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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빛을 등지고 손을 잡고 걷는 연인의 모습이 마치 아지랑이인양 살갑습니다.

기운을 얻은 햇볕은 이미 대지위의 눈을 모두 거두었고 햇살에 데워진 공기는 헤이리를 봄기운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지난 5일은 경칩이었습니다. 동면하던 동물들이 활동하기 시작한다는 날이지요.

경칩날에 물이 괸 곳을 찾아 개구리나 도롱뇽 알을 건져다 먹으면 몸이 건강해진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새봄, 새 생명을 통해 생명력을 얻으려 했을 테지요.

수생태해설가인 제 친구 한상준은 분당의 맹산공원에서 벌써 개구리알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너무 이른 산란으로 얼음장에 덮여 동사가 우려되는 개구리알과 물이 빠져버려 말라가고 있는 개구리알들. 탄생에 앞서 자연은 냉혹한 시련을 줍니다. 시련을 견뎌낸 개체만이 경이로운 세상을 즐길 자격을 얻는 것이죠. by 한상준
 너무 이른 산란으로 얼음장에 덮여 동사가 우려되는 개구리알과 물이 빠져버려 말라가고 있는 개구리알들. 탄생에 앞서 자연은 냉혹한 시련을 줍니다. 시련을 견뎌낸 개체만이 경이로운 세상을 즐길 자격을 얻는 것이죠. by 한상준
ⓒ 한상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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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사한 햇살에 취해 있을 때 낯익은 분이 정원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파주시야생화연구회의 김금자 선생님이었습니다.

이 분은 원산에서 태어나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부모님의 등에 업혀서 남쪽으로 내려오신 분입니다. 어쩐지 북쪽이 좋고, 산이 좋아 서울에서 파주 법원읍 금곡리의 산 중턱으로 집을 옮기고 야생화를 벗 삼아 사신지 22년째입니다. 김선생님도 동면에서 깬 개구리 소식을 전했습니다.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은 것이 벌써 일주일 전입니다. 파주에서도 개구리는 벌써 잠에서 깼습니다."

파주의 개구리 소리, 분당의 개구리알이 '개구리알을 건져먹는다'는 경칩의 속신(俗信)에 틈 없이 부합(符合)합니다.

언 땅은 전혀 녹지 않았지만 김선생은 헤이리 정원의 상태가 궁금해서 오셨습니다. 들꽃이 좋아 22년 이상 우리의 산을 어머니 품 삼아 산에 안겨서 살아온 62세의 산처녀에게 그동안 궁금했던 식물의 세계에 대해 몇 가지를 물었습니다.

파주시야생화연구회의 김금자선생님
 파주시야생화연구회의 김금자선생님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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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바닥만 한 이 정원에서 매년 피고 지는 들꽃들만 해도 숫자를 헤아리기가 어렵다. 또한 이웃한 동산의 떡갈나무·신갈나무·상수리나무 등 참나무류와 밤나무·산벚나무 만의 친구가 되기도 어렵다. 그런데 온 산의 들꽃 형편에 그렇게 소상한가?
"사랑과 세월이 필요하더라. 사랑하게 되면 엎드려 들여다보게 되고 자주 들여다보면 비슷한 것들조차 확연히 다른 점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매 계절마다 모습을 바꾸는 그들의 형편에 익숙해지기 위해서는 또한 시간이 필요하다. 오랫동안 사랑하면 마침내 들꽃과 나무들의 친구가 될 수 있다."

- 야생화나 나무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되면 우선 그에 관한 책을 찾게 되는데...
"책을 통해 기초지식을 쌓는 것이 좋다. 하지만 책만으로 알 수 없는 게 자연이다. 들과 산의 자연으로 들어가지 않고 어떻게 자연을 잘 아는 친구가 될 수 있겠는가? 결국 자연과 대면해야 친구가 될 수 있다."

- 선생님은 책이 아닌, 자연 속에서 홀로 들꽃들의 친구가 됐나.
"산을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과 산을 찾았다. 그 그룹 중에는 나처럼 들꽃을 좋아하는 사람,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 약초를 깊이 알고자하는 사람 등 그 취향이 조금씩 달랐다. 함께 전국의 산, 특히 강원도 산을 오르내리면서 자연에 익숙해질 수 있었다."

- 화초나 잡목들도 어떤 해는 꽃이 유난히 곱다가 어떤 해는 꽃이 피지 않기도 하고 열매가 형편없기도 하던데.
"화초의 경우 영양이 풍부하면 꽃이 피지 않는 경우가 있다. 오히려 척박해야지 꽃이 곱게 핀다. 나무의 열매도 마찬가지다. 적당히 위기의식을 느껴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대를 이를 준비를 한다."

- 정원의 풀은 완전히 제거해야 옳은가? 나는 풀도 아름답더라.
"화초의 경우도 풀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보다 한두 포기 옆에 두는 것이 좋다. 화초만 있는 경우 더디게 자란다. 풀이 옆에 있으면 생육 속도가 훨씬 빠르다. 식물도 적당한 경쟁상대가 없으면 게을러진다. 넝쿨을 올리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가지만을 올리는 경우보다 두 가지를 함께 심어 올리면 좋은 벽면을 서로차지하기위해 치열하게 퍼진다."

- 난 정원을 방치하는 방식인데 처음에 심었던 잔디는 3년째 되던 해에 적지 않은 부분이 토끼풀에 점령당했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질경이가 다시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것은 무슨 조화인가?
"식물들은 일단 자리 잡은 곳에서 최대한 세력을 넓힌다. 그런데 그곳이 그 식물에게 좋은 조건이 되지 못한다면 다음해에는 새로 날아와 번식을 시작한 다른 식물에게 점령당하고 만다. 그러므로 적절하지 못한 곳에서 필요이상 세력을 키우면 자멸의 길을 걷게 된다.

- 땅이 녹으면 조경을 위해 새로운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 많을 텐데, 구덩이 아래에 거름을 넣는 경우도 있더라. 옳은 경우인가?
"잘못됐다. 옮겨 심는 나무에게 좀 더 많은 영양을 공급해 활착을 빨리하도록 하겠다는 욕심의 결과이다. 나무는 맨땅에 심어야 한다. 거름을 넣고 그 위에 바로 나무를 심으면 거름이 부패하면서 가스가 발생하게 되고 결국 나무는 죽게 된다. 거름을 넣고 싶다면 더 깊이 구덩이를 파고 거름을 넣고 맨흙을 두텁게 덮은 다음 나무를 심어야 한다."

땅위의 눈은 녹았지만 갈대늪의 얼음은 살얼음으로 남았습니다.
 땅위의 눈은 녹았지만 갈대늪의 얼음은 살얼음으로 남았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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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이나 사람이나 어찌 그 사는 이치가 이렇게 같을까요. 부족함이 없으면 의욕이 떨어지고, 경쟁이 없으면 나태해지는 식물, 이 식물이나 사람이나 그 본능과 속성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독일의 작곡가 루트비히 판 베토벤. 악성(樂聖)으로 추앙되는 그는 그가 살았던 18세기와 19세기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음악사의 성인(聖人)임이 흔들릴 여지는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땅딸막한 키에 유난히 큰 두상, 사팔뜨기에 귀머거리였습니다. 음악사의 뛰어난 이 위인은 한 번도 연애에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전기 작가들은 그가 동정인 채로 죽었을 것이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변함없이 우리를 위안하는 그의 '영웅, 운명, 전원, 합창'의 교향곡과 '비창, 월광, 열정'의 피아노 소나타들은 그의 고독한 체념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프랑스의 사상가 쟝 자크 루소(Rousseau)의 교육론인 '에밀(Emile)'은 자신이 태어나고 9일 만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 14살에 재혼한 아버지로 부터 버림받았다는 생각이었던 자신의 방황이 바탕이 됐습니다.

데카르트와 스피노자, 칸트와 니체. 철학이라는 망망대해에서 자신만의 독창적인 사유체계를 구축한 이 사람들은 모두 사랑에 실패했으며 독신으로 평생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좌절이 이들을  위대한 철학자로 세웠습니다.

경칩날 저는 봄의 들머리를 걸었습니다. 석양은 불과 일주일 전보다 10여m나 오른쪽으로 옮겨가서 땅 밑으로 모습을 감췄습니다.

회색빛 정원에도 곧 난만(爛漫)한 봄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올해는 어떤 식물이 척박한 토양에서 경쟁을 뚫고 두드러질지 자못 궁금합니다.

경칩날 저를 깨운 것은 결핍이나 경쟁의 스트레스를 탓할 일이 아니라 묵정밭으로 남은 마음 밭부터 서둘러 일궈야겠다는 자각입니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경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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