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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의 관점에서 보자면 지난해까지 세상에는 크게 세 종류의 한국인들이 있었다. (여기서 말하는 한국인이란 한국의 피가 흐르는 민족적 개념이 아닌, 법적으로 남한 정부가 발급한 신분증명서를 가진 대한민국 국민을 말한다.) '선거하기 편한 사람', '선거하기가 불편한 사람', 그리고 '선거를 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사람', 이렇게 세 부류이다.

선거하기 편한 사람은 한국에 살고, 투표일에 일을 하지 않으면서 동네 투표소에서 불편함 없이 선거를 할 수 있는 이들이겠고, 선거하기 불편한 사람은 출근을 해야하거나, 투표소까지 거리가 먼 사람일 것이고, 선거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사람은 바로 나 같은 사람에 해당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15년 이상 폴란드, 발트3국 등 우리나라와 정치· 외교적 관심밖의 변방국가에서 살고 있는 필자는 예비군훈련, 민방위훈련 등을 받아야하는 의무감에서는 해방됐지만, 선거참여라는 권리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상적인 경제화와 민주화가 이루어진 나라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재외국민참정권이 주어지지 않는 나라의 국민이었기 때문에 선거에 참여 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했다.

선거참여 원천적으로 봉쇄....올해부터 달라져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에서 폴란드 바르샤바로 가는 버스. 18대 대선 재외국민투표에 참여하기 위해 밤 버스에 올랐다.
▲ 투표하고 올게요~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에서 폴란드 바르샤바로 가는 버스. 18대 대선 재외국민투표에 참여하기 위해 밤 버스에 올랐다.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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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다행히 올해부터는 선거를 앞둔 한국인의 범주가 두 개로 줄어들었다. 외국에 사는 이들에게도 참정권이 주어진 최초의 해이기 때문이다. 그동안 내가 살고 있는 나라의 지역신문에서 자국의 국민들에게 선거 일자와 방식을 안내하는 공고문을 볼때마다 외국에 사는 이유로 참정권이 주어지지 않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투표권이 주어지는 이런 날이 오기를 얼마나 손꼽아 기다렸는지 모른다.

물론 참정권이 주어진다고 해도, 선거하기 편한 사람의 범주에 들어가는 일은 여전히 힘든 일이다. 왜냐하면 필자는 대사관이 없는 나라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과 외교관계는 수립되어있지만, 리투아니아는 아직 한국의 공식 공관이 없이 폴란드에 있는 한국대사관에서 관할을 하고 있다.

재외국민등록이 되어있는 공관에서만 선거를 해야하는 것은 아니라지만, 리투아니아 인근에 있는 가장 가까운 대사관은 주벨라루스 한국대사관이다. 한국대사관이 있는 벨라루스수도 민스크까지는 차로 3시간 정도, 그러나 벨라루스는 한국인들이 비자를 신청해야만 갈 수 있는 데다가 신청금액과 처리기간이 오래 걸려 그리 매력적인 장소가 아니다. 리투아니아에 살고 있는 필자가 스웨덴이나 핀란드로 가지 않는 한, 폴란드 이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

지난 총선때와는 달리 대통령 선거 기간 때는 시간적 여유가 생겨 폴란드에 다녀오기로 했다. 필자는 12월 5일 리투아니아 카우나스에서 오후 4시 50분에 출발하는 버스를 타고 투표장이 있는 폴란드 바르샤바로 떠났다. 바르샤바에 도착하자 현지 시간은 오후 10시30분,
1시간 시차가 있는 리투아니아 시간으로는 오후11시 30분. 바르샤바에 도착하자 스탈린이 지어줬다는 공산주의의 잔재 문화과학궁전이 '새끈한' 조명을 받아 7년 만에 폴란드를 찾은 필자를 반갑게 맞아주었다.

폴란드 한국대사관에서 18대 대선 재외국민투표에 참여한 필자의 모습.
 폴란드 한국대사관에서 18대 대선 재외국민투표에 참여한 필자의 모습.
ⓒ 서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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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집에서 하루를 보낸 후 그 다음날 바르샤바에 있는 폴란드 대사관에 찾아가 꿈에 그리던 재외국민투표를 마치고 투표장을 찾은 교민들과 함께 대사관에서 마련해준 다과와 차를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선거안내를 담당하고 있는 관계자는 "폴란드에 등록되어있는 한국인들 중 대략 절반 정도가 이번 선거에 재외선거인 등록을 했다"면서 "폴란드에 재외국민투표 등록을 했다 하더라도 독일 국경에 살 경우 베를린에서 투표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에 정확히 몇명이 투표할지는 가늠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때마침 폴란드에 살고 있는 교민들의 투표 참가를 독려하기 위해 8일 오후 폴란드 한인 교민회의 송년회까지 계획해 먼 곳에 살고 있는 한국인들의 투표율을 조금은 더 높일 수 있었다.

"한국의 미래를 위해 가장 쉬운 참여방법은 투표"

대사관이 없기는 다른 발트국가 역시 마찬가지다. 에스토니아에 사는 교민들은 관할국 핀란드 한국대사관까지 가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다. 대사관이 위치한 헬싱키는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뱃길로 1시간 30분이면 도달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핀란드 한국대사관에서는 재외국민투표가 다른 곳보다 늦은 7일에 시작했다. 탈린에 위치한 에스토니아 국립음대에서 트럼펫을 전공하는 가민주(23)씨 역시 탈린에서 배를 타고 헬싱키에 다녀와 페이스북에 인증사진을 올렸다.

핀란드 한국대사관에서 재외국민투표를 진행한 가민주씨
 핀란드 한국대사관에서 재외국민투표를 진행한 가민주씨
ⓒ 가민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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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정치 쪽에는 깊은 관심이나 지식은 가지고 있지 않지만 대한민국 미래는 몇몇이 아닌 우리 손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가장 쉬운 참여방법이 투표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있지만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가지게 되는 권리를 꼭 행사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1시간 30분, 뱃길 이동이라서 선거를 하는 것이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을 수는 있겠지만, 정작 에스토니아에서 선거를 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우선 에스토니아에 정식으로 교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대략 10명 안팎에 불과하다. 요즘 들어 에스토니아와 한국대학들 간의 학술교류가 늘어서 교환학생들의 수는 계속 늘고 있지만 정치적인 관심은 그리 높지 않은 편이다.  리투아니아에서도 대략 3명 정도의 교민이 이번 투표에 참여했고, 배를 타고 10시간을 가거나 비싼 비행기표를 타야만 스웨덴 스톡홀름 대사관에 갈 수 있는 라트비아 교민의 투표참가율은 아주 낮았다.

1년째 오직 육로를 통해서만 세계여행을 하고 있는 하태준(27)씨. 중국, 동남아, 인도, 터키를 거쳐 현재 유럽 여행을 하고 있는 그도 이번에 프랑스 투표소에서 투표에 참여해 페이스북에 인증사진을 올렸다. 그는 재외선거인 등록을 했지만 여행 중 일정을 정확히 알 수 없어 과연 투표를 할 수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단다.

하지만 다행히 접수가 끝난 이후에 규칙이 바뀌어서 신청서에 기입한 공관(이탈리아 밀라노)이 아니라 다른 공관에서도 투표가 가능해져서 무사히 투표를 마칠 수 있었다. 그는 기자와 가진 이메일 인터뷰에서 어려운 환경에서 투표를 하기로 마음 먹은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세계여행중에 프랑스 한국대사관에서 18대 대선 재외국민투표에 참여한 하태준씨.
 세계여행중에 프랑스 한국대사관에서 18대 대선 재외국민투표에 참여한 하태준씨.
ⓒ 하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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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표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유는 좀 더 나은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제 힘을 보태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이번 정권을 통해서 정치의 중요성, 정치가 우리 생활에 얼마나 큰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분노했습니다. 이번 대선에서 이상한 사람이 당선되어 대한민국을 망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서 투표했습니다. 추가로, 힘든 여행을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투표를 하겠다는 마음만 있으면 말이죠."

재외국민투표 기간이 시작되자 한국 언론들은 외국에 살고 있는 '선거하기 어려운 부류'의 한국인들 소식을 많이 보도했다. 그루지아 트빌리시 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강의하시는 계로이 선생님과 다른 교민들이 터키에 있는 대사관에서 투표하기 위해 2박3일 걸리는 여행을 시작했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7시간 버스를 편하게 타고 가서 투표를 한 필자는 차라리 편한 축에 든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미국에 사는 친구로부터 "투표를 하기 위해 8시간이나 되는 먼길을 마다않고 직접 운전을 해서 다녀왔다"는 문자메시지를 접하곤 난 차라리 '선거하기 편한 부류'에 속한다고 확신하기에 이르렀다. 많은 재외국민들은 그동안 투표를 하지 못하던 부류에서 그나마 '어렵지만 할 수는 있는 부류'로 신분상승을 이룬 기쁨에 그런 어려운 결정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 IT강국 아니었나요?"

그러나 이런 한국인들의 선거열기를 모든 이들이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가 투표를 하기 위해 폴란드까지 가야한다고 말을 하면 주변에서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IT강국이라고 전세계에 광고를 하는 한국에서 왜 아직까지 인터넷 투표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실제로 에스토니아는 몇 년 전부터 다양한 선거에 인터넷 투표방식을 도입해서 꽤 큰 성공을 거뒀으니, 에스토니아 사람들에 보기에는 한국이 이상할 수밖에.

리투아니아의 경우도 전세계에 대사관이 없는 나라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한국은 재중 리투아니아 대사관이 관할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한국에 사는 리투아니아인이 선거 때마다 일부러 돈을 들여서 중국에 가진 않는다. 관할 대사관이 멀어서 투표를 하러 가기가 어려운 이들은, 관할 대사관에서 각각의 교민들에게 투표용지와 투표에 필요한 서류들을 우편으로 보내준다. 그럼 선거권자들은 투표를 한 용지를 밀봉해 관할 대사관에 보내면 끝이다. 인터넷 선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런 간단한 우편 투표 방식조차 없는 한국의 재외국민 선거 방식이 그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그들은 해외에 사는 한국인들이 비로소 올해 들어서야 '투표가 불가능한 부류'에서 '투표가 어려운 부류'로 신분상승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더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세계에 알려진 IT기술과 정치 발전은 아직 외국인이 상상하는 한국의 모습과 상당히 거리감이 있다. 그동안 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던 재외국민들은 정작 인터넷선거나 우편투표보다 정부가 투표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준 것에 감사해야하는 상황이다.

그렇게 필자가 투표를 마치고 며칠 동안 바르샤바에 머물면서 사람들을 만나 회포를 풀고 사흘 만에 돌아오니, 정신은 몽롱하고 몸을 천근만근이지만 그래도 일부러 시간과 돈을 들여 찾아간 만큼 삶의 활력소를 제공한 것은 분명하다.

이번 대통령 선거로 선출된 후보가, 그렇게 산 넘고 물 건너 바다 건너서 어렵게 선거에 참여한 교민들과 어려운 삶을 살고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과 한국 역사에 한줄기 활력소가 되어주길 기대해본다.


태그:#18대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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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진석 기자는 십수년간 발트3국과 동유럽에 거주하며 소련 독립 이후 동유럽의 약소국들이 겪고 있는 사회적 문화적 변화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해오고 있다. 현재는 공식적으로 라트비아 리가에 위치한 라트비아 국립대학교 방문교수로 재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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