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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쳅수트 장제전은 정말 명당에 자리 잡고 있다

하쳅수트 장제전 가는 길
 하쳅수트 장제전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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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의 계곡에서 하쳅수트(Hatshepsut) 장제전까지는 차로 10분쯤 걸린다. 차에서 내리니 앞으로 거대한 산이 병풍처럼 펼쳐진다. 그리고 그 산 앞에 3층짜리 신전 건물이 보인다. 이것이 그 유명한 하쳅수트 장제전이다. 그런데 장제전까지 거리가 꽤나 멀어 전동차를 타고 간다. 그 사이 날씨가 꽤나 더워졌다. 햇볕도 강렬해졌다. 그래선지 벌써 햇볕을 피하게 된다.

전동차를 타고 가면서 보니 장제전을 감싸고 있는 산의 좌우 절벽에 구멍들이 보인다. 오른쪽 절벽의 구멍은 콥틱 교도들이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이곳에 집을 짓고 산 흔적이라고 한다. 그리고 왼쪽 절벽의 구멍은 파라오의 무덤이라고 한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왕가의 계곡에 있는 파라오의 무덤이 자꾸 도굴되자, 미라가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이 절벽에 굴을 파고 미라를 다시 안치했다는 것이다.

푼트에서 가져 온 흑단나무
 푼트에서 가져 온 흑단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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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동차를 내려서도 장제전까지는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 그런데 근방에 특이한 나무 그루터기가 하나 있다. 뿌리와 밑둥만 남았는데, 하쳅수트 여왕이 푼트(Punt)를 원정할 때 가지고 온 나무라고 적혀 있다. 그 나무가 흑단(ebony)나무라고 한다. 푼트는 이집트의 동남쪽 홍해 주변에 있던 나라다. 지금으로 말하면 에리트리아, 지부티, 소말리아 지역이다. 이집트는 이 지역에 있던 푼트와 교역하면서 향료, 흑단, 가축, 황금, 상아, 동물 가죽 등을 얻을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나는 장제전까지 걸어가면서 이곳의 풍수를 살펴본다. 풍수는 장풍득수의 준말로, 자연이 어떻게 집이나 무덤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지를 살펴보는 과학적 방법론이다. 사람이고 집이고 바람을 막아주고 물이 풍부해야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 장제전은 우선 양택 풍수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집 뒤를 감싸고 있는 배산은 아주 훌륭하다. 좌우로 이어지는 산줄기도 좋다. 그런 의미에서 장풍은 아주 잘 되는 편이다.

하쳅수트 장제전
 하쳅수트 장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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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는 득수다. 이곳에서는 물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강수량이 적어서이기도 하지만, 비가 온다고 해도 골짜기 사이로 쭉 빠져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나일강이다. 나일강이 저 멀리 남북으로 흐르기 때문에 장제전에 직접 영향을 끼칠 수는 없다. 그렇지만 1970년 아스완 하이댐 건설 후 수로를 만들면서 나일강물이 장제전 근방으로 지나가게 되었다. 이를 통해 득수라는 개념도 어느 정도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하쳅수트 장제전은 황량하기는 하지만 명당임에 틀림없다. 멀리서 보아도 웅장하고 신성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또 3500년 전 만들어진 이곳을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만 보아도 명당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끊임없이 장제전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들어가면서 보니 풍경이 정말 멋지다. 파란 하늘,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황토색의 육산, 그 안에 대칭으로 들어앉은 3층짜리 건물, 사당 또는 묘당으로는 최고의 조건을 갖추고 있다.

하쳅수트를 기리는 장제전 건축과 부조 그리고 그림 이야기

장제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장제전으로 들어가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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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사당을 지은 사람은 하쳅수트 여왕 아래서 수상을 지낸 건축가 세네무트(Senemut)이다. 그는 15년에 걸쳐 하쳅수트 장제전을 건설했을 뿐 아니라, 카르나크의 아문 신전도 건설했다. 장제전은 앞마당, 계단과 경사로가 있는 1층 열주실, 계단과 경사로가 있는 2층 열주실, 지성소가 있는 3층 열주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므로 전면에서 장제전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우리는 안마당을 지나 1층 열주실 위로 올라가는 계단과 경사로 앞에 선다. 그곳에는 신전을 지키는 매 두 마리가 경사로 좌우에서 우리를 지켜본다. 날개를 길게 펼치고 발톱으로는 태양을 잡고 있다. 여기서 태양은 라신을 상징한다. 계단을 따라 오르면 1층 열주실의 지붕이 되는데 이곳은 또한 큰 마당을 형성한다. 이곳에서 다시 2층 열주실 위로 올라가는 계단과 경사로를 따라 올라간다. 그러면 바로 3층의 하쳅수트 석상이 있는 열주 앞에 이르게 된다.

장제전 3층의 하쳅수트상
 장제전 3층의 하쳅수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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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먼저 하쳅수트 석상을 살펴본다. 모두 26개인데, 그 중 몇 개는 떨어져나가고 없다. 이들 상은 다른 신전의 파라오보다 훨씬 더 여성적으로 생겼다. 그것은 실제 하쳅수트가 여성으로서 파라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투트모스(Tutmose) 1세의 딸로 태어났으나, 여성이어서 파라오가 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배 다른 동생인 투트모스 2세와 결혼해 왕비가 되었다. 그리고 딸인 네페루레를 낳았다.

1479년 투트모스 2세와 이셋(Iset)의 아들인 투트모스 3세가 왕위를 계승하자 그의 섭정으로 1458년까지 이집트를 통치했다. 그러므로 그녀는 22년 동안 실질적인 파라오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인해 그녀가 죽자 투트모스 3세는 하쳅수트 여왕을 격하시키기도 했다. 그러한 흔적은 이곳 장제전 2층 테라스의 서쪽 벽뿐만 아니라, 카르나크 신전의 하쳅수트 오벨리스크에서도 훼손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장제전 3층 안마당 문과 지성소
 장제전 3층 안마당 문과 지성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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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하쳅수트 석상이 있는 열주의 가운데 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신전 안마당이 나온다. 마당에는 다시 네모난 문과 훼손된 기둥들이 서 있다. 전체적으로 기둥과 덮개가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들을 지나면 벽감 형식으로 파인 공간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아문신을 섬기는 지성소다. 그렇지만 지성소 안에는 별다른 부조나 조각품을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을 보고 나온 우리는 2층 열주실로 내려가 왼쪽의 푼트 원정홀(Punthalle)과 오른쪽의 하쳅수트 탄생홀(Geburtshalle)을 살펴본다. 이들 벽에는 기원전 1471년 배를 타고 푼트 지역을 원정하는 이집트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리고 하쳅수트가 신의 딸로 태어나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푼트 원정홀 밖으로는 하토르에게 바친 경당이 있고, 하쳅수트 탄생홀 밖으로는 아누비스 경당이 있다. 여기서 하토르가 탄생의 신이라면, 아누비스는 죽음의 신이다.

하토르상
 하토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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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토르 경당에는 소의 형상을 한 하토르 여신의 부조가 있다. 그리고 아이가 하토르의 젖을 빨고 있는데, 이 아이가 바로 하쳅수트다. 경당의 기둥 머리(柱頭)에는 하토르 여신의 머리 부분이 입체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여기서 하토르는 파라오를 낳고 기르는 어머니로 나타난다. 이들 기둥 안으로 들어가면 벽감이 있고, 그 안이 하토르를 위한 지성소다. 그런데 이곳의 문과 벽에 있던 하쳅수트라는 이름 상당수가 그녀의 사후 투트모스 3세로 바뀌기도 했다. 

아누비스 경당에는 4개의 기둥이 세 줄로 나란히 있고, 그 안에 지성소가 있다. 그리고 경당 벽에는 자칼을 형상화한 아누비스가 있고, 오시리스와 라-하락티도 있다. 이들은 모두 저승세계를 지배하는 신으로 하쳅수트를 보호하는 역할을 한다. 이들 경당을 보고 2층 테라스를 지나 다시 1층 계단 쪽으로 가면서 나는 앞으로 펼쳐진 골짜기를 내려다본다. 골짜기를 지나 멀리 나일강이 있고, 그 너머로 룩소르 시내의 건물들이 보인다.

아누비스상
 아누비스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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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전을 나오면서 보니 아직도 곳곳에서 발굴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 장제전 입구에는 탑문의 일부가 서 있는데, 조각들은 거의 떨어져 나가고 벽돌부분이 드러나 보인다. 이곳 장제전에서 다시 버스를 탄 우리는 라메세움을 지나 메디나 마을로 간다. 라메세움은 람세스 2세 장제전으로, 폭 60m의 탑문과 48개의 열주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우리는 이곳에 내리지 않고 그냥 스쳐 지나간다.

메디나 마을에 살던 장인 이야기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아메노피스 3세 장제전이다. 그런데 중간에 메디나 마을(Deir el-Medina)을 지나게 되어 있다. 이곳 메디나 마을은 신왕국 시대 왕가의 계곡에 묻힌 파라오의 무덤을 조성하는데 참여했던 장인들의 거주지였다. 그들이 무덤의 모든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주민들로부터 격리시켜 이곳에서 독자적인 삶을 영위토록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 일이 없거나 경제적인 지원이 시원치 않을 때,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한 방편으로 도굴을 시작하게 되었다.

아직도 남아 있는 메디나 마을
 아직도 남아 있는 메디나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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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람세스 4세 통치 시기(기원전 1155-1149) 외적과의 전쟁 준비로 메디나 마을에 대 식량 공급이 원활치 않았다. 이에 불만을 품은 장인들이 파라오의 무덤을 도굴했고, 장관이 파견되어 이들 도굴범들을 잡아 심문하는 일이 발생했다. 도굴범들은 처벌을 받았으나, 도굴된 물건들은 다시 무덤으로 돌아가지 않고 보물창고에 보관되었다. 그 후에도 장인들은 경제적으로 어려워질 때마다 도굴의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프랑스 작가인 크리스티앙 자크(Christian Jacq)의 4부작 <빛돌(The Stone of Light) 시리즈> 제4권 <진실한 장소(The Place of Truth)>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진실한 장소'는 데이르 엘-메디나의 옛 이름 '세트 마트(Set Maat)'를 번역한 것이다. 그것이 무슬림 시대 '수도원 마을'이라는 뜻을 지닌 아랍어 데이르 엘-메디나로 바뀌었다.   

아메노피스 3세 장제전에 있는 멤논의 거상은 또 뭐야?

멤논의 거상
 멤논의 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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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마을을 지나 동쪽으로 난 길을 따라가면 야자수와 농경지가 보이기 시작한다. 이들 사이로 아메노피스 3세(통치기간: 기원전 1391-1353) 장제전 유적이 있는데, 현재 발굴 중으로 유적지 안으로 들어갈 수가 없다. 단지 장제전 입구에 있는 두 개의 거상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장제전에 모셔진 아메노피스 3세의 좌상으로 무너진 탑문 앞에 나란히 앉아 있다. 이들 거상은 그리스 시대 멤논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멤논이라는 이름은 잘못 붙여진 것이다. 멤논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로, 에티오피아의 왕이 되어 트로이 전쟁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리스 장군 아킬레스에게 죽음을 당했고, 나중에 제우스의 도움으로 되살아날 수 있었다. 이처럼 잘못된 이름을 얻게 된 것은 그리스의 역사학자인 스트라보(Strabo: 기원전 63-23) 때문이다.

테예 조각상
 테예 조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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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7년 룩소르 지역에 지진이 일어났고, 그로 인해 아메노피스 3세 석상에 균열이 가게 되었다. 기원전 24/25년 이 지역을 여행하던 스트라보는 석상 아래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그런데 여명이 밝아올 무렵 석상의 균열 사이에서 바람소리가 나는 것을 듣게 되었다. 스트라보는 이 소리가 아들 멤논을 잃은 어머니 에오스의 울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이 석상을 멤논이라고 생각했고, 이 석상에 멤논의 거상이라는 이름을 붙이게 된 것이다.

멤논의 거상은 얼굴과 가슴 부분이 크게 훼손되어 그 모습을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두 팔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올린 채 옥좌 위에 앉아 있다. 그리고 무릎 오른쪽에는 아메노피스 3세의 부인인 테예(Teje)가, 왼쪽에는 어머니인 무템비아(Mutemwia)가 서 있다. 그 중 남쪽 석상의 오른쪽에 있는 테예의 조각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석상 측면의 부조
 석상 측면의 부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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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상의 측면에는 신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부조와 상형문자가 새겨져 있다. 나일강의 범람을 주관하는 신 하피(Hapi)가 상 이집트를 상징하는 연꽃과 하 이집트를 상징하는 파피루스를 하나로 묶고 있는 모습이다. 상형문자는 석상에 사용된 돌의 원산지를 밝히고 있다. 나일강 하류 헬리오폴리스 동쪽 아흐마르산의 채석장에서 나왔다고 적고 있다. 그런데 최근 돌을 분석해본 일부 학자가 아스완 서쪽 굴랍산이나 팅가르산의 규암으로 만들어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멤논의 거상은 그리스와 로마시대 많은 사람들이 방문했다. 이 거상이 내는 소리를 들으면 행운을 만나게 될 거라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이다.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Tacitus)도 그러한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고,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Hadrianus)도 아내와 함께 그 소리를 듣기 위해 멤논의 거상을 찾았다. 당시 황제 부부는 궁중 시인인 룰리아 발빌라(Lulia Balbilla)를 대동했고, 그녀는 그리스어로 된 네 편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멤논의 거상
 멤논의 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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멤논의 거상은 그 높이가 기단을 포함해서 18m나 된다. 남쪽의 석상은 기단이 3.3m 좌상이 13.97m로, 전체 높이가 17.27m다. 북쪽의 석상은 이보다 조금 더 커 기단이 3.6m 좌상이 14.76m로, 전체 높이가 18.36m다. 그리고 남쪽 석상의 무게는 720t, 기단의 무게는 500t이나 나가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들 석상에 대한 연구와 보존 작업은 현재 독일과 이집트 고고학자들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태그:#하쳅수트 장제전, #푼트 원정, #투트모스 3세, #메디나 마을, #멤논의 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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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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