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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주 애들레이드 공원 벤치 저 의자에 앉아있을 때, 거지를 만났다.
호주 애들레이드 공원 벤치저 의자에 앉아있을 때, 거지를 만났다. ⓒ 김종훈

2011년 호주에 있을 때다. 여행 중 돈이 떨어져 잔고가 바닥났다. 당장 살기 위해 일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번번이 인터뷰에서 떨어졌다. 이유를 들어보니 원하는 일을 하기엔 나의 영어 실력이 부족했다고 한다. 바로 눈을 낮춰 면접을 봤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 미리 준비한 샌드위치나 먹을 요량으로 근처 공원에 들렀다.

그런데 지나가던 거지 하나가 나를 빤히 쳐다보며 말하는 것이다. "이봐, 2달러만 줘." 주머니엔 정확히 20달러 지폐와 2달러 동전 하나만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자리를 피했을 텐데, 그날은 이상하게 괘씸한 마음이 들었다. 무엇보다 '돈이 없어 길에서 빵 부스러기 먹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돈을 달라고 하다니', 한 마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결국 그에게 2달러를 주었다. 솔직히 대화를 나눌수록 마음 한편에서 부러움이 들었다. "내게 2달러만 줘"라고 말하는 거지의 영어가 멋스럽게 들려왔다.

그래도 그냥 주진 않았다.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2달러 줄 테니, 내게 영어 잘하는 법 좀 알려줘"라고 말했다. 거지는 오히려 신기한 듯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매우 또박또박 나에게 물었다. "너는 왜 영어를 잘하고 싶은데?" 문제는 여기서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 때 주도권이 넘어갔다. 거지는 '왜(why)'라고 물은 뒤, "더 알고 싶으면 2달러 더"라고 말해왔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거지와 나눈 대화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왜 영어를 잘하고 싶은가?' 솔직히 거지에게 이야기를 듣기 전까지 왜 영어를 잘하고 싶은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번번이 인생의 발목을 잡던 토익에서 높은 점수만 받고 싶었다. 한 가지 더 있다면 한국인 사이에서 영어 잘한다는 소리 한 번 들어보고 싶었다. 남들 다 하니까 따라했던 것이다. 그뿐이었다.

그 후로 며칠이 지났다. 그 사이 면접도 몇 군데 다시 봤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하리 만큼 면접을 마친 후 안도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는 면접을 보는 족족 '리안(나의 영어 이름), 내일부터 일하러와'라는 메시지를 계속 받았다. 그런데 생각해 보니, 거지와의 만남을 기점으로 약간의 차이가 생겼다. 인터뷰 내내 제대로 '대화'를 나눴다. 그 거지처럼 '목적'을 제대로 전하는 영어를 했던 것이다. 영어가 온전히 대화의 수단으로만 작용했다. 그간 영어가 목적이라 생각하고 대화를 했었는데, 거지 때문에 대화를 위한 영어를 하게 됐다.

주머니 속 2달러 거지를 다시 보고 싶어 2달러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주머니 속 2달러거지를 다시 보고 싶어 2달러를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 Derrick

그 후로, 2달러를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내심 그 거지를 다시 만나, 노하우를 더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우리들의 대화는 그 때가 마지막이었다. 거지를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그래도 거지에게 여전히 고마운 사실 하나가 있다. 영어에 대한 나의 목적이, 무엇이 돼야 하는 지 정확하게 일깨워 줬다. 바로 '대화'다. 영어가 하나의 언어로써,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해하기 위한 대화임을 제대로 보여줬다. 그래서 '거지의 영어'가, 내 영어의 목표가 된 것이다. '거지처럼 영어하기' 2달러로 배운 값진 교훈이다.


#영어제대로#호주#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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