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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이 바짝 마르고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세 번째 총성이 들린 후 밖은 잠시 잠잠해졌다. 아마도 버스 짐칸의 짐들을 모조리 빼가고 있는 중이겠거니 짐작만 할 뿐이었다. 여권과 지갑은 옷 속에 있었지만 짐칸에 넣어 둔 가방엔 그간의 여행 기록을 담은 외장하드와 메모리 카드 등 중요한 자료들과 컴퓨터와 각종 여행 장비 등 부피가 나가고 비싼 물품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다. 먼저 살아야 한다. 살아남고 다음 일을 도모해야 하지 않겠는가.

네 번째 총성이 들렸다. 누가 다쳤는지,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단 한 장면도 파악이 되지 않았다. 다들 얼어있었다. 지금만큼은 인간으로서의 존재만이 중요하다. 사회적 지위도, 우월한 미모도, 넉넉한 부도 다 부질없는 환상이다. 연이어 다섯 번째 총성이 들려왔다. 실제 야전에서 들리는 총소리의 공포가 이만할까. 한 번 솟구쳐 오른 아드레날린은 좀처럼 잦아들 줄 몰랐다. 있는 힘껏 100m 달리기를 마치고 난 뒤처럼 맥박의 리듬은 더욱 거세졌다. 볼 때마다 깊은 인상을 남긴 명작 '호텔 르완다'의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영화 속 장면이 현실이 되었고, 내가 그 안에 있었다.

"모두 밖으로 나와, 당장!"

몇 분 후, 땅바닥에 엎드리라는 말에 나는 외국인 신분 노출을 감추려 최대한 고개를 숙이고, 버스에서부터 거의 구르듯이 빠져나왔다. 다행히 따로 날 부르는 이는 없었다. 최소한 죽음은 피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처음으로 꿈틀대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에서 가장 확실한 건 아직 살아있다는 것 하나 뿐이었다. 두 손을 머리 위에 얹고 땅바닥에 고개를 파묻다시피 하고 있어야 했다. 무장 강도들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바로 목격자가 되기 때문에 뒷일은 아무도 장담 할 수 없었다. 그저 감각의 안테나를 쫑긋 세워 한 점 바람까지도 정보화 시키는 수밖에. 승객들 모두 볼모로 잡혀있는 동안 차 한 대 지나가지 않는다. 참으로 애석하다.

언제 다시 차량으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

'물건 다 가져가도 좋으니 제발 살려만 다오.'

태어나서 이렇게 갈증이 인 적이 없었다. 타들어가는 가슴을 적실 물 한 모금이 간절했다.

"꼼짝 마, 움직이면 쏜다! 가지고 있는 거 다 내 놔. 그럼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보통은 이것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강도 수법이다. 하지만 아프리카는 다르다. 더욱이 서아프리카는 또 다르다. 이들은 이런 협상 자체가 없다. 워낙 가난한 친구들인데다 이들 역시 경찰이 두렵다. 체계적이지 않은 아프리카 경찰 역시 무장 강도들이 두렵긴 마찬가지다. 서로가 서로를 불신하고, 협상 기술마저 없다. 강도가 총을 소지하고 있다? 그럼 경찰도 총으로 맞불 작전을 놓아야 한다. 그래야 산다. 그런 곳이 아프리카다. 법보다 총이 위에 있는 구역, 사람 한 명 죽어도 이슈도, 대처도 되지 않는 땅. 그러니 강도질을 하려면 목숨 걸고 해야 한다. 강도를 잡으려면 목숨 걸고 잡아야 한다.

"모두들 다시 버스에 탑승, 빨리!"

잠깐 동안 바깥바람을 마시고는 다시 전원 탑승 명령이 떨어졌다. 긴장이 다시 재점화 되고, 승객들은 누구 하나 고개를 들지 못한 채 몸을 잔뜩 웅크렸다.

얼마 후, 밖에서 당황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발자국 소리가 급히 멀어지고 있었다. 어찌된 일일까? 궁금했지만 함부로 창밖을 쳐다볼 깡 좋은 이는 없었다. 언제 다시 차량으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를 상황이었다. 옆에 승객은 내게 손가락 4개를 펴 보였다. 무장 강도가 총 4명이란다. 버스가 급정거 한 후 앞에서 달려오던 두 명 말고, 도로 양 쪽에 두 명이 더 대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기동타격대의 모습, 깜짝 놀랐다. 사건 발생 15분여 만에 현장에 출동해 승객들을 위험에서 구해줬다. 아프리카 공권력이 이렇게 감동적이고 든든하기는 처음이었다.
 기동타격대의 모습, 깜짝 놀랐다. 사건 발생 15분여 만에 현장에 출동해 승객들을 위험에서 구해줬다. 아프리카 공권력이 이렇게 감동적이고 든든하기는 처음이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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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한 분위기가 더는 참을 수 없는 궁금증을 유발시켜 사람들이 하나 둘 슬금슬금 고개 들어 창밖을 빠끔히 쳐다보던 그 때,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다. 

"경찰이다! 경찰이 왔다!"

아, 내 생에 가장 반가운 내 편의 향기여! 정말이었다. 무장한 경찰들이 우리 쪽으로 오고 있었다. 버스 안에선 감격의 환호성이 터졌다. 박수 치는 이들도 있었다. 현기증이 심했던 나는 다리가 풀려 자리에 그만 털썩 주저앉았다. 강도들은 도로 옆 정글 속으로 순식간에 도망갔다. 적들을 따돌리기엔 참으로 안성맞춤인 지형이다. 방탄복을 착용한 경찰들은 신속하게 승객들의 안전과 건강을 살피고 일부는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재빨리 주변 지역을 살피기 시작했다.

무차별 총격 속에서 기지 발휘한 용감한 형제 빈센트

버스를 장악하려한 강도가 쏜 총을 본능적으로 막다가 머리에 부상을 입은 운전기사. 기적처럼 살았던 인물 중 하나.
 버스를 장악하려한 강도가 쏜 총을 본능적으로 막다가 머리에 부상을 입은 운전기사. 기적처럼 살았던 인물 중 하나.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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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스 기사가 가리키는 운전석 바로 위에 총알 자국.
 버스 기사가 가리키는 운전석 바로 위에 총알 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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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그는 승객들 중 유일하게 강도들과 대화를 시도한 용감한 형제였다. 버스 기사가 총을 피하려다 머리에 부상을 입고, 강도들이 바깥에서 무차별 총격을 가하던 긴박했던 상황, 돌파구 마련을 위해 그는 기지를 발휘했다.

"버스에 물건들을 다 가져가도 좋소, 원한다면 승객들 몸에 있는 것들도 다 챙기시오. 신고도 하지 않겠소. 보시오, 저렇게 다들 떨고 있는데 누가 당신들을 신고하겠소? 그러니 제발 무사히 보내만 주시오. 아이들도 있습니다. 여기에 탄 사람들, 돈에 연연하지 않는 이들이에요. 서로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합시다."

국경을 넘나들며 무역업을 하는 그는 사람을 상대하는 협상에 대해선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의 아프리카 강도행각처럼 버스의 짐들을 다 빼내고 있을 거라 예상하던 시각에 사실 빈센트는 강도들과 대화를 시도하면서 차분히 시간을 끌고 있었다. 시공간의 분위기가 조금만 삐걱거렸어도 가장 먼저 운명을 달리할 수도 있는 도박이었다. 한 사람의 용기가 수십 명을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구한 것이다.

이날 위험을 무릅쓰고 강도들과 대화를 시도했던 유일한 남자 빈센트. 그의 용기가 아니었다면 사건은 또 어떻게 흘러갔을지 모른다.
 이날 위험을 무릅쓰고 강도들과 대화를 시도했던 유일한 남자 빈센트. 그의 용기가 아니었다면 사건은 또 어떻게 흘러갔을지 모른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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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장경찰이 오게 된 건 더욱 극적이었다. 누구도 감히 신고 할 수 없는 상황, 하늘이 도왔는지 한 경찰이 우연히 도로를 순찰하다 밀림 외딴 도로에 버스가 세워진 것에 수상한 낌새를 채고 바로 기동타격대를 호출했단다. 무장 강도들에게 장악당한 지 불과 15분여 만에 일이다. 지형을 생각하면 웬만한 선진국보다 빠른 출동이다. 분명 놀랍고도 위대한 대처였다.

"서아프리카 밀림이나 국경 지대는 대부분 치안 부재지역이라 강도가 자주 출몰하거든요. 그러니 아예 대중교통 자체가 끊긴 지역이 많아요. 외국인들은 당연히 못 가는 곳이고, 그 지역 사람들이 아니면 현지인이라 해도 길 통과하기가 무척 어려워요. 한 마디로 무법지대예요. 다행히 이곳은 주변에 초소가 있었어요. 강도들이 그것까지는 신경 쓰지 못했나 봅니다."

이날 가장 하늘의 은총을 입은 여인. 버스 바깥에서 강도가 쏜 총알은 그녀의 앞좌석을 뚫고 대각선 방향으로 나갔는데, 그 상황 불과 몇 초 전에 그녀는 버스 중앙 통로로 몸을 피했었다. 만약 그녀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아마 그대로 죽었을지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내 바로 앞, 옆 좌석에 앉았던 그녀를 지나친 총알은 내 왼쪽 남자의 팔을 스친 뒤 버스 뒤편에 박혔다. 이때 나는 그녀의 바로 뒤 통로에 포개어 엎드렸었고. 내 머리 위를 스친 총알이 그것이었음을 확인했다.
 이날 가장 하늘의 은총을 입은 여인. 버스 바깥에서 강도가 쏜 총알은 그녀의 앞좌석을 뚫고 대각선 방향으로 나갔는데, 그 상황 불과 몇 초 전에 그녀는 버스 중앙 통로로 몸을 피했었다. 만약 그녀가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더라면 아마 그대로 죽었을지 모른다. 유감스럽게도 내 바로 앞, 옆 좌석에 앉았던 그녀를 지나친 총알은 내 왼쪽 남자의 팔을 스친 뒤 버스 뒤편에 박혔다. 이때 나는 그녀의 바로 뒤 통로에 포개어 엎드렸었고. 내 머리 위를 스친 총알이 그것이었음을 확인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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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C 버스의 대부분의 승객들과 짐은 안전했다. 그러나 긴급 출동한 구급차에 실려 간 환자도 4명이나 되었다. 아내의 부상에 오열하는 한 남자의 절규에 분위기는 숙연해졌다. 실신한 노파를 부축하는 사람들에게서 착한 아프리카인들의 심성을 본다. 바로 내 옆에 앉은 남자는 총알이 팔에 스쳤다. 44번 승객이다. 헛웃음이 나오는 사실이다. 내 머리 위를 스쳐간 총알이 그의 왼팔도 스쳤나 보다. 부상 정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다행히 부상자들 모두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듯했다.

빈센트는 무척 드문 일이라고 했다. 보통은 밤에 출몰하는 무장 강도들이 이렇게 대낮에 대범한 범행을 저지른 점에서 그렇고, 시간이 촉박할 경우 짐칸의 물건 대신 승객들 지갑을 터는데 이번 범행에선 무슨 까닭인지 머뭇거리는 기색이 있었단다. 야간에는 반항도 못해보고 허무하게 죽는 경우가 허다한데 5발의 총격에도 사망자가 없었다는 건 자기가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라 했다. 나는 삶이란 죽음과 이렇게 가까이 맞닿아 있었나 싶은 생각에 경찰에게 양해를 구하고 수통의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어지럽게 쏟아진 유리 파편들...아찔한 시간들이 흘러갔다

경찰 조사에서 당시 상황을 재연하는 일부 승객들. 실제는 훨씬 긴박했다.
 경찰 조사에서 당시 상황을 재연하는 일부 승객들. 실제는 훨씬 긴박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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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를 통제하고, 경찰들이 사건 조사를 위해 현장을 방문했다. 조사는 약 5시간 동안 진행됐다. 나는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여권 조사 이외에는 편하게 자리에 앉아만 있으면 되었다. 버스 내부는 공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었다. 여기저기 선명하게 뚫린 총알자국, 바닥에 어지럽게 쏟아진 유리 파편들과 장신구와 같은 개인 물품들, 목격자들의 목에 핏대 세운 증언들이 죽음의 위협에서 갓 빠져나온 아찔한 시간을 말해주고 있었다.

한인회에서는 난리가 났다. 현지인 경찰관계자를 당장 보내 줄테니 차를 타고 복귀하는 게 어떻겠냐 물어왔고, 한인회장, 선교사, 일반 교민들까지 안부를 묻는 전화가 빗발쳤다. 대낮이라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는데 걱정을 끼쳐 그저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한편으론 일개 청년을 걱정해 주는 한인들의 마음이 고맙기도 했다. 사안이 심각한 만큼 방송국 카메라와 기자까지 와서 현장을 취재했다. 그리고 경찰은 모든 차량을 그룹으로 묶어 출발시키고, 버스마다 무장경찰이 탑승시켜 국경까지의 이동에 만약의 사태를 대비했다.

사건 후 안전하게 에스코트 해주는 무장 경찰들.
 사건 후 안전하게 에스코트 해주는 무장 경찰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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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도들은 다 알고 있었어요. STC 버스는 부자들이 이용하는 차거든요. 주로 부르키나파소와 가나 사이를 오가며 무역하는 이들이 비행기 다음의 차선으로 이용하는 거예요. 그래서 짐칸에 값나가는 물건들이 많아요. 그걸 노린 거죠. 성공만 하면 거금이 들어오니까요. 아마도 누군가 정보를 미리 줬을 거예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정확한 시간에 버스를 습격했을 리가 없죠. 대낮에 위험을 무릅쓰면서 까지요."

대부분의 승객들은 무장 강도들이 분명 누군가의 정보를 받아 움직였을 것으로 확신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버스 내부에 첩자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까지 흘러나왔다. 한편 빈센트는 경찰 조사는 물론 방송국 인터뷰에도 승객 대표로 당시 상황을 상세하게 진술하는 등 하루 종일 누구보다 바쁘게 움직였고, 그 와중에 심신이 놀란 내게 차가운 콜라를 건네며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한바탕 폭풍이 몰아치고, 에어컨이 고장 난 버스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총알이 관통한 창들은 운행하는 동안 모두 금이 가 깨져 버렸다. 그렇지만 누구도 밤새 찬바람이 들어온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고요한 침묵 속에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몹시 피곤함에도 좀체 잠을 이룰 수 없는 밤, 나는 별안간 옆자리의 체취가 그리워졌다. 조금 불편해도 살아있는 게 얼마나 다행이고 감사한 건지….

어느 샌가 소식을 듣고 달려 온 방송국 카메라맨과 기자.
 어느 샌가 소식을 듣고 달려 온 방송국 카메라맨과 기자.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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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을 쏜 그 녀석들 얼굴, 진심으로 한 번 보고 싶다

지친 여정 끝에 가나 국경을 넘자 전혀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골목을 환히 비추는 가로등 불빛들, 컴퓨터를 이용한 여권 검사, 친근하고 여유로운 표정에서 나오는 익숙한 영어와 거리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평화스러움. 갈증과 허기에 콜라를 마시기 위해 노점상에 들렀을 때 귀여운 꼬마 숙녀는 장사하는 엄마 옆에서 학교 공부를 하고 있었고, 여인은 부드럽게 웃으며 "God bless you", 가나 입성을 축하해 주었다. 살아오는 동안 이렇게 눈물 날 정도로 벅차올랐던 "God bless you"가 또 있었을까? 나는 온건한 바람을 맞으며 콜라 한 병을 정신없이 털어낸 다음, 다시 한 번 단지 살아있다는 단 한 가지에 신에게 깊은 감사를 드렸다.

그날 밤, 부르키나파소 언론에는 버스 무장 강도 사건이 상세히 보도되었고, 거기에 나도 출연했다는 웃겨도 웃지 못하는 소식이 교민 제보로 알려졌다. 또한 가장 시설이 좋고 안전하다고 평이 난 STC 국제 버스는 사건 이후로도 와가두구 근방에서 또다시 최소 두 차례 이상 무장 강도에게 급습 당했다고 한다. 언제쯤 서아프리카에 마음 놓고 황토길 내음을 맡으며 서성거릴 수 있는 평화가 찾아올까.

그나저나 나는 버스에 대고 주저 없이 총을 쏜 그 녀석들 얼굴, 진심으로 한 번 보고 싶다.


태그:#서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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