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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는 본래 이념이나 철학에 투표하는 게 아니다. 국민들은 투표하는 손가락에 "어느 당이, 어느 정치인이 우리네 삶을 살기 좋게 만들어 줄까"하는 기대를 걸어본다. 숱하게 배반을 당해 왔지만 그래도 국민들은 투표할 때마다 늘 이런 희망을 안고 투표장을 향한다.

패배한 진보 진영은 바로 이 점을 곱씹어야 한다. 진보와 보수가 건곤일척의 승부를 펼친 이번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과반수가 넘는 국민들은 박근혜 후보가 그들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판단했다.

충격에 빠진 진보 진영에선 "왜 우리가 졌지"라는 질문에 대한  현학적이고 이념적인 분석들이 쏟아지고 있다. 하지만 물음 자체가 틀렸다. "왜 우리가 졌지"라는 질문은 "왜 박근혜가 이겼지"라는 물음으로 바뀌어야 한다. 적의 장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받아들여 자신의 장점으로 승화시키는 일은 결코 수치스러운 게 아니다. 그래야 전쟁에서 이긴다.

박근혜 당선인의 승리 비결은 바로 이것이다. 그는 지난 4.11 총선을 앞두고 여당의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바꾸며 놀라운 변신을 시도했다. 지금은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새누리당이 '경제민주화'를 당 정강정책에 삽입하며 전면에 내세운 것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당 안팎에서 온갖 비판이 쏟아졌지만 박근혜 당선인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렇다. 이것이다. 박근혜 당선인은 진보 진영이 갈수록 국민들의 지지를 더해가는 핵심을 정확히 꿰뚫었다. 답은 경제민주화였다. 경제민주화는 재벌들의 부가 천문학적으로 늘어나는 반면 서민들의 삶은 왜 더욱 팍팍해지고 있는지 그 이유를 설명해준다. 그리고 잘못된 경제 시스템을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에 대한 처방전을 제시한다.

박 당선인은 신속하게 걸음을 내디뎠다. 김종인씨를 영입해 새누리당이 지향하는 경제민주화의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이후 쏟아진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 정책은 진보 진영의 경제민주화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새누리당은 적어도 경제 정책에서는 우에서 좌로 급회전했고 어느새 진보 진영과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박 당선인은 놀라운 흡수력을 지녔다. 경제민주화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정확히 읽자마자 주저하지 않고 진보 진영의 최대 비교우위인 경제민주화를 벤치마킹하고 고스란히 복사했다. 4.11 총선은 물론 이번 대선에서 여야의 정책은 너무나 닮은꼴이었다. 후보와 당명을 빼고 정책을 제시한 뒤 어느 당, 어느 후보의 것이냐를 묻자 반대로 대답한 경우가 많았다. 이로써 진보 진영의 최대 무기였던 경제민주화 정책은 무력화됐다.

박 당선인이 좌클릭도 주저하지 않으며 내달리고 있을 때 진보 진영은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이미 4.11 총선에서 새누리당의 좌클릭 변신에 크게 당했던 진보 진영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문재인 후보 측은 "정권교체", "새정치", "이명박근혜"라는 기존 구호를 앵무새처럼 되뇌였다. 60%를 넘는 국민들이 정권교체를 원한다는 숫자에 현혹돼 모호하고 추상적인 담론에 빠져 있었다. 안철수 후보와 단일화에 성공만 하면 승리할 수 있다고 자만했다.

국민은 설명을 원한다. 정권교체를 하면, 경제민주화를 실천하면, 새정치 시대를 열면 우리네 삶이 어떻게, 얼마나 좋아질 지 어렴풋하게나마 느끼기를 원한다. 하지만 문재인 측은 이에 대한 설명을 하지 않았다.

박근혜 당선인은 진보 진영의 최대 무기인 경제민주화를 무력화시킨 뒤 '플러스 알파(α) 전략'을 유감없이 구사했다. 보수 진영이 지닌 전가의 보도인 안보 논리와 경제민주화를 핵심으로 한 경제민주화를 인위적으로 결합시킨 뒤 '정권 교체'에 맞서 '시대 교체'를 내걸었다. 정권 교체를 바라고 있는 국민들에게 "박근혜를 찍으면 정권 교체 그 이상의 새로운 변화를 맞이할 수 있다"고 속삭였다.

박근혜 당선인은 '선거의 여왕'이다. 2004년 한나라당이 차떼기당과 탄핵 역풍으로 위기를 맞이했을 때 그는 당 대표를 맡아 '천막 당사'를 이끌었다. 17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참패를 당해 마땅했지만 121석을 확보하는 이변을 낳았다.

이명박 정권의 연이은 실정으로 다시 위기에 내몰린 한나라당은 다시 박근혜를 구원투수로 등판시켰다. 지난해 12월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아 당명 개정, 정강정책 개혁 등을 추진했고 19대 총선에서 152석을 거머쥐며 제1당의 자리를 사수했다. 그리고 18대 대선에서 독재자의 딸이란 오명을 딛고 재수 끝에 대통령에 당선됐다.

진보 진영은 "왜 박근혜가 선거의 여왕일까"라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져야 한다. 박 당선인은 민심의 향방을 그 어느 누구보다 정확히 읽고 사전 대응하는 민감한 촉수를 지녔다. 뿐만 아니라 당내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의 결정을 관철시키는 의지와 실행력, 그리고 전략도 갖췄다. 그에게 수식어처럼 따라다니는 '불통 이미지'는 한국 사회에서 여성 지도자에게 덧씌워지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사용한 전술이었을 것이고, 전략 측면에서는 진보 진영을 무력화시킬 만큼 대담하게 나아갔다.

민심은 어디를 가리키고 있었을까. 우리 사회의 대다수 국민들은 여전히 튼튼한 안보를 원한다.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는 삶을 조금이라도 개선시켜줄 지도자와 정책을 원한다. 추상적이고 어려운 가치와 철학보다는 쉽게 몸으로 느낄 수 있는 구호에 친숙하다. 박 당선인이 대선 막판에 전면에 내건 "다시 한번 잘살아보세"는 이런 점에서 민심을 정확히 파고 들었다. 이 구호는 안보, 민생, 경제민주화, 박정희에 대한 향수 등을 한데 뭉뚱그린 종합 선물세트였던 것이다. 

반면 진보 진영은 어땠나. 진보 진영은 박 당선인과 새누리당의 경제민주화가 실은 어설픈 복사본에 불과하다는 것을 각인시켜야 했다. 정권 교체, 새정치, "이명박근혜"를 외치기보다는 정권 교체 이후 삶이 어떻게, 얼마나 좋아질 수 있을지 비전을 제시했어야 했다.

여당이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잽싸게 고쳐 쓴 가면 뒤에 놓여 있는 진짜 얼굴을 폭로해야 했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식의 안보 정책은 오히려 남북관계를 갈등과 대립으로 내몰며 중장기적으로 국가 안보를 위태롭게 한다는 점을 납득시켜야 했다. 진정한 안보 강화는 남북관계의 정상화와 통일을 향한 협상에 있음을 알리며 그것이 오로지 진보 진영의 몫이라는 점을 강조해야 했다.

하지만 진보 진영은 이 모든 것을 무시했다. 한마디로 진보 진영은 여전히 '불통' 중이다. 민심의 향방보다는 자신들의 가치와 비전을 앞세우고, 자신들과 맞지 않는 가치나 사람들을 하찮게 여기는 독선을 버리지 못했다. 진보 진영의 소통은 20~40대에 국한돼 있었다. 50대 이상을 껴안으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번 대선에서 50대 이상은 기록적인 투표율과 박근혜에 대한 지지를 보여줬다. 50대 이상은 진보 진영을 매몰차게 내버리고, 자신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줄 것 같은 박근혜를 선택했다. 이미 그들의 몸에는 유신 독재 체제의 좋았던 추억이 깊게 각인돼 있었는데, 진보 진영은 이것을 무시해야 할 동기를 제시하지 못했다.

선거는 이념이나 철학이 아닌 삶에 대한 기대를 걸어보는 이벤트다. 절반이 넘는 유권자들은 안보와는 거리가 멀어보이는 진보 진영의 경제민주화에 대해 불안감을 느꼈고, 진보 진영의 주장과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겨지는 박근혜식 경제민주화에 표를 던졌다.

이번 대선에서 나타났듯 이제 우리 국민들의 절반 가량은 진보에 대해 체질적인 거부감을 없애고 아낌없는 성원을 보내고 있다. 이명박 정권의 반민주 행태와 반서민적인 정책 때문에 진보의 지평과 기반은 그 어느 때보다 넓어졌다. 하지만 진보 진영은 여전히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는 절반이 넘는 국민과 소통하지 못했다. 절대 질 수 없었던 선거에서 질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진보 진영은 얄량한 자존심을 버리고 박근혜 당선인을 철저하게 벤치마킹해야 한다. 자신의 집토끼를 사상 최대 규모로 결집시키고 중도, 심지어 반대 진영에 속했던 유권자들의 마음마저 돌릴 수 있었던 비법에 주목해야 한다. 선거의 여왕이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이 될 수 있었던 그 비법은 또다른 형태로 진보 진영의 최대 무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니 말이다.


#박근혜#문재인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18대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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