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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자의 몸과 영혼에 잠깐의 쉼을 주는 비두에도 마을(Viduedo)에 세워진 산 페드로 교회.
 순례자의 몸과 영혼에 잠깐의 쉼을 주는 비두에도 마을(Viduedo)에 세워진 산 페드로 교회.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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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가 아닌가 보네요."
"그러게요. 느낌이 이상하네요."

오늘은 목적지까지 계속 내리막이다. 거리도 짧다. 점심때까지 넉넉히 도착할 듯하다. 서쪽으로 가는 길, 해를 등 뒤에 두고 가기만 하면 되는 일. 때문에 긴장을 풀었던 탓일까? 잠시 주위를 둘러보던 문군 눈의 초점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어디를 둘러봐도 외로이 나 있는 길뿐이다.

이미 한 시간 가까이 걸어왔다. 당황스러움에 걸음을 멈추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을 수밖에. 따라오던 존 역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지도대로라면 근처에 교회가 있어야 하고, 오스피탈(Hospital) 마을이 보여야 한다. 남자 둘이 신나게 수다를 떨며 오다 보니 문군은 존을 믿고, 존은 문군을 의지해서 벌어진 참극이다.

달콤한 순례는 잊고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길을 잃어버렸다. 고심 끝에 결국 다시 출발지로 돌아가기로 한다. 쓰디쓴 실책이다. 이렇게 의미 없이 1시간 반을 허비한다. 수다로 수를 놓은 두 남자의 길은 돌아오면서 화려한 침묵의 꽃이 핀다. 마을에 도착하니 오직 둘만 정반대의 길로 출발했던 게 밝혀진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 꾸불꾸불한 좁은 산책로로 가야 했거늘…. 생각 없이 당연한 듯 넓은 길로 가버린 것이다. 늘 '좁은 길'론(論)을 들어오며 살아온 문군이지만 막상 닥치면 어쩔 수 없이 편한 길이 좋고, 익숙한가 보다.

순례자들이 모두 떠난 텅 빈 마을. 마지막으로 알베르게 문을 연 카탈루냐 출신 세르지오(Sergio)가 합류한다. '삶은 여행이다'라는 철학을 고수해 나가는 그는 자유로운 독신주의자라고 자신을 소개한다. 또한 굳이 스페인이 아닌 카탈루냐 출신이라고 자부심 어리게 강조한다.

"여행할 경비는 벌어... 난 이게 좋은 걸"

여행을 좋아하는 독신주의자 세르지오. 그는 일년 중 반을 바르셀로나 관광청에서 일하고 나머지는 여행을 다닌다. 죽을 때까지 혼자 행복하게 사는 것이 그의 꿈이다.
 여행을 좋아하는 독신주의자 세르지오. 그는 일년 중 반을 바르셀로나 관광청에서 일하고 나머지는 여행을 다닌다. 죽을 때까지 혼자 행복하게 사는 것이 그의 꿈이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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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 관광청에서 일해. 정식 직원은 아니고 파트타임으로 하는 거지. 그래도 여행할 만큼의 경비는 생겨. 집도 없고, 차도 없고, 애인도 없거든."
"심심하지 않아? 외롭진 않고?"

"난 내 삶을 즐겨. 뭣 하러 복잡한 것에 얽매여 살아? 솔직히 지금 내가 벌어들이는 수입은 나 혼자 즐기기에 적당한 액수야. 그런데 결혼을 하게 되면 지금 이 수입만으론 가족을 부양할 수가 없거든. 딱 내가 먹고, 자고, 여행할 만큼만 벌며 구속받지 않는 지금이 좋아."

자신의 가치관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의견이지만 문군은 진중하게 듣는다. 한국 정서에서 보자면 걱정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다. 세르지오는 쿨한 척 해보이지만 분명히 뭔가 외로운 느낌을 주고 있다. 그는 얼굴을 보여주기 싫어한다. 말투 역시 도도하게 거칠면서도 피하는 구석이 있다. 자신의 라이프 스토리를 나누면서 다른 사람들의 얘기, 이를테면 가족이나 친구·주위 동료 등을 엮는 법이 없다.

그러고 보니 지난 밤 알베르게에서 다른 순례자들과 어울리지 않고 철저히 혼자 구석에서 보낸 친구다. 문군은 그의 배경에 대해 묻지 않기로 한다.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지 않는 비밀은 필요한 법이니까. 다만 그가 카미노를 걷기 원한 이유가 치유가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삐 걷는 그를 먼저 보내준다.

인자한 할머니에게 사기당한 열아홉 소녀

컨디션이 저하된 순례자의 배낭을 메고 걸어가는 필자. 오래는 아니지만 3km 걸으면서 참을 수 없는 순례의 무거움을 절절이 체득했다.
 컨디션이 저하된 순례자의 배낭을 메고 걸어가는 필자. 오래는 아니지만 3km 걸으면서 참을 수 없는 순례의 무거움을 절절이 체득했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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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시간이다. 문군은 존의 배낭을 대신 멘다. 컨디션이 좋지 않은지 존의 표정이 좋지 않다. 누가 어떤 어려움을 당할지 모르는 카미노다. 그러니 서로 도와가며 걷는 것이 마땅하고, 그 주어지는 기쁨으로 힐링이 되는 길이 산티아고 순례다. 문군 역시 누군가 격려하며 밀어준 덕으로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게 아니던가. 더욱이 운 좋게도 현지인 할아버지가 건네준 딱딱한 빵에 말린 육포로 휴식을 취하면서 점심 한 끼를 해결한다.

뒤따라오던 진은 씩씩거린다. 그녀는 반대로 점심 사기를 당했단다.

"아니, 작은 마을을 지나고 있었어요. 그때 한 할머니께서 손짓을 하지 않겠어요? 그것도 아주 인자한 미소를 띠면서 말이에요. 나는 그냥 친절한 할머니인가 보다 하고 웃으며 인사를 건넸어요. 그런데 자꾸 집으로 들어오라는 거예요, 차를 주겠다고. 날씨가 춥기도 했으니 차 한 잔 정도야 싶었죠. 카미노에서 차 한 잔 대접받은 경우는 종종 있잖아요? 그러더니 식사는 했냐고 물어보는 거예요. 아직 안 했다고 했더니 금방 빵과 치즈·육포·수프 등을 차려주는 거예요. 처음엔 괜찮다고 했는데 굳이 대접해주는 거라 고마웠죠, 당연히. 

단출했지만 할머니가 차려주신 거라 맛있게 먹고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고 일어나려는데, 글쎄 손을 내밀며 돈을 달라는 것 아니겠어요? 레스토랑도 아니고 해서 좀 황당하긴 했지만 그래도 먹었으니 고마움의 표시는 해야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10유로를 달래요. 아니, 지금껏 먹은 순례자 식단에 비하면 조악하기 그지없는데 10유로씩이나 달라고 하는 게 말이 돼요? 어쩔 수 없어 그냥 주고 나와 버렸어요. 너무 속상해요. 그럴 거면 처음부터 가격에 대해 말을 하던가요. 마치 초대한 것처럼 행동해 놓고선 돈을 달라니. 내가 스페인어도 잘 못하고 어린 여자라고 만만하게 본 것 같아요."

한 끼 식사 값으로 치부해 버리면 될 10유로는 큰 문제가 아니다. 순례자 중 유일한 10대 말괄량이지만 지금껏 곰살궂게 다른 순례자를 챙겨주던 그녀다. 그런데 카미노에서 처음으로 섭섭한 일을 당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순례를 하고 있는 와중에 현지인에 대한 신뢰가 무너진 것에 대해 열아홉 소녀는 깊은 상실감을 느끼고 있다. 쓰라린 마음에 표정이 울상이다.

"아무래도 시골에 살다 보니 형편이 어려운 할머니가 돈이 궁했나 봐요. 너무 마음 쓰지 말고 기부했다 생각하세요. 지금껏 감사한 일들 많았잖아요."

우여곡절 끝에 찾은 건 '감사함'

트리아카스텔라는 겨울철인데도 몇 곳의 알베르게가 운영 중이다. 공립은 5유로, 사립은 10~15유로 내외.
 트리아카스텔라는 겨울철인데도 몇 곳의 알베르게가 운영 중이다. 공립은 5유로, 사립은 10~15유로 내외.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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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아카스텔라에 도착해서 먹은 따끈한 크림 파스타가 그녀의 마음을 녹였나 보다. 공립 알베르게는 저렴하지만 부엌이 없고, 무선 인터넷도 되지 않아 문군은 오랜만에 사설 알베르게에 여장을 푼다. 어제까지 흐렸던 날씨는 오늘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선사해주고, 아담한 작은 마을에서의 산책은 고단했던 마음들에 쉼을 안겨준다.

순조로울 것 같았던 오늘 여정에 작은 복병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이 문군이나 다른 순례자들의 여정에 큰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결국 목적지에 무사히 왔고, 좋은 알베르게를 찾아냈으며, 섭섭함과 고단함을 싹 잊을 맛있는 저녁 식사와 샤워 후 잠자리에 들 때 보드라운 이불 속으로 파고 들어가는 그 느낌으로 하루의 감사함을 느낄 충만한 희열을 맛봤다.

작은 문제들을 애써 하나하나 집착해 대응하기보다 마지막 피니시 라인에서의 상황을 마음에 선명하게 그린다면 지나간 것들도 모두 약이 되든, 추억이 되든, 어쨌건 감사한 시간으로 남을 것이다. 아침부터 길을 잃고 허둥댄 것에 대해 이미 깨끗하게 잊고 세상 모르게 태평한 꿀잠을 자는 문군이나 존처럼.

순례 중인 하비. 건장한 체격에서 나오는 밝고 유쾌한 에너지를 가진 친구다.
 순례 중인 하비. 건장한 체격에서 나오는 밝고 유쾌한 에너지를 가진 친구다.
ⓒ 문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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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에는 2012년 2월 4일의 기록이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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