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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어른의 부고

갑작스러운 비보
▲ 장인어른의 부고 갑작스러운 비보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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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 퇴근길, 아내로부터 전화가 왔다. 경황없는 목소리. 장인어른이 매우 위독하셔서 오늘 밤을 넘기기 힘들 것 같으니 어서 내려오라는 연락을 받았다는 것이었다. 수화기 너머 아내는 계속해서 흐느끼고 있었다.

워낙 건강이 좋지 않으셨고, 2년 전 교통사고로 인해 큰 고비를 한 번 넘겼던 탓에 오늘 같은 날이 예상보다 일찍 올 수도 있을 거라고 항상 막연하게나마 생각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막상 장인어른이 돌아가실 수도 있다는 소식을 들으니 나 역시 황망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한낱 사위도 이 정도인데 딸자식은 오죽하겠는가.

아버님, 편히 잠드세요
▲ 스킨십에 강한 사위 아버님, 편히 잠드세요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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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하자마자 식구들을 모두 차에 태우고 아버님이 누워 계신다는 진주로 향했다. 태어난 지 갓 한 달 된 셋째를 데리고 먼 길을 떠나는 것이 옳은지 아주 잠깐 망설였지만, 그래도 외할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이 될 수도 있는데 한 번은 뵈어야지 않겠느냐며 녀석을 카시트에 태웠다.

진주 가는 차 안. 아이들은 금세 잠들었지만, 아내의 간헐적인 흐느낌이 숨이 멎을 듯한 적막을 깨고 있었다. 그래도 한 다리 건넌 사위로서 평정심을 유지한 채 아내를 위로하려 했지만, 나 역시 끝내 전화 한 통에 무너지고 말았다. 장인어른이 20시쯤 이미 유명을 달리하셨으니 진주 병원이 아닌 산청 장례식장으로, 너무 속도 내지 말고 천천히 오라는 소식을 들은 것이다.

비록 평소에도 건강이 좋지 않으셨지만, 그래도 워낙 불사조같이 몇 번의 위기를 넘겼던 분이시라 적어도 10년은 더 사실 줄 알았건만 겨우 작년 환갑을 지내시고 돌아가시다니. 그동안 장인어른과 함께한 세월을 떠올리려니, 그리고 남겨진 유족의 슬픔을 가늠하자니 턱턱 목이 메어왔고 눈물이 앞을 가렸다. 특히 나와 아내를, 그리고 우리의 자식들을 가장 사심 없이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이 한 명 줄었다는 슬픔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겨우 정신을 수습한 뒤 장인의 부고를 여기저기 알리기 시작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느꼈던 바, 결혼식장에는 못 가도 장례식장에는 가는 것이 인지상정인 만큼 슬픔을 반으로 나누기 위해 연락을 돌렸다. 장례식장이 생활반경인 서울로부터 너무 먼 산청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지만, 어쨌든 그건 부고 소식을 받은 사람들의 몫이려니. 난 그저 장인어른의 부고를 전할 뿐이었다.

죽음의 의미... 할아버지의 부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장모님의 뒷모습
▲ 떠난 이와 남은 이 장모님의 뒷모습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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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뭐지?
▲ 할아버지 사람들이 울어요 죽음이 뭐지?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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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1시간을 운전했을까? 이제는 부고 소식을 돌리기에도 늦은 시간. 캄캄한 어둠 속에서 앞만 주시한 채 운전하고 있는데 문뜩 한 가지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장인어른의 죽음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막막해진 것이다. 외가에 가면 늘 지켜보시던 할아버지의 부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아직은 세상 모든 것이 마냥 신기하고 아름다울 천둥벌거숭이들. 죽음을 인지한다는 것은 결국 에덴동산에서의 퇴출을 의미하는데, 내게 녀석들을 순수의 나라로부터 끌어내리는 권한이 있는 것일까? 녀석들이 자연스럽게 죽음을 인지할 때까지 기다려야 할까?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불현듯 90년대 중반 마흔이 채 되지 않아 간암으로 세상을 떠난 포항 이모부가 떠올랐다. 그의 죽음은 당시 고등학생이던 내게 죽음의 의미를 다시금 환기해주는 계기가 되었는데, 난 이모부 죽음을 보면서 죽음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음을, 우리는 언제나 죽을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막연하게 남의 이야기로 인식하던 죽음을 삶의 하나의 과정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모든 인간은 죽는다는 명제의 위대함.

슬픈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까꿍이
 슬픈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는 까꿍이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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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운전하는 내내 나는 자연스레 그때 내게 큰 위로가 되었던 노래를 속으로 읊조리고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당시 유행하던 가요 넥스트의 '날아라 병아리'였다. 내가 기억하는 죽음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그 노래.

육교 위의 네모난 상자 속에서 나와 만난 노란 병아리 얄리는
처음처럼 다시 그 상자 속으로 들어가 우리 집 앞뜰에 묻혔다
나는 내게 처음 죽음을 가르쳐준 1974년의 봄을 아직 기억한다
……
눈물이 마를 무렵 희미하게 알 수 있었지
나 역시 세상에 머무르는 건 영원할 수 없다는 것을

"할아버지 안녕"... 난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버님의 선물
▲ 처가의 봄 아버님의 선물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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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도착한 장례식장. 장모님은 우리를 보자마자 눈물을 쏟으셨고, 우리는 그런 장모님을 모시고 우리를 기다리느라 아직 입관되지 않은 장인어른을 뵙기 위해 영안실로 곧장 향했다.

"아버님, 사위 이 서방이 왔습니다."

다행히 오랜 간경화에도 불구하고 장인어른의 얼굴은 깨끗했고 평온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바, 장인어른은 의료원에서 치료를 받으시다가 갑작스러운 쇼크로 유언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쓰러지셨다고 했는데, 얼굴에는 그런 급작스러움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장모님 말씀대로 장인어른이 추운 겨우내 자신의 건강이 점점 악화되는 걸 알고 나름대로 주변을 정리했기 때문이었을까? 못난 자식들은 그것도 모르고 셋째가 너무 어려서 꽃 피는 봄에나 내려가겠다고 했으니 원.

싸늘하게 누워있는 장인어른을 보면서 모든 이들이 눈시울을 적시고 있던 그 순간, 전혀 반응이 없는 둘째와 달리 어쩔 줄 몰라 하는 첫째 까꿍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항상 자신을 보면 기쁘게 반겨 주시던 외할아버지가 아무 말 없이 눈 감은 채 누워 미동도 하지 않고, 사람들은 그런 외할아버지를 보고 눈물을 흘려대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결국, 녀석은 사람들의 울음소리 때문에 덩달아 울음을 터뜨렸고, 난 그런 녀석을 붙들고 달래면서 할 수 있는 만큼의 설명을 해 주었다.

"이제 외할아버지 못 봐. 저기 먼 하늘나라 가셨거든. 까꿍이도 마지막으로 인사해야지."

죽음도 하나의 과정이거늘
▲ 마냥 즐거운 아이들 죽음도 하나의 과정이거늘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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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으레 그렇듯이 장례식장은 많은 사람들로 북적였으며, 난 상주로서 까만 양복을 입고 수많은 조문객과 맞절을 했다. 장인어른이 인덕이 많은 분이시라 많은 분들이 진심으로 함께 슬퍼해 주셨으며 위로해 주셨다. 특히 아내와 나의 손님 중 일부는 멀리 서울에서부터 일부러 산청에까지 와주었는데 그 고마움은 말로 헤아릴 수 없었다. 두고두고 갚아야 하는 우리의 몫이려니.

만 이틀 밖에 되지 않았지만, 장례식은 그 어느 예식보다도 고단했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무엇보다 감정을 가장 많이 소진했기 때문이다. 하나같이 지쳐있는 일가 친족들에게 그나마 활력을 주는 건 역시 아무것도 모른 채 마냥 많은 사람을 만나서 기쁘다며 뛰어다니는 장인어른의 손주들이었다. 남편 사진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다가도, 뭣도 모르는 철없는 손주들의 재롱에 또 금세 웃음을 지으시는 장모님. 그래 삶이란 것이 원래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려니. 

어느덧 장례식의 마지막 절차 하관식. 신부님의 말씀이 끝나고 장모님부터 흙 한 삽씩 장인어른의 관 위로 흩뿌리기 시작했다. 다시 비장한 얼굴로 고인과의 이별을 고하는 사람들. 나 역시 그렇게 흙을 흩뿌린 뒤 까꿍이를 안고 있었는데 갑자기 녀석이 이렇게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할아버지 안녕."

오열하는 아빠와 걱정하는 딸
 오열하는 아빠와 걱정하는 딸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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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난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내가 말리기까지 오열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의 그 한 마디가 왜 그렇게 서럽고 슬펐는지. 어쩌면 녀석은 죽음의 의미를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얼마 살지 않은 만큼, 움켜쥐고 싶은 미련이 없기에 고인을 쉽게, 기꺼이 보내드리는 것 뿐. 아이들은 어릴수록 아직 생전의 에덴동산을 기억하고 있다지 않은가. 그러니 외할아버지의 죽음이 어른들만큼 안 슬플 수밖에.

할아버지의 선물
▲ 지금 소축사에는 할아버지의 선물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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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관식을 끝내고 다시 돌아온 산청 처가. '여기는 열매가 떨어지면 툭 하고 소리가 들리는 세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까꿍이가 외가 거실에 들어서며 장모님께 또 다 큰소리를 하는 것이었다.

"이제 외할머니 혼자살아야하네요. 어떡하지? 음... 그럼 외삼촌하고 같이 사세요. 꼭 그렇게 하세요."

잔망스러운 것. 이 녀석 진짜 죽음의 의미를 아는 것은 아닐까?

까꿍이와 산들이의 손을 잡고 장인어른이 안 계신 처가를 둘러보았다. 아내가 이야기 한대로 장인어른의 선물 목련이 만개하기 직전이었고, 돌아가시기 전 정리를 다 하셨다는 소들이 있던 자리에는 손주들이 오면 볼 수 있도록 준비해 놓은 듯 닭이며 오리, 칠면조들이 활개치고 있었다. 축사가 마치 동물원 같다며, 갓 꺼낸 달걀을 들고 무척이나 좋아하는 아이들.

할아버지의 또다른 선물
▲ 토끼 먹이주기 할아버지의 또다른 선물
ⓒ 정가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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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 고맙습니다. 당신의 자손들은 이렇게 당신을 기억하며 또 하루를 영위해 나갈 듯싶습니다.


태그:#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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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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