을 건너 근정문에 들어서면 바로 근정전, 강녕전으로 이어진다. 여기에는 꽃은커녕 나무 한그루 없으니 봄 경치는 기대하기 어렵고 사시사철 똑 같은 분위기이고 긴장감만 맴돈다. 사계절 변화가 없으니 자연미라던가 인간미도 없다. 

경복궁에서 그나마 봄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전각의 뒷마당, 뒤뜰이다. 교태전과 자경전에 뒤뜰이 있고 최근에 복원한 태원전과 건청궁에도 뒤뜰이 있다.

화산한 아미산 봄 경치

지금껏 한 번도 교태전에 올라본 적이 없다. 지금은 교태전 대청마루에 앉아 교태전 뒤뜰, 아미산을 감상할 수 있다. 세 개의 대청 문이 활짝 열려 있다. 마루에서 보면 굴뚝의 높이와 같다. 문 아래로 내려다보는 경관은 아미산 밑에서 보는 경관과 많이 다르다.

아미산은 교태전 대청마루에 앉아 봐야 제멋이 난다
▲ 교태전마루에서 본 아미산 정경 아미산은 교태전 대청마루에 앉아 봐야 제멋이 난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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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사이로 보이는 경관은 액자 안에 있는 그림을 보는 것 같다. 굴뚝 곁에 있는 옥매화와 철쭉, 화계에 돋아난 비비추와 원추리 등은 연록과 연분홍 빛깔의 화사한 봄 경치를 선사한다.

연록과 연분홍 빛깔의 아미산은 화사한 느낌을 준다
▲ 아미산 전경 연록과 연분홍 빛깔의 아미산은 화사한 느낌을 준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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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지 굳은 조선의 왕비라 해도 아미산 봄 경치를 내려다보면 마음이 뒤숭숭해졌을 것 같다. 엄숙하고 질서정연하여 흐트러짐이 없는 근정전과 강녕전과 달리 아미산은 이런 면에서 인간적 체취가 느껴진다.  

아미산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지긴 했어도 자연미가 있다. 늘 푸른 나무만을 고집하지 않고 철따라 빛깔을 달리하는 앵두, 철쭉, 미선나무, 옥매화, 모란, 진달래 등을 심었다. 일본 정원처럼 오려 내거나 구부러트리지 않았다.

가을이면 봄과 완전히 다른 빛깔을 낸다
▲ 아미산 가을 가을이면 봄과 완전히 다른 빛깔을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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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초가 옆으로 뻗으면 뻗는 대로 누우면 누운 채 그대로 두어 유난을 떨지 않았다. 한여름이 되면 화초끼리 뒤엉켜 하나가 되다가 겨울이 오면 나무는 가지만 남기고 화초는 땅속에 잠긴다.

깊은 산속을 담은 자경전 뒤뜰

자경전의 뒤뜰은 교태전 뒤뜰과 다르다. 앵두나무와 살구나무만 있을 뿐 다른 꽃나무는 없다. 그 대신 대조전은 꽃담과 굴뚝이 아미산 꽃동산을 대신한다. 살구꽃은 꽃잎을 다 떨어뜨렸지만 뒤뜰이라 그런지 앵두꽃은 아직 완전히 지지 않았다.

앵두와 담이 잘 어울린다
▲ 자경전 담과 앵두 앵두와 담이 잘 어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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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 석류, 모란, 난초, 대나무, 연꽃 등 무늬를 넣어 만든 바깥꽃담은 여느 뒤뜰 못지않게 화려하다. 뒤뜰 굴뚝엔 십장생과 연꽃, 포도나무가 심어져 깊은 산속을 옮겨온 듯하다. 좁은 공간을 우리나라 정원 중에 가장 드넓은 정원으로 바꾸어버린 상상력이 기가 막히다.

화산한 아미산과 달리 자경전 뒤뜰은 살구나무와 앵두만 심어져 있다
▲ 자경전 뒤뜰 정경 화산한 아미산과 달리 자경전 뒤뜰은 살구나무와 앵두만 심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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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이를 위한 태원전 뒤뜰

태원전은 경복궁의 빈전(殯殿)이다. 빈전은 국상(國喪) 때, 상여가 나갈 때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전각이다. 그래서 태원전은 경복궁 서북쪽에 치우쳐있다. 저승은 서쪽 저만치 가야 도달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흰 꽃과 흰 담, 엄숙함을 더한다
▲ 태원전영역 담 흰 꽃과 흰 담, 엄숙함을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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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산과 자경전의 화려한 뒤뜰을 보고 온 터라 태원전 앞은 더욱 엄숙하다. 네모난 기둥의 주열은 깊은 침묵의 세계로 인도한다. 태원전 뒤뜰은 여느 건물의 뒤뜰과 다르다. 까만 점선무늬의 굴뚝은 죽음의 공간임을 암시한다. 옆에 앵두나무도 차마 하얀 꽃을 떨어뜨리지 못하고 애처롭게 피어있다.

까만 점선무늬 굴뚝은 죽음의 공간임을 암시한다
▲ 태원전 뒤뜰 까만 점선무늬 굴뚝은 죽음의 공간임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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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왕후 숨결이 남아 있는 곤녕합 뒤뜰

건청궁에는 고종의 침소인 장안당과 명성황후가 머문 곤녕합이 있으며 누마루인 옥후루가 그 옆에 붙어있다. 장안당이 사랑채라면 곤녕합은 안채로서 궁이라 하나 살림집 구조를 하고 있다.

옥후루에서 명성왕후가 시해된 사실을 모르고 보면 아주 편안하고 살고 싶어지는 집이다. 곤녕합에도 뒤뜰이 있다. 아미산이나 자경전 마냥 화려할 것도 규모가 큰 것도 아니다. 비탈이 져서 화계를 꾸민 것도 아니다. 그저 좁은 공간을 내서 검소하게 차려졌다.

좁은 공간에 검소하게 만들어졌다
▲ 곤녕합 뒤뜰 좁은 공간에 검소하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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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단 가운데에 굴뚝을 설치하였고 주변에 앵두, 모란, 진달래, 해당화 꽃을 심었다. 굴뚝에 기대어 핀 진달래는 차마 지지 못하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며 애처롭게 매달려 있다. 생명력이 모질게 길다는 쑥은 철모르고 화단에 여기저기 돋아나 있다.

뒤뜰 화단이 너무나 약소했는지 옥후루 옆에 다른 화단을 만들어 놓았다. 보라색라일락 꽃이 하늘하늘 피어나 라일락 향이 사시향루와 옥후루를 감싸고 있다. 보랏빛라일락 꽃말처럼 고종과 명성왕후의 '젊은 날의 추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보랏빛라일락 꽃말처럼 고종과 명성황후의 ‘젊은 날의 추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 옥후루와 보랏빛라일락 보랏빛라일락 꽃말처럼 고종과 명성황후의 ‘젊은 날의 추억’을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 김정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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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태전, 자경전, 태원전, 곤녕합 뒤뜰은 위엄을 갖춘 법궁의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각각의 향기가 다르고 표정이 있다. 교태전 뒤뜰은 화사하고 자경전 뒤뜰은 깊고 태원전 뒤뜰은 엄숙하며 곤녕합 뒤뜰은 애처롭다. 모두 인간적 체취가 느껴지는 사랑스런 공간이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pressianplus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경복궁, #뒤뜰, #교태전, #자경전, #태원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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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不自美 因人而彰(미불자미 인인이창), 아름다움은 절로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하여 드러난다. 무정한 산수, 사람을 만나 정을 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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