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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이 땅을 점령해 있을 때도 언론인에 대한 사형은 없었다. 건국 이후 유일한 언론인 사형을 무지막지한 박정희는 저질렀다. 조용수 선생은 진주에서 꿈을 키웠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고향으로 오지 못했던 원혼이 돌아오는 자리다. 세월은 흘렀지만 우리의 언론 환경은 그리 나아진 것 같지 않다."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지회장 이기동)가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 추모, 재조명 학술회의"를 마련하면서 밝힌 취지문의 일부다. 행사는 11일 오후 진주 경남과학기술대학교 산학협력관 강당에서 열린다.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생전 모습.
 <민족일보> 조용수 사장의 생전 모습.
조용수(1930~1961) 선생은 진주가 고향이다. 진주시 수정동에서 태어났던 그는 진주 봉래국민학교를 나와 1943년 진주중학교에 입학했다가 1948년 자퇴했으며, 이듬해 대구 대륜중학교 편입학한 뒤 졸업했다.

조 선생을 기리는 행사가 고향에서 열리는 것이다. 조 선생은 현재 남한산성 쪽에 묻혀 있으며, 그동안 서울 등지에서 추모학술세미나 등을 열어 왔던 것이다.

조 선생은 1961년 1월 25일 (주)민족일보를 설립하고 사장에 취임했으며, 그해 2월 13일에 창간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던 박정희 정권은 그 다음 날 민족일보사를 점거했고, 폐간(5월 19일, 지령 93호)시켰던 것이다.

당시 5․16 쿠데타 정권은 <민족일보> 폐간하는 날 조 선생을 구속시키고, 재판소는 그해 8월 12일 사형을 선고했다. 당시 사형 선고는 이회창 전 총재가 판사로 있었을 때 재판 실무를 맡기도 했다. 대법원은 그해 10월 31일 상고 기각했고, 5․16쿠데타정권은 그해 12월 21일 사형을 언도했다.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는 "이 사건은 일제가 이 나라를 강점하고 있을 때조차도 언론인데 대한 사형은 없었거니와, 건국 이후에 유일한 언론인에 대한 사형 기록"이라며 "유래 없는 언론탄압의 역사로 기록되고 있는 민족일보 사건의 피해자가 진주 출신의 조용수 사장이라는 사실은 진주에 사는 우리에게 많은 숙제를 남기고 있다"고 밝혔다.

추모제는 이기동 지회장의 사회로, 김수업 전 대구가톨릭대 총장이 초헌,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이 아헌, 조용준 민족일보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종헌을 맡는다.

서금성 전 부산경남와이티엔 회장이 약력보고를 하고, 이기형·권영란 시인이 추모시를 낭송하며, 장순향 한양대 교수가 '해원무'를 춘다. 이어 이계환 통일뉴스 대표이사가 경과보고를 하고, 송기인 신부(전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가 격려사를 한다.

또 강창덕 4․9인혁열사계승사업회 이사장, 장영달 민주통합당 경남도당 위원장, 박중기 민족민주열사추모단체연대회의 명예의장, 이철 민청학련정신계승사업회 회장, 남두용 전국언론노조 문화방송본부 진주지부장이 추모사를 한 뒤 헌화한다.

이어 "민족일보 사건의 성격과 조용수 사장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학술회의가 열린다. 이종걸 국회의원이 좌장으로, 원희복 경향신문 기자가 발제한다.

최상한 경상대 교수, 이춘웅 민족일보기념사업회 일본지회장, 김주완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 강정구 전 동국대 교수, 정대화 상지대 교수가 토론한다.


태그:#조용수, #민족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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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부산경남 취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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