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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극작가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이야기는 삶에 대한 은유'라고. 무슨 뜻일까. 이야기는 비록 작가가 빚어낸 거짓일망정 살아 숨쉬는 삶에 뿌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은유'를 힘주어 읽기도 한다. 오롯이 드러내기보다 이야기 깊숙이 감춰둘 때 오히려 무심코 지나쳤던 삶의 속살이 더 뚜렷하게 떠오른다는 뜻으로 말이다.

아무튼 그 극작가의 말을 떠올리게 하는 드라마가 있다. SBS드라마 <청담동 앨리스>. 내가 미처 몰랐거나,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거나, 어쩌면 피해왔던 우리 삶의 어떤 부분을 너무도 아프게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디자이너를 꿈꾸는 가난한 앨리스가 뛰어든 청담동은 '이상한 나라'가 아니다.

 <청담동 앨리스> 속 세경은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않는다
ⓒ SBS

<청담동 앨리스>, 그 잔인한 동화 속으로

제목과 달리 이 드라마, 무척이나 잔인하다. "요새는 가난이 죽을병이야"라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으며 나처럼 가난한 이들에게 상처를 주는가 하면, "노력하면 할수록 절망만 더 커져"라며 기운마저 빼놓는다. 하지만 익숙해져야 한다. 어쩌면 이 거짓 이야기 밖,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은 그보다 더 잔인할지도 모르니까.

#1. 면접
명문대 디자인과를 차석으로 졸업한 세경(문근영)이 면접을 보고 있다. 빚으로 산 집을 담보로 다시 빚을 얻어 겨우 대학을 졸업하느라 유학은커녕 어학연수 한 번 다녀오지 못한 그녀에게 유학파만 뽑는다는 이 의류 회사의 벽은 높기만 하다. 그래도 씩씩하게 웃으며 어렵게 익힌 불어 실력을 뽐내보지만 정작 디자인실장은 아무 관심도 없다는 듯 모든 평가 항목에 차례로 낙제점을 매긴다. 그러니까 그녀는 빵점인 셈이다.

며칠 뒤 "세경씨는 도저히 디자이너로 쓸 수 없는 사람"이라며 차갑게 말하는 실장에게 세경이 기다렸다는 듯 묻는다. 혹시 유학을 다녀오지 않았기 때문이냐고. 그러나 디자인실장은 전혀 다른 대답을 내놓는다. 

"한세경씨는 안목이 후져요. 유학을 안 다녀온 게 문제라기보다 유학을 다녀올 수 없는 그런 처지에선 그 정도 안목 밖에 안 나오는 거예요. 부족한 걸 알아야 발전한다고 했어요? 안목은 한세경씨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한다고 해도 안 달라져요. 안목이라는 건 태어날 때부터 무엇을 보고 듣고 느꼈느냐에 따라 결정되는 거니까. 이미 정해져 있는 거라고요."

세경은 말문이 막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아마 나라면 숨이 막혔을 것이다. 나를 숨 막히게 한 것은 절망감이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참담한 현실을 맞닥뜨렸을 때 덮쳐오는 그런 절망감, 혹은 억울함. 그것은 강남구에서 수학능력시험 상위권 점수를 받은 학생의 수(비율)가 금천구보다 9배쯤 높다는 어느 기사에도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부끄럽지만 나는 그것에 대해 알지 못했다. (서울신문, 2013.1.10).

 세경과 인찬의 사랑을 가로 막는 것은 벗어나기 힘든 가난이다
ⓒ SBS

#2. 연애
인찬(남궁민)이 세경에게 몇 백만 원짜리 가방을 건넨다. 인찬의 사정을 뻔히 아는 세경은 펄쩍 뛰며 나무라고, 인찬은 그런 세경에게 마지막 선물이라며 일어선다. 세경은 인찬을 붙잡고 어떻게든 마음을 돌려보려 애를 써보지만 소용없다. 돌아서려는 인찬을 향해 울음을 터뜨리고 마는 세경. 그러자 인찬도 "니 꿈도 나한테 맞춰서 작아졌다"며 차마 꺼내지 못했던 속내를 털어놓는다.

"결혼하면 둘이 합쳐봤자 세금 떼고 월급 겨우 350정도야. 너랑 나랑 학자금대출 원금 이자 한 달에 40, 식비 50, 교통비 통신비 공과금 50, 우리 형편에 전세 못 얻으니까 월세, 보증금 1500에 45만 원. 그 1500도 대출 받아야 하니까 원금 이자 한 달에 50. 우리 엄마 병원비 입원비 약값 한 달에 330. 한 달이면 마이너스 215만 원이고 일 년이면 2580만 원이야. 답 없지. 우리 이제 서로 희망고문 그만하자."

20∼30대의 48.1%가 '결혼을 원치 않는다'고 답했단다. 지난해 출산율도 1.23명으로 세계에서 가장 낮은 수준이라고 하니, 그만큼 아이를 낳지 않으려 애를 쓰는 이들이 많다는 뜻이다. 겨우 두 달 전인 지난해 10월 무렵, 20대의 고용률이 43개월 만에 가장 낮은 정도로 떨어졌다고 하니 따지고 보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국민일보, 2013.1.7).

하지만 별로 이상할 것도 없는 그 사실이 내게는 새삼 무겁게 다가왔다.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우리가 오랫동안 소박한 바람쯤으로 여겨왔던 그 일이 이제 누군가에는 떠올리기조차 두렵고 벅찬 일이 되었다는 그 사실이 말이다. 내 앞에서 그렇게 울먹이며 절망을 토로한 이는 인찬이 처음이었으니까.

#3. 빵집
세경의 아버지 득기(정인기)는 동네에 새로 들어선 대형 마트 입구에서 이른바 '왕큰빵'들을 바닥에 마구 집어던지며 행패를 부린다. 마트에서 헐값에 빵을 팔아대는 통에 수십 년 동안 작은 빵집을 꾸려온 득기가 도저히 버텨낼 수 없게 된 탓이다. 그나마 꼭지에서 빚을 잔뜩 얻어 마련한 아파트는 반토막이 나버렸고, 이자도 버거운 마당에 이제 원금까지 갚아야 한다. 마침 그 곁을 지나던 유통업체 사장 일남(한진희)과 마주앉게 된 득기는 억울함을 토로해보지만 일남은 그를 비웃으며 일자리 하나를 툭 던진다. 대형 마트로 향하는 여론의 화살을 피해보려는 1년짜리 계약직.

"미안하다, 아빠가. 더는 못 하겠다. 나도 이 나이쯤 되면 내 이름으로 된 집 한 칸 갖고 있다가 니들한테 물려줄 줄 알았어. 근데 서울에 쌔고 쌘 게 아파튼데 내꺼 하나가 없다. 30년간 니들 키운 빵집 처분하고 남은 건 고작 500. 내 30년 세월의 대가가 이 500만 원이 전부다."

가족들은 달리 할 말이 없다. 다른 도리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누군들 뾰족한 수가 있을까. 가계빚이 1000조 원을 향해 치닫는 현실에서, 그것도 헐값으로 빵을 팔아대는 대형 마트 옆에서 점점 더 가난해지는 소비자들에게 전보다 더 많은 빵을 팔 수 있는 방법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다. 어쩌면 정말 안타까운 건 그에게 건넬 그 어떤 위로의 말도 우리에게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일지 모른다.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야말로 잔혹 동화다.

별로 기대할 것 없는, 그러나 궁금한 결말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져도 현실은 바뀌지 않는다
ⓒ SBS

이 드라마, 꽤나 영리하다. 우리가 머릿속으로 그려내는 이야기들을 번번이 비껴가기 때문이다. "나 돈 500만 원으로 그 인간(인찬) 떨쳐내고 싶었던 거야"라며 현실 앞에 무릎을 꿇는가 하면, "나 그거 갖고 싶어. 그 옷도 갖고 싶어"라며 자신의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기도 한다. 하지만 이쯤에서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이 드라마, 어쩌자는 걸까.

아마도 가난하고 마음씨 고운 세경은 돈 많고 여린 승조(박시후)와 맺어질 것이다. 누군들 그런 결말을 탓할 수 있겠는가. 우리들 모두는 그 마지막 순간의 아름다운 입맞춤을 기다리며 오늘도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가 끝나고 나면 남아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멋진 왕자를 만나 이상한 나라, 청담동에 눌러 앉게 된 세경은 그렇다 치고, 어쩔 수 없이 꿈에서 깨어나 다시 차가운 현실을 견뎌내야 하는 수많은 세경들과 인찬들과 득기들은 어찌해야 하느냐는 말이다. 애써 외면해왔던 가슴 아픈 현실을 우리들 눈앞에 멋대로 펼쳐놓고서 이제 와서 그만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라니 뒤에 남을 그 씁쓸함이 벌써부터 걱정이다.

너무 다행스럽게도, 세경이 인찬과의 사이에 남은 것은 절망뿐이란 사실을 받아들이고 돌아온 그날, 새누리당 대통령 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이 TV에 나와 서민들의 가계빚을 절반 넘게 줄여주겠노라 약속했다.

그뿐인가. 대학생들의 등록금을 반으로 줄이겠다는 약속도 했다. 골목 빵집들의 숨통을 틔어주겠다는 약속은 진작부터 했다. 수만 명의 노동자들 앞에 서서 비정규직에 대한 차별을 반드시 뿌리 뽑겠다는 약속까지 했다. 세경이 봤다면 아마도 기뻐하며 다시 기운을 차렸을지 모른다.

부디 그 약속들을 지켜주길 바란다. 그리하여 더 이상 절망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드라마의 끝에 더 절망스런 현실을 떠올리며 암담해하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이야기 속 누군가가 아무리 희망이 없다고 우겨도 우린 다르다고, 열심히 노력하면 달라질 거라고, 그렇게 믿고 기운 내서 살아갈 수 있는 사회, 그리하여 세경이도 굳이 이상한 나라를 기웃거리지 않아도 되는 그런 사회가 되길 간절히 바란다. 어쩌겠는가.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고, 결국 국민이 기댈 곳은 정치뿐인 것을.

나를 비롯해 이 땅의 모든 세경과 인찬과 득기의 건투를 빈다.


태그:#청담동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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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전북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 혁명>(2023),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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