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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만 제때 꼬박꼬박 챙겨줬을 뿐인데, 콩나물은 닷새면 무침도 나물밥도 해먹을 수 있을만큼 자랐다. 그런데 10월에 들어서니 일주일도 더 걸린다. 콩나물이 '겨울이 오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하다. 일교차가 커지고 기온이 서서히 떨어지면서 그늘보다는 따뜻한 해 아래서 일하는 것을 더 즐겨하는 때가 된 것! 밭의 풍경 역시 추수와 갈무리를 맞아 달라지고 있으니 밥상 살림을 꾸리는 일도 달라지고 있다. 거둬들인 것들을 맛있게 요리해 내 몸에 들이는 것은 기본, 이후를 생각하며 잘 갈무리해두는 일까지 필요한 때다.

가을햇살 받은 나물... 먹으면 몸도 따뜻해져

10월 첫주 무렵에는 들깨 수확이 한창이었다. 들깨 대를 베기 전에 단풍이 든 깻잎을 따서 소금물에 절여뒀다. 차곡차곡 정돈된 깻잎이 잠겨 있는 유리병을 바라보면서, 어느 겨울날 짠 기를 빼고 조리거나 찌고 켜켜이 양념을 발라 아침 흰죽에 올려 먹는 상상을 한다. 메주콩 잎들도 서서히 단풍이 들어간다. 역시 부지런히 따서 삭혀둬야지. 그리고는 완전히 잊어버리는 거다. 반찬이 궁한 어느 날, 이 녀석들이 떠오른다면 몹시 반가울 터. 물을 여러 번 갈아가며 군내를 없애고 맛있는 양념을 바르면 밥도둑이 따로 없을 것이다.

비슷한 시기에 고구마 수확도 한창이었다. 많은 농가에서 고구마만 캐고, 고구마줄기는 그대로 버리거나 소에게 주는 걸 보고 있노라면 어찌나 아까운지! 껍질을 벗기는 바지런한 손만 있으면 고구마줄기로 김치를 담그거나 다진 마늘과 양파를 넣어 볶아 먹어도 맛있고, 말려서 묵나물로 저장했다가 들깨즙을 넣고 볶아 먹어도 맛있다. 올해는 고구마 캐고 남은 고구마줄기를 모두 데쳐서 가을햇살 아래 널었다. 파릇했던 고구마줄기는 햇살 아래 점점 짙은 갈색이 된다. 더 잘 마르라고 뒤적거려주는 김에 나도 그 옆에 앉아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쬐게 했다. 태양 아래 말리면 몸에 좋은 영양성분이 더 많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잘 말린 고구마줄기를 겨울 반찬으로 먹으면 몸이 따뜻해지리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고구마줄기에 가을햇살을 저장하고 있다.
▲ 고구마줄기 고구마줄기에 가을햇살을 저장하고 있다.
ⓒ 이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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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깨가루를 넣어 볶으면 구수한 한 끼 반찬
▲ 말린고구마줄기나물반찬 들깨가루를 넣어 볶으면 구수한 한 끼 반찬
ⓒ 이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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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해바라기를 하는 이가 어디 고구마줄기뿐이랴. 가지·표고버섯·토란대·호박·무... 뭐든 말릴 수 있는 것들을 햇볕에 널어두면 저장하기도 좋고, 밭에서 나는 것 없는 겨울에 요긴한 반찬이 돼 좋다. 특히 호박은 꼭 말려두고 싶고, 못 말리게 되면 서운하기조차 하다. 올해는 가뭄 탓인지 예년에 비해 늦게 얼굴을 내민 호박들이 많다.

서늘한 바람이 불 때 열린 호박은 어차피 늙은 호박이 되기는 늦었으니 보이는 대로 부지런히 땄다. 식구가 많은 날에는 된장국에 넣어 조금씩 나눠 먹기도 하고, 식구가 적은 날에는 납작하게 썰어 밀가루와 기름 없이 살짝 구워 양념장에 찍어 먹으며 풋풋한 향, 여린 촉감, 은은한 단맛을 그대로 느껴본다. 햇살은 따사롭고 바람은 서늘한 이 때, 애호박과 청년호박을 마지막으로 거둬 호박고지를 만든다. '비야, 비야. 오지마라' 노래를 부르며 부지런히 뒤집어 주면서 말이다.

따뜻한 가을햇살에 호박도 납닥납닥하게 썰어 널어 둔다.
▲ 호박고지 따뜻한 가을햇살에 호박도 납닥납닥하게 썰어 널어 둔다.
ⓒ 이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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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내내 먹는 무청, 줄 가득 널어두고

지난 10월 15일 아침에는 서리가 내렸다. 늙은 호박이 되지 못한, 그렇다고 청년 호박이라고 하기엔 성숙해버린 중년호박 여러 개를, 얼어서 상하기 전에 수확했다. 호박죽을 쑤어먹기에는 밋밋하고, 반찬으로 먹기에는 어색한 단맛은 고민거리였다. 지난해 이맘때 중년호박을 거두고는 어떻게 요리해서 먹으면 좋을지 여기저기 물어봤지만 대부분 잘 먹지 않는지 쉽게 대답을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 이 중년 호박을 큼직큼직하게 썰어 새우젓·양파·대파·마늘·고춧가루 등을 조금 넣고 끓였는데 맛있던 기억을 살려 호박찜을 만들었다. 지난해에 중년 호박이 꽤 많았던 터라 이 반찬이 자주 나왔는데도 볼 때마다 말없이 씩 웃던 친구들을 생각하며 올해도 밥상에 올리려 한다.

중년호박으로 만든 호박찜
▲ 호박찜 중년호박으로 만든 호박찜
ⓒ 이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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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에 심었던 무도 점점 굵어져갔다. 얼마 전 큼직한 무를 서너 개 뽑아서 뿌리는 나물로 먹고, 무청은 그늘에 널었다. 잘 말린 시래기는 국도 끓여 먹고, 들깨가루 풀어 된장에 지져 먹고, 구수하게 나물밥과 죽으로도 먹으니 일년 내내 밥상에서 효자 노릇하는 아이다. 무생채하고 남은 무청, 무국 끓이고 남은 무청, 깍두기 담고 남은 무청을 하나둘 널어둔다. 그러다 처마 밑에 길게 쳐 놓은 줄이 모자라, 길게 엮어 매달아두는 행복한 상상을 한다. 무가 풍년인 때가 온다면 굵게 채 썰어 무말랭이로 저장도 해보리라.

무청을 말려두면 일년 내내 먹을 수 있는 먹거리가 된다.
▲ 시래기 무청을 말려두면 일년 내내 먹을 수 있는 먹거리가 된다.
ⓒ 이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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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홍천 서석면 효제곡 마을과 서울 인수 마을에 농도상생공동체를 일구며 살고 있는 아름다운마을공동체 소식지 <아름다운마을신문>에도 실었습니다.



태그:#제철밥상, #묵나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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