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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김춘수 시인과 그가 쓴 작품을 썩 좋아하지 않는다. 그와 함께 많은 사람이 힘겹게 거쳐온 지난 시절의 역정을 그의 시에서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나는 '시인의 스승은 현실'이라는 김수영의 시론 한 자락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시 <꽃>은 좋아한다. 사람 사이의 관계 맺기에 관한 시 중에 이 작품만큼 주제 의식을 선명하게 전달해주는 작품이 있을까. 그래서 <꽃>은 내가 학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자주 감상하는 작품 중의 하나다.

<꽃>은 '실존(exist)'의 온전한 의미를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어떤 하나의 존재가 갖는 의미는 그 홀로, 또는 그 자신의 내부에 있지 않다. 만약 그가 '실존'적인 존재가 되려면, 그는 '밖에(ex-) 있어야(-ist)' 한다. 여기서 '밖에 있음'의 의미는, 그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홀로 있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 사이에서 관계를 맺는 일은 서로 이름을 알고 그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이름이 없이 존재하는 상대방은 결코 내게 의미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처음 만나 악수를 하면서 통성명을 하거나 명함을 주고받는 것 등은 모두 그 상대방과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고 인간적인 관계를 맺기 위함이다.

초임 교사 시절이 생각난다. 나는 아이들 이름을 외우는 일이 참 힘들었다. 야감(야간자율학습 감독)을 하면서 책상 위에 각 반별로 아이들 이름이 적힌 명렬표를 꺼내놓고 속으로 중얼거리다가 아이들에게 타박을 받은 일도 있다. 이맘때쯤이면 새로 맡게 된 학년의 반 아이들 명단을 집에 가지고 와서 외우기도 했다. 유별나다는 아내의 잔소리도 제법 감내해야 했다. 그래도 나는 나름대로 아이들과 관계 맺기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으니 결코 주눅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무작정 이름을 외우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기계적인 암기야 가능했지만, 학기가 시작되면서 교실에서 아이들 얼굴과 이름을 결합해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다 보니 뜻하지 않게 실수도 자주 했다. '갑숙아'라고 해야 할 상황에서 엉뚱하게 '을숙이'를 부를 때가 많았고, '을숙아' 할 자리에서 '을순아'가 튀어나오는 일도 잦았다. 그때마다 실망과 분노(?)가 역력하던 아이들의 그 표정들을 나는 지금도 결코 잊지 못한다.

아이들 이름을 부르는 일은 아이들과 실존적인 관계를 맺는 출발점이다. 이때 아이들의 이름을 대신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야', '얘야', '학생', '저기 창쪽 앉은 애' 등은 결코 아이들을 부르는 호칭어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많은 교사가 여전히 아이들을 그런 식으로 부른다. 이름을 어찌 다 외우냐는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아이들은 '야'나 '얘야'로 불릴 때마다 익명의 존재가 되어 교실에서 사라진다. 그들은 분명 교실에 '주체'로 있어야 하지만, 이름이 없으므로 부재하는 '대상'이 된다. 그 이름으로 불리지 못하는 아이들은 우리가 길거리에서 마주치는 타인과 같은 대상이 된다. 분명 내 앞에 존재하지만 부재하는 그런 낯선 사람 말이다.

당연히 아이들은 '야'나 '얘야'라고 부르는 교사들과 결코 진정한 인간 관계를 맺지 못한다. 세상 그 어떤 아이가 자신의 이름조차 모르는 교사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으려고 하겠는가.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못해 '주체'가 아닌 '대상'으로 남아 있는 아이들은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존재가 된다. 그런 아이들이 넘쳐나는 교실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교육 활동이 이루어지기가 힘들거나 불가능하다. 교사와 아이들은 한 공간에 있지만 서로가 서로에게 무의미한 대상일 뿐이다.

아이들은 '모두'가 그 이름으로 불려야 한다. 만약 교사가 아이들 '모두'가 아니라 그 '일부'만 이름으로 부를 수 있는 상황이라면, 차라리 그 반 아이들 '모두'를 '야'나 '얘들아'로 부르는 것이 낫다. 일부 아이는 그 이름으로 부르고 나머지 아이는 '야'나 '얘야'로 부르면, 그 이름으로 불리는 아이들과 그렇지 않은 아이들 사이에 상상하기조차 힘든 치명적인 불화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교사 한 사람의 잘못으로 반 전체가 파탄의 도가니에 빠지는 건 순식간이다.

아이들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를 수 있으려면 당연히 아이들 이름을 외워야 한다. 그런데 앞서 말했듯 이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이들 특징을 이름과 연계하여 기억하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특징 있는(?) 한두 명의 아이를 빼고 나면 별로 실효성 있는 방법이라고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떤 방법을 써야 하나.

나는 새 학년 초에 각 반별로 좌석표를 만든다. 이 좌석표는, 교탁을 좌석표의 하단에 배치한 후, 교사의 시선에 들어오는 아이들의 좌석 배치표를 그 위에 놓는 식으로 표를 만든 후 이름을 써넣으면 된다. 예컨대 아래 그림과 같다.

 필자가 활용하는 좌석 배치표 견본 그림
필자가 활용하는 좌석 배치표 견본 그림 ⓒ 정은균

새 학년 첫 수업 시간에 들어가 실장에게 좌석표를 만들어달라고 이야기하면 좋다. 그러면서 반 아이들 전체에게는 당분간 그 좌석 배치표를 보면서 질문을 하더라도 이해해달라고 양해를 구하기 바란다. 아이들은 그런 교사의 말을 들으면서 '선생님께서 우리 이름을 외우시려고 나름대로 노력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이름을 외우기 위해 좌석표를 활용하는 것은 단순하지만 가장 명쾌한 방법이다. 학기 초에 이 좌석표를 만들어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골고루 질문을 몇 번씩만 던지면 그 이름들을 쉽게 기억할 수 있다. 처음 1, 2주 동안에는 때때로 좌석표의 이름과 아이들 얼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이미지 작업을 하면 좋다. 아이들에 대한 기억이 더욱 또렷해지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나는 매 학년 4월이 다 가기 전에 280여 명의 아이들 이름을 모두 외운다.

아이들의 이름 부르기는 결코 사소한 일이 아니다. 사소하기는커녕 진정한 교육 활동을 펼치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아이들은 그 이름으로 불려야 교사와 함께하는 교육 활동에 온전히 마음을 열고 참여할 수 있다. 핏발 선 눈으로 교사에게 이유 없이 대드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들도, 그 이름을 자상하게 불러주면 삼월 춘풍에 피어나는 참꽃처럼 불그레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올 것이다.

교사 또한 아이들 한 명 한 명을 그 이름으로 부를 때라야 진정한 사랑의 마음을 갖게 된다. 아이들의 이름을 거듭 부르면, 놀랍게도 아이들을 미워하고 아이들이 싫어지는 모진 마음이 눈녹듯 사라진다. 이 모든 말들이 믿기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오는 삼월 새 학년부터 당장 아이들 이름을 모조리 외워서 때때로 그 이름을 불러보기 바란다. 우리는 아이들이 교사들에게 늘 이렇게 말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들은 모두 / 무엇이 되고 싶다 /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김춘수의 <꽃>에서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교사#학생#이름 부르기#실존#관계 맺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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