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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날이야. 우리 먼저 갈 테니 천천히 와."
"오케이, 난 좀 천천히 걸을게. 오늘도 부엔 카미노(Buen Camino)!"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는 둘 사이다. 가까이 지내는 사이라 함께 여행을 다니면 다투거나 질릴 법도 한데 그럴 낌새는 도통 보이지 않는다. 무슨 할 말이 그렇게나 많은지 아침부터 재잘재잘, 밤까지 깔깔깔.

아, 둘이 의견이 달라 티격태격 하던 걸 문군은 딱 한 번 보긴 했다. 그나마도 '와이프가 참 예쁘고 사랑스럽다느니, 모르는 소리, 알고 보면 여동생이 우악스런 성격이라느니' 하는 스웨터의 보푸라기만큼이나 가벼운 논쟁이다. 이러니 둘 사이에 끼어드는 타이밍을 노리는 문군은 이따금 질투마저 날 정도다. 순례 후반부, 문군을 더없이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매제와 처남 지간인 헬리오스와 하비다.

유쾌한 둘의 뒷모습이 숲길의 끝에서 소실점으로 사라진다. 계획대로라면 26km를 걷는 오늘, 오전엔 리곤데(Ligonde) 산맥을 넘고, 오후엔 다시 한 번 로사리오 봉(Alto Rosario)을 넘어야 한다. '저기 언덕이 보여? 저 언덕으로 최대한 빨리 올라가줬음 좋겠어'라며 가지 않아도 그려지는 길, 난폭한 예상이 심장을 거칠게 핥아댄다.

빵과 우유로 간단하게 아침을 챙겨선지 허기가 빨리 찾아온다. 허벅허벅한 사과 한 알로 시장기를 달랜 문군은 다가 올 고난에 대비해 근육을 긴장시킨다. 언제나 스위트 스팟(sweet spot)을 지향하는 카미노 루트에 대해 신뢰를 보내며, 아니 그런 카미노가 되게끔 같이 걸어 준 순례자들에 대한 믿음을 보이며 심장 엔진에 시동을 건다.

블랙몰리, 외로움을 심하게 타서 외로움이 포화 상태에 이르면 터져 죽는다는 물고기. 문군은 자신이 블랙몰리와 같은 처지는 아닐까 의구심이 들 때가 있다. 지난 30년을 숨 가삐 내지르고 남은 건 질식할 것 같은 외로움이다. 지나온 길에 분명 많은 대화를 나눴는데 자세히 보니 모두들 입은 있고, 귀는 없었다. 다들 자신의 말만 내뱉는 건조한 마네킹들 같았다. 누구나 똑같이 겪는 일들인데 자신이 가장 힘들고, 슬프고, 짜증나고, 대단하다는 누구의 노래처럼 결국 흔해 빠진 얘기들로 소통이 아닌 모여서 독백을 하는 것이다.

결국 내 안에 나만 있고, 다른 이가 없다. 공감이 없으니 외롭다. 사람들은 외롭다고 투정 부리면서도 다시 그 외로움에 대한 불평만 쏟아낼 뿐이다. 그래서 카미노는 궤도 수정의 기회가 된다. 속도가 미덕인 디지털 시대에 문군의 걸음은 아날로그처럼 곰실댄다. 꼭 비탈진 언덕 때문만은 아니다. 삶에 대한 성찰을 묵상의 자루에 담아 메면 달팽이 같은 속도가 나올 수밖에.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려면 걸음을 멈춰 세우는 수밖에.

산티아고 순례길로 수학여행 온 마드리드 중학생들과 함께.
 산티아고 순례길로 수학여행 온 마드리드 중학생들과 함께.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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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 무렵이 되니 어깨와 발목이 시큰거린다. 마땅한 벤치가 보이지 않지만 개의치 않는다. 그는 나무 아래 흑자색의 부엽토 위에 그대로 주저앉는다. 시원한 바람에 땀을 씻기며 쉬고 있을 무렵 한 무리의 아이들이 다가온다. 어제 본 수학여행 온 학생들이다. 문군 쪽으로 바투 앉아 사진을 찍는다. 누군가와 인사를 나누고, 대화를 하며 관계를 잇는 매듭을 만드는 것에 스스럼없는 표정들이다. 오히려 괜히 겸연쩍은 건 문군이다. 누군가가 머금은 미소를 터트리며 생기발랄하게 다가와 주는 게 아직도 어색하기만 하다. 특히나 어여쁜 여학생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로사리오 봉을 휘감아 지나는 길에 뻐근한 피로를 느낀다. 가쁘게 더워오는 호흡, 악다문 입에 미간이 찌푸려지며 힐링되던 영혼에 다시 부아가 치밀어 오르는 그때, 자전거 바퀴가 얼음 위를 지나듯 미끈하게 움직인다. 뒤를 보니 킥킥대며 밀어주는 천사들이 있다. 물론 킥킥거림은 채 3분도 안 되어 사라지지만 그 온기가 정상을 향해 거침없이 걸음을 떼는 동력이 되어 준다.

부탁하지도 않았는데 번갈아 밀어주는 다섯 명의 천사들 덕에 마침내 오른 정상, 학생들은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며 하이파이브를 나눈다. 침묵 속에 자연스레 한 마음이 된 힐링 로드. 이렇게 또 그의 인생을 밀어주는 어린 순례자들을 통해 카미노의 한 고비를 꺾어 넘는다. 차오르는 감사함, 공감이 있는 길, 외롭지 않은 순간이다.

시커먼 구름이 동반한 폭우가 쏟아지다가도 금방 개는 하늘, 겨울 날씨는 변덕스럽기만 하다. 늦은 오후, 삼삼오오 공립 알베르게에 도착한 순례자 중 일부는 다음 목적지까지 계속 이동한다. 레이(Rei)에는 문군과 존 남매, 그리고 반가운 헬리오스와 하비가 처음 만난 다수의 순례자들과 함께 머문다. 보고 또 봐도 반가운 얼굴들이다.

막내 진이 만들어준 스파게티. 치즈가 들어가 정말 고소하다. 동치미 생각도 났다.
 막내 진이 만들어준 스파게티. 치즈가 들어가 정말 고소하다. 동치미 생각도 났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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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오랜만에 존의 동생인 카미노 막내 진이 차린다. 카미노에선 딱딱 떨어지는 역할 분담이 없다. 무엇이든 사모하는 사람의 자발적 섬김으로 모두의 행복이 추구된다. 추위로 볼 빨개진 그녀는 카미노를 통해 말괄량이에서 몰라보게 부드러운 숙녀로 변화되고 있다. 오빠 존과 티격태격하던 초반과는 달리 지금은 서로를 챙겨주며 둘도 없는 사이로 달달한 우애를 과시한다. 때론 무료하기만 한 카미노가 대화의 물꼬를 트게 해 서로의 생각을 들어볼 기회를 준 것이다.

치즈를 넉넉하게 뿌린 맛깔스런 토마토 파스타가 나오고, 식기 전에 먹이고 싶은 진은 존부터 바삐 찾는다. 문군 얼굴에 아빠 미소가 번진다. 그는 치즈를 얹은 파스타를 맛나게 먹다가 동치미 한 보시기를 그리워한다.

"문, 할 얘기가 있어."

헬리오스다. 샤워하고 들어온 헬리오스와 뒤따라오던 하비 표정이 밝지 않다.

"무슨 일인데?"
"음, 내일 너와 헤어져야 할 것 같아. 하비 발목이 다쳤거든. 택시 타고 돌아가기로 했어."
"아, 끝까지 함께 가고 싶어. 하비는 많이 아픈 거야? 천천히 가면 안 되는 거야?"
"저녁 먹으면서 얘기 나눴는데 치료가 필요할 것 같아. 며칠 전에 접질렸는데 그간 참고 왔던 거야. 지금은 많이 부어올랐어. 어떡하지? 산티아고까지 너랑 가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됐네. 미안해."

오늘 아침까지 깊은 위로가 됐던 두 친구가 떠난다는 힘없는 말에 문군 콧등이 시큰해진다. 하비는 멋진 남자다. 헬스로 탄탄해진 근육도 그렇지만 항상 다른 이를 먼저 챙겨주던 배려가 멋진 젠틀맨이다. 누구보다 강할 것이라고 생각한 그가 이렇게 이탈할 줄 문군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열이 있는지 하비는 일찌감치 침낭에 몸을 넣었고, 헬리오스가 대신 상황을 알려주며 미안함을 전하니 문군도 표정관리가 되지 않는다.

인생의 마지막이 될지 모를 우정 여행으로 온 이탈리아의 안젤로와 조르조 할아버지, 스페인의 순박한 시골 청년 앙헬과 다비드에 이어 또 한 번 멋진 카미노 메이트와의 이별을 해야 한다. 모두 팔을 벌려 외로운 문군을 따뜻이 안아주던 이들이다. 같이 걷고, 같이 먹고, 같이 얘기하고, 같이 자고, 있는 모습 그대로 이해하고, 외롭지 않게 챙겨주던 친구들이다.

서운한 마음을 어떻게 달랠 길이 없는 문군은 일찌감치 잠자리에 든다. 겨울 카미노 데 산티아고를 여기까지 올 수 있게 만들어 준 최고의 동행자들은 그에게 한결같이 말했었다.

"걱정 마. 네가 끝까지 완주하도록 우리가 도와줄게. 산티아고까지 함께 가자."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그들이 모두 떠나가고 지금은 문군 혼자 남아있다. 뒤척이며 좀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겨우 맞은 아침, 텅 빈 느낌에 옆을 보니 자리가 비어있다. 간밤에 혹시 몰라 작별 인사를 나누긴 했지만 아침에 마지막 인사를 한 번 더 나누고 싶었던 문군이다. 시계를 보니 오전 7시, 약 20분 전에 떠났단다. 고단한 다른 순례자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 조용히 나간 모양이다.

문군은 자신의 가방 위에 놓인 쪽지를 발견한다.

"문, 만나서 반가웠어. 먼저 가게 되어 미안해. 너의 성공적인 완주를 바랄게. 페이스북으로 계속 연락하자. 부엔 카미노!"

그리고 칼이 놓여있다. 지난 밤 발목 부상으로 고생하다 늦게 도착한 하비는 허기져 있었고, 캔 따개가 없던 그는 날이 날카롭게 살아있는 고퀄리티 군용칼을 이용해 참치캔을 따고 있었다. 이때 지나가다 우연히 이 장면을 본 문군이 무심코 한 마디 건넸었다.

"오, 칼 멋진데? 이렇게 잘 들 수가 있나? 캔이 그냥 찢어지네."
"하하, 너 가질래? 나 집에 가면 또 있거든."
"아냐, 괜찮아. 나 칼 별로 필요 없어. 과일은 짝퉁 맥가이버 칼로 자르면 되고."

문군은 정말 그냥 해 본 말이다. 허나 하비는 그 말을 잊지 않고 있었다. 새벽에 떠나기 전 문군 배낭 위에 살짝 올려놓고 갔다. 카미노 친구를 향한 곡진한 마음이다. 칼을 보고 있자니 그저 고마움으로 쓰라리기만 문군 가슴이 동당거린다. 겉옷도 걸치지 않은 채 신발 뒤축을 구겨 신고 얼른 나가본다. 밖은 아직도 어둡다. 춥다. 길이 꺾이는 지점까지 가보았지만 둘의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저 인사 한 번 더 하고 싶었는데, 문군은 그만 맥이 탁 풀린다.

헤어짐엔 익숙해도 슬픔은 길들여지지 않는다. 헤어지고 나서 먹먹한 그리움으로 남는 사람, 분명 좋은 사람이다. 헬리오스와 하비, 문군에겐 참 좋은 카미노 벗이었다. 터벅터벅 숙소로 돌아오던 문군은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암튼 뭔가 큰 것을 상실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자신이 블랙몰리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안 죽은 걸 보니 그래도 이 길을 걸으며 생각만큼 외롭지는 않았나 보다. 동시대를 살아가는 또 다른 블랙몰리일지 모를 헬리오스, 하비 때문이라고 그는 확신에 확신을 거듭한다.


태그:#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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