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른바 '대항해 시대'로 불리는 16세기. 영국 북부 요크셔의 한빈한 가정에서 태어난 제임스 쿡(James Cook)은 몇 차례의 모험적인 항해를 통해 여왕의 총애를 얻어 해군 제독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귀족이 군의 지휘관을 독점하던 시절. 전례가 드문 일이었다.

그가 선단을 이끌고 태평양과 북극해, 베링해와 폴리네시아 군도를 헤매던 시절엔 해도(海圖)가 없었다. 그 막막한 바닷길을 오로지 별과 달 그리고 견인불발의 용기만으로 개척해나간 것이다. 오늘날 뱃사람들이 의지하는 해도의 대부분은 제임스 쿡이 제작의 단초를 제공했다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게는 길을 알려준 전범도 스승도 없었다.

지난 2009년 '창비 신인 시인상'을 받으며 등단해 최근 첫 작품집을 상재한 주하림(27)의 시를 읽는다는 건 '해도 없이 바다를 떠도는 것'과 유사한 체험을 독자에게 제공한다. 그의 시는 어떤 사조에 기댄 흔적이 없고, 이전의 어떤 시인과도 닮지 않았다. 이채롭고 돌올하다. 전범과 스승 없이 스스로 해도를 만들어가려는 의지를 곳곳에서 내비친다.

다소간 거친 분류가 될 수 있겠으나, 한국 현대시는 미당(서정주)과 소월(김정식)을 대표주자로 내세울 수 있는 서정적 성향과 이상(김해경)과 김수영을 중심축으로 하는 근대 이후 모더니즘적 경향으로 대별될 수 있다. 헌데, 이 젊은 시인은 두 가지 조류 모두에서 훌쩍 비껴나 있다.

어느 것과도 닮지 않았다는 것, 새로움의 출현

 시집 표지.
시집 표지. ⓒ 창비
굳이 포커스를 좁혀 세밀하게 들어가면 유사한 사례를 찾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주하림의 선배 시인격인 김언희(60)와 김민정(37). 서사가 아닌 이미지 중심의 시적 전개와 성적 묘사의 과감성, 전통적 의미의 시어 배제 등에서 주하림은 얼핏 그들과 닮은 듯 보인다.

그러나, 꼼꼼히 들여다보면 이것도 답은 아니다. 셋은 유사한 유전인자를 가졌으되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진 이복의 자매이지, 동일한 핏줄이라고 보기 힘들다. 김언희의 부성(父性·권위의 상징) 부정과 주하림의 권위 조롱은 동질(同質)의 것이나 이형(異形)이다. 김민정이 보여주는 '날것의 언어'를 주하림도 사용하고 있으나, 이것들이 배태(胚胎)된 공간 사이의 거리는 멀다.

말머리가 길었다. 일단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로 명명된 주하림 첫 시집의 몇 작품을 함께 읽어보자.

…그녀 몸짓은 점술가라기보다 집시에 가까웠고 종종 그녀의 뜨거운 다리 사이로 내 것을 거칠게 밀어넣었다 흑발로 자라나는 저녁//우리는 우리가 지나왔던 수많은 정원에 아무렇게나 꽂혀있고/지나쳤던 입술들에게 나는 무엇으로 불리고 있을까…
- 위의 책 중 '빠리의 모든 침대가 나의 고향' 중 일부.

…어디선가 냄새가 난다 글 잘 쓰는 사람들에게서 올리브 냄새가/아니 호두 냄새/호두의 기가 막힌 젖 냄새…
- 위의 책 중 '미찌꼬의 호사가들' 중 일부.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아파트/벽면을 타고 뻗은 까만 버찌나무 왼팔에 매달린 애디의 유령/떨리는 연둣빛 입술을 벌려 버찌를 넣어준다.
- 위의 책 중 '체코의 귀 슬로바키아 뒷골목에서' 중 일부.

…나의 물이 달아서 좋다는 남자; 진실에 이르는 계절들에게서 갈색빛이 난다 부디 그 슬픔 너라면 견딜 수 있었을까… 꽃들은 어둠 속에서 폭죽으로 펑펑 터지고 나는 눈먼다…
- 위의 책 중 '병동일지 902' 중 일부.

시 속에 숨겨진 그림을 찾아내는 건 독자의 즐거운 권한


 최근 첫 시집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을 출간한 시인 주하림.
최근 첫 시집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을 출간한 시인 주하림. ⓒ 홍성식
전통적 시 독법에 익숙한 독자들이나, 시를 잘 읽지 않는 요즘 세대에게 주하림의 언어는 요령부득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눈 밝은 평자라면 주하림이 '숨은그림찾기'처럼 직조해놓은 퍼즐 속을 항해할 해도를 찾아낸다.

젊은 문학평론가 안지영은 주하림의 시 속에서 곧잘 발견되는 절규를 '파편화된 개인의 일상 속에서 영혼마저 소진되어버릴 듯한 절망과 일상에 대한 증오의 분열증적 양상'으로 읽어낸다. 거기에 더해 시인의 증오와 분노는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전망을 향해있다고 있다고 진단한다. 아래와 같은 말을 통해서다.

"주하림의 시를 빛나게 하는 것은 시 전면에 내세워진 증오나 분노가 아니다. 자신의 영혼을 구원해줄 수 있는 것이 이 도시에 없음을 알면서도 죽어가는 애디의 입에 한 알의 버찌를 넣어주는 행위를 통해 희미하나마 어둠을 밝힐 빛을 뿜어낸다. 이런 안간힘 때문에 시들의 후일담이 궁금해진다."

주하림이 첫 시집에서 쏟아낸 언어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과 닮았다. 시적 공간은 남아메리카 해변에서 갑작스레 눈 내리는 유고슬라비아의 옛 연방국으로 이주를 거듭하고, 시간 역시 서울의 뒷골목과 프랑스 기차역을 오가며 역행과 회귀, 혼란과 혼선으로 복잡하게 얽혀든다. 하이틴로맨스처럼 술술 읽히는 시집은 결코 아니다.

그럼에도 주하림의 시를 읽는 것은 가치 있는 행위다. 지난 시절 제임스 쿡이 해도 없이 드넓은 바다 위를 헤매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낸 것처럼. 왜냐? 처음부터 익숙한 문화·예술이란 애초에 없었으며, 논란과 어깨동무를 하고 오는 '낯선' 문학의 해석권한은 고래로부터 온전히 독자들의 몫이기 때문.

이와 관련해 이미 일흔을 목전에 둔 원로 비평가 황현산(68)의 태도가 눈에 띈다. 그는 주하림의 시를 찬찬히 살펴 읽어 '유랑'이란 키워드를 찾아내고는 "다른 시절에도 유랑은 가장 치열한 정치시를 포함한 모든 시의 꿈이었다"는 말로 막 문학적 첫걸음 내디딘 후배를 격려했다.

'한국문학의 새로운 징후'라고 이름 해도 좋을 주하림의 시. 그것들 속을 항해하는 건 고통스런 희열 혹은, 희열 속의 고통일 수 있다. 문학을 해독하는 자신만의 새로운 해도를 만들고자하는 독자들에게 특별히 권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담 하나.

모두가 알다시피 주하림의 시집을 출간한 '창비'는 그 태생에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시집 제목에 성적인 이미지가 개입하는 걸 경계해왔다. 주하림은 이런 창비를 설득했다고 한다. 그 기개가 보통 아니다.

지금으로부터 19년 전인 1994년. 창비에서 출간돼 낙양의 지가를 올린 최영미의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기억하는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논의되던 그 시집의 제목은 <마지막 섹스의 추억>이었다.  


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

주하림 지음, 창비(2013)


#주하림#비벌리힐스의 포르노 배우와 유령들#제임스 쿡#새로운 시적 경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