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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 취임식이 열리던 지난 25일, 전주 시민들을 만나러갔다. 지금 내가 맡고 있는 프로그램에서 '박근혜 정부에게 바란다'라는 긴급 기획을 추진, 시민들의 인터뷰를 들어보기로 했기 때문이다.

18대 대선이 있기 일주일 전에도 이와 비슷한 거리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다. 당시 주제는 '새 대통령에게 바란다'였다. 시민들은 대부분 말을 아꼈지만, 자신이 원하는 대통령을 꿈꾸고 있었다. 막연했지만 그래도 일말의 희망은 남아있는 분위기랄까.

그러나 어제의 분위기는 달랐다. 각오는 했지만 시민 인터뷰는 쉽지 않았다. 일단은 전북대학교로 향했다. 마침 13학번 신입생 특강이 있는 날이라 풋풋한 새내기들이 눈에 띄었다. 이번 선거에 참여하지 않아서 그런지 그들에게 특별한 이슈는 없었다. 몇일 뒤 시작될 대학생활에 대한 기대와 꿈으로 부풀어있는 듯 했다. 마이크를 들이대자 반값등록금과 청년 취업난 해소와 같은 모범적(?)인 대답만이 돌아왔다. 그 중 한 학생의 한마디가 기억에 남는다.

"서민 위하는 좋은 정치 펼쳤으면 좋겠어요. 그분 본받지 말고..."

'그분'이 누군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이번에는 전통시장을 찾았다. 전통시장 분위기는 냉랭했다. 그렇잖아도 썰렁한 전통시장을 휘젓고 다니며 인터뷰를 한답시고 박근혜 정부에게 기대하는 점을 묻고 다니니 상인들은 얼마나 기가 막혔을까. 울고 싶은데 뺨 때린 격이었다. 지나가던 한 할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나 먹고 살기도 바쁜데 누가 대통령이 되든 무슨 상관이야. 기대는 무슨 썩을 기대? 카메라 치워."

김을 굽던 40대 초반의 한 상인은 인터뷰를 극구 사양하다 우리가 끈질기게 요청하자, 마지못해 운을 뗐다. 차라리 탄식이었다.

"기대 안해요. 기대 안한지 오래 됐어. 사실 이번 대선에도 투표 안 할라고 했거든. 근데 이번만큼은 한 표라도 보태야 한다고 해서, 장사하다 말고 투표하고 왔는데... 기대 안해요. 너무 실망 많이 했어."

새 대통령에게 바라는 요구사항에 대해 물어보자 일부 상인들은 이렇게 말했다.

"아이구... 우리같은 사람들이 뭘 알아? 알아서 다 잘 해주겠지. 우리는 그저 장사밖에 모르고 살았어"
"어르신. 그래도 바라는 게 있을 거 아니예요. 이것만큼은 해줬으면 좋겠다라든가..."
"그런다고 뭐 그 사람들이 우리 얘기 들은 척이나 해? 입만 아프지."

그것은 체념이었다. 자기가 아무리 입 아프게 떠들어봤자 세상은 눈꼽만큼도 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차라리 화라도 내면 좋겠는데, 무기력한 듯 고개를 돌려버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자니 괴로웠다. 

"어차피 박근혜 대통령 되버린거 뭘 어쩌겠어? 그냥 잘하기만을 바래야지."

이렇게 힘 빠지는 인터뷰는 처음

'박근혜 정부에게 바란다'어느 택시기사는 '우리가 바란다고 들어주기나 할까요?'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박근혜 정부에게 바란다'어느 택시기사는 '우리가 바란다고 들어주기나 할까요?'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 안소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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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그게 정답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 지역 민심은 혹시나 하는 기대가 아닌 절망에 가까운 포기라 해야 맞다. 새 정부가 출범했지만, 전주 시민들의 삶에는 어떠한 설렘도 어떠한 기대도 찾아보기 힘들다. 어떤 분은 '박근혜 안 찍어서 이제 우리 찍혔다, 우리한테 뭘 해주겠냐'며 한숨섞인 푸념을 하기도 했다.  

"사실 기대도 안했지만 이번에 인사를 보니 진짜 호남 쪽은 완전히 빼버렸도만. '진영(복지부장관 내정자)'인가 하는 사람도 아버지 고향이 이 쪽(전라도)이어서 전라도 출신이라고 하더만. 참 내~ 너무 하는 거 아냐!"

어떤 50대 택시기사는 큰 목소리로 정치인들을 비판했다가 우리가 인터뷰를 청하자 이내 쥐죽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쇠고랑 차라고? 큰일 나. 그분이 어떤 분인디. 그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디 그 딸이라고 안 그럴거 같어? 안 돼. 큰일 날 소리 말어."

박근혜 대통령 뒤에 서있는 '그분'. 그러나 모두가 '그분'을 무서워하는 건 아니다. 65세 노인들 중에는 '그분'의 향수에 젖어있는 분도 있다.

"아버지가 해서 딸도 잘 할거여."
"박근혜 한복입고, 청와대 들어가는 거 봤어? 이쁘도만. 눈물 나더랑게."

인터뷰가 마무리에 접어들 무렵, 갑자기 심한 피곤함을 느꼈다. 거리 인터뷰를 여러 번해봤지만 이번처럼 팍팍하고 힘든 인터뷰는 처음이었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아무도 '내일'을 기대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에너지를 상실했다.  물론 전부가 그런 건 아니었지만 2월 25일, 제18대 대통령 취임식을 바라보는 전주시민의 얼굴엔 아무 표정도, 색깔도 없었다.

너무 울면 나중엔 눈물도 안나오게 된다. 아마 전주시민을 비롯한 전라도 사람들은 지금 이런 심정일 지 모른다. 인터뷰를 하는 도중 내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건 이들 가슴속에 분노의 칼날이 무뎌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대통령한테 왜 바라는 게 없느냐, 우리는 권력의 감시자가 돼야 한다"는 우리의 외침에 그저 헛헛하게 웃던 사람들의 표정이 가슴 아픈 2월 25일이었다.


태그:#박근혜 대통령, #취임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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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픈 것은 삶이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도스또엡스키(1821-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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