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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주의 현장 언어학자 니컬러스 에번스가 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의 표지.
호주의 현장 언어학자 니컬러스 에번스가 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의 표지. ⓒ 글항아리

2012년 6월 12일, 세계 최대의 인터넷 기업 구글은 이색적인 캠페인 하나를 시작한다. 소멸 위기에 놓인 전 세계의 언어를 보존하기 위해 온라인 운동을 펼치겠다는 것이었다. 구글은 이 운동에 '멸종 위기에 처한 언어 프로젝트(Endangered Languages Project)'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 프로젝트는 전 세계 6천여 개의 언어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세계의 수많은 소수 언어는 지금 벼랑 끝에 몰려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처지에 놓여 있다!

구글은 이 프로젝트를 위해 전 세계 언어학자들과 손을 맞잡기로 한다. 구글은 이들과 공동 보조를 맞추면서 소멸 위기에 처한 언어나 사라져가는 방언과 관련된 자료를 찾아 저장하고 공유하는 방식으로 프로젝트를 펼쳐 나간다고 한다. 이를 위해 구글이 맨 먼저 한 일은 인터넷 공간에 'Endangeredlanguages.com'라는 누리집을 개설한 것이었다. 일반인 사용자들은 이곳에 소멸 위기에 놓인 언어와 관련된 비디오, 오디오 자료나 텍스트 파일 등을 올림으로써 운동에 동참할 수 있다. 구글이 개설한 누리집에는 미처 알려지지 않은 희귀 방언들을 추천할 수 있는 기능도 포함하고 있다.

구글이 이 운동을 시작한 데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 바로 오늘날 전세계적으로 불어닥치고 있는 언어의 소멸 상황이 우리 인류에게 결코 축복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유네스코 자료에 따르면,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상에는 약 6천 종에서 7천 종 정도의 구술언어가 있다. 손으로 하는 수화(手話) 언어 또한 그와 거의 같은 수로 존재한다. 사람들에게서 가장 널리 이용되는 세계 언어 목록인 '에스노로그(Ethnologue)'는 2000년을 기준으로 전 세계 228개국에 6809종의 언어가 존재한다고 보고하고 있다.

유네스코에서는 이들 중 5천 종의 언어가 10만 명 이하의 화자가 있고, 3천 종 이상의 언어에서는 화자 수가 1만 명 이하라고 발표했다. 집계 기준으로 활용되는 화자 수를 낮춰 잡으면 상황이 더욱 심각하다. 화자 수가 1천 명 이하인 언어 공동체가 사용하는 언어 수는 1500종이나 된다. 1999년 조사를 기준으로, 100명 이하의 화자만 있는 언어도 약 500종 정도다.

반면에 세계 언어의 300종 정도는 100만 명 이상의 사용 인구를 갖고 있는 '메가(mega, 백만) 언어'다. 이들 메가 언어의 사용 인구를 모두 합하면 전체 63억의 인구 중 85% 정도를 차지한다. 8억 7천만 명의 사용 인구를 갖는 중국어와 3억 명 대의 사용자를 갖고 있는 힌디어, 스페인어, 영어, 그리고 2억 명의 벵골어 등이 모국어 사용자의 수치로 보았을 때 상위 5대 언어에 해당한다. 그 뒤를 포르투갈어(1억7600만 명), 아랍어(1억7500만 명), 러시아어(1억6700만 명), 일본어(1억2500만 명), 독일어(1억 명) 등이 잇는다. 우리 한국어만 하더라도 남북한과 국외 교포 등을 합쳐 거의 1억 명의 화자가 사용하고 있다.

거꾸로 말해, 지구 전체 인구 63억의 85%를 제외한 나머지 15%의 인구(약 9억 명)가 약 6500종의 언어를 나누어 사용하고 있다는 말이다. 우리 나라 상위 1%의 부동산 자산은 나머지 하위 99%의 부동산 자산보다 4배 가까이 차이가 나는 양극화 현상을 보여준다. 언어 생태계에도 이와 같은 극심한 양극화가 펼쳐지고 있는 셈이다. 호주 원주민어나 제주어*처럼 메가 언어 사용권 내에 속해 있거나, 그에 인접해 있는 소수 언어들은 갈수록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니컬러스 에번스가 쓴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는 바로 이들 소수 언어에 대한 방대한 기록이다. 저자는 호주의 언어학자이자 인류학자다. 호주에는 수백 종에 달하는 토착민 언어가 있다. 그는 그 토착어들을 사용하는 부족들을 직접 찾아가 언어와 문화의 연관 관계를 밝히는 방식으로 현장 연구에 매진했다. '현장 언어학자'라는 명성도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이다.

많은 언어학자가 책상머리에서 기성 학자들이 쓴 글을 읽으며 자신의 논문거리를 챙긴다. 니컬러스 에번스의 '필드 워크(field work)'가 빛을 발하는 이유다. 실상 현장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말들이야말로 당대 언어 연구의 기본 자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1960년대 이후 세계 언어학계는 노엄 촘스키의 '보편 문법 이론'에 휩쓸려 추상적인 문법 체계를 밝히는 데 매진하고 있다. 언어학이 현실의 언어와 유리되고, 대중으로부터도 격리되게 된 주요 배경이 여기에 있다.

이 책의 미덕은 무엇보다 우리의 '모국어적인 언어 직관'을 뛰어넘는 세계 언어의 다양성 사례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는 점이다. 옛 우리말에는 '어두자음군(語頭子音群)' 현상이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국어 과목을 충실하게 이수했다면 한 번쯤 들어봤을 용어다.
어두자음군은 말 첫머리에 자음이 무리를 지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쌀[米]'의 옛말인 'ㅂ살'이나, '때[時]'의 옛말인 'ㅄ대'에 있는 'ㅄ'이나 'ㅵ' 들이 어두자음군 현상을 보여주는 사례들이다.**

영어는 이러한 어두자음군 현상이 일반적이다. 'strong'이나 'strengths' 등에서의 'str-'이 그 예들이다. 그런데 옛 소련 지역의 일부에서 쓰인 조지아어에서는 어두자음군 현상을 보이는 자음 무리의 수가 최대 8개까지 있는 말이 있다. 'gvbrdɣvnis'와 같은 말에서의 'gvbrdɣvn'가 그것이다. 이 말의 모국어 화자들은 이 8개의 자음을 과연 어떻게 연이어서 발음할까.

하나의 언어가 사라진다는 것은 그 언어가 담고 있는 사고가 사라지는 것과 같다. 물론 언어가 사고를 담는 그릇만의 구실을 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언어를 기대지 않고 사고하는 일 또한 결코 용이한 일은 아니다. 저자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도 전세계적으로 사고의 다양성이 붕괴될 위기에 처해 있다는 사실을 많은 이에게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세계가 하나의 네트워크처럼 움직이는 세상에서 언어의 다양성은 오히려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게 아니냐는 반론을 제기할 수 있다. 소수 언어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가, 그렇지 않아도 과도한 민족주의적 갈등과 대립을 부추길 우려도 전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는 '글로컬(glocal=global+local)한'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세계화가 거대한 하나의 획일주의를 의미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언어 다양성이 주는 이점에 동의하기 힘든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것은 그 사람의 자유이니 뭐라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전세계의 수많은 언어들이 왜 이렇게 지난 몇 세기 동안 급속도로 사라져 갔는지는 한번쯤 따져보아야 하지 않을까.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겠지만, 한 민족의 언어가 사라지면 그 민족도 사라진다. 그렇게 민족의 다양성이 사라진 자리에서 거대한 한두 개의 민족만이 살아가는 지구를 상상해 보라. 그 상상의 결과가 과연 마냥 유쾌하기만 할까.

사라져가는 소수 언어들이 왜 보존되어야 하는지, 그것이 어떤 정치 ․ 사회 ․ 문화적인 의의를 갖는지 곰곰이 따져보아야 한다. 당신의 모국어인 한국어가, 그 엄청난 영향력으로 우리 사회에서 지배 언어의 자리를 꿰찬 영어 때문에 위태로워진 미래의 어느 가상 세계를 상상해 보라. 그 세계에서 여러분은 말의 외발 자전거와 두발 자전거 중에서 어느 것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요컨대 당신은 모국어인 한국어는 무시하고 주류 언어인 영어만을 배우든지, 아니면 그 둘 다를 익히든지 할 수 있는 것이다. 자, 당신은 어느 자전거를 골라 타겠는가. (2013년 02월 01일 16시 56분)

* 2010년 12월 유네스코는 제주어를 언어 소멸 과정의 네 번째인 'D' 단계에 해당하는 '치명적으로 위태로운(critically endangered, 소멸 직전에 놓인)' 언어로 분류해 발표했습니다. D 단계는 증조부 세대의 극히 일부에서만 해당 언어를 씀으로써 그것이 사라질 위기에 놓인 상황을 가리킵니다(언어 소멸의 단계별 과정에 대해서는 아래에서 좀더 상세하게 설명됩니다). 그 전에 유네스코는 제주어를 한국어의 한 방언이 아니라 개별 언어로 분류했습니다. 그만큼 제주어만의 독특한 특징을 포괄적으로 인정함으로써 제주어를 하나의 소중한 언어 문화 유산으로 보고 있다는 얘기죠.

** 이들 자음 무리를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놓고 국어학계는 상당한 기간 동안 논란을 벌여 왔다. 다수 의견은, 이들 말을 오늘날의 된소리처럼 간주하여 [쌀]이나 [때]로 읽자는 것이다. 하지만 '좁쌀'이나 '입때'에서와 같이, 'ㅂ살'과 'ㅄ대'의 'ㅂ'이 갖는 소릿값이 살아 있는 예가 있으므로 이들 자음 모두를 발음했으리라는 소수 의견도 있다. 이렇게 되면 [쌀], [때]로 읽지 않고 [브살]이나 [브스대](이때 앞쪽에 있는 '브'나 '브스'는 약하게 읽는다) 정도로 읽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오마이뉴스 블로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 - 사라지는 언어에 대한 가슴 아픈 탐사 보고서

니컬러스 에번스 지음, 김기혁.호정은 옮김, 글항아리(2012)


#니컬러스 에번스#<아무도 모르는 사이에 죽다>#소수 언어#한국어#어두자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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