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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덕왕릉에서 비좁은 도로를 타고 육통리 회화나무가 있는 마을을 빠져나오니 초등학교를 왼쪽에 낀 다리 하나가 떡하니 앞을 가로막는다. 노당교를 건너 68번 국도를 따라 기계방향으로 들어서는데, 우람한 크기의 은행나무 한 그루가 건물 뒤편으로 얼굴을 불쑥 들이민다.

경주시 안강읍 노당리 노당1리 마을회관 옆에는 길게 늘어진 나뭇가지를 봉대로 힘겹게 받친 고목 한그루가 있다. 나무 아래에는 행인들이 잠시 쉬어가도록 간이쉼터가 마련되어 있는데, 마치 초등학교 교정에서나 있을 법한 자그마한 야외용 탁자가 노랗게 물든 은행잎과 함께 동심을 자아낸다.

나무 아래로 한 발짝 바짝 다가서자 햇살은 따사롭고, 주변을 둘러싼 먼 산은 편안하고 잔잔하다. 노란 은행잎이 자욱하게 깔린 고목을 배경으로 기념사진 촬영에 여념 없는 우리 일행을 보고는 가을 농사일에 분주한 동네 아낙들이 마냥 신기한 듯 곁눈질을 한다.

노당1리 마을회관 옆 은행나무(위)와 고인돌(아래)
▲ [그림1] 노당1리 마을회관 옆 은행나무(위)와 고인돌(아래)
ⓒ 남병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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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와 마을회관 사이의 널따란 공터에는 벽돌로 담장을 두른 작은 비석과 커다란 바윗덩이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있다. 비석은 묘지 돌로 쓰이는 오석(烏石)에 서너 문장을 음각하여 새겼는데, 한자에는 워낙 까막눈이라 인근마을의 효자나 열녀를 기리는 비석으로 어림짐작해 볼 뿐이다.

비석 곁의 커다란 바위는 검은색의 푸석푸석한 질감으로, 이와 같은 돌들은 경북북부지방의 답사 길에서 흔히 마주치는 것들이다. 바위 표면에는 드문드문 얕은 구멍을 뚫은 흔적이 패여 있는데, 청동기시대의 대표적 무덤양식인 고인돌이 아닐까 조심스레 가늠해본다.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외관상 크게 2가지로 분류된다. 우선 지상에 4면으로 판석을 막아 묘실을 만든 후 그 위에 덮개돌을 덮은 경우가 있고, 다른 하나는 지하에 묘실을 만들고 그 위에 덮개돌을 덮은 후 돌을 괸 모양이 일반적이다.

전자는 대체로 한반도 중부 이북에 집중되어있고, 후자는 중부 이남에 분포하므로, 과거에는 이들을 각각 북방식과 남방식 고인돌로 분류하였다. 그러나 일부지역에서는 북방식과 남방식이 혼재하고 있는 경우도 있어 이러한 분류방식은 점차 설득력을 잃게 되었다.

따라서 최근에는 고인돌의 외관적 특성에 따라 탁자식(기존 북방식)과 바둑판식(기존 남방식) 고인돌로 명명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특히 고인돌 하부를 파낸 후 지하에 매장주체를 두는 바둑판식의 경우, 실제적인 발굴조사 전에는 대상유적의 성격을 명확히 알기는 어렵다.

모진 비바람 속에 수백 년의 시간을 꿋꿋이 버텨온 고목과 그보다 더 오랜 수천 년의 세월을 홀로 감당한 바윗덩이는, 이 땅을 살다간 이름 없는 옛 조상들의 지난 삶을 한마디 말도 없이 온몸으로 웅변하는 것만 같다.

뜻하지 않은 답사길의 즐거움, 단구서원의 모과와 귀래정의 달래

단구서원(丹邱書院)
▲ [그림2] 단구서원(丹邱書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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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동 문화마을을 찾아가다 우연히 만난 경주시 강동면 일대는 옛 마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는 한옥 고택들이 곳곳에 즐비하다. 강동 초등학교 단구분교장 근처에 자리한 단구서원은 오색단풍의 낙엽들이 자그마한 서원 초입을 가득 메우고 있다.

길섶에는 탐스럽게 여문 빛 좋은 모과들이 메마른 나뭇가지에 대롱대롱 매달려 늦가을을 만끽한다. 마침 나무 아래 주인 없이 나뒹구는 모과를 운 좋게 발견하고는 천연방향제로 쓸 요량으로 서너 개를 주섬주섬 챙겨들었다. 서원은 자물쇠로 굳게 잠겨 출입이 어려웠지만, 나지막한 담장너머로 내부가 찬찬히 바라다 보인다.

단구서원은 문희공 이세기 선생을 주벽으로 하고 문효공 이천선생 송와공 이종윤을 배향하는 곳이다. 송와공을 제향하는 모현서당으로 철종13년(1862년)에 건립되었는데, 고종5년(1868)에 훼철되었다가 1983년에 복원되어 오늘의 모습에 이른다. 경내에는 경현사, 숭광당, 경모재, 양진재, 열호문, 묘정비가 있으며, 매년 3월초경일에 향제를 올리고 있다.

경주귀래정(慶州歸來亭)
▲ [그림3] 경주귀래정(慶州歸來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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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구서원 앞으로 난 골목길을 따라 다산2리 마을회관 쪽으로 내려오면 마을 한가운데 커다란 공터를 끼고 한옥담장에 둘러싸인 정자가 있다. 나지막한 출입문을 지나면 오른쪽으로 정자를 관리하는 관리소격의 한옥 한 채가 보이고, 간간이 동네사람들이 드나드는지 잔디가 깔린 마당에는 수확한 농작물들이 가을햇살을 쬔다.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94호로 지정된 경주귀래정(慶州歸來亭)은 조선 영조 31년(1755)에 여강 이씨 천서문중에서 지은 건물이다. 조선 중종 때 문과에 급제한 후 병조좌랑, 예조정랑을 거쳐 홍문관 검교를 지낸 바 있는 이철명(1495∼?) 선생을 추모하여 1930년에 건립하였다.

귀래정은 육각평면으로 구성된 결구법과 독특한 조원구성으로 인해 한국 전통건축과 조원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마침 정자를 찾는 방문객들이 없어 찬찬히 내부를 살펴 볼 수 있는 행운을 가졌다. 기둥과 기둥 사이로 보이는 시원한 프레임은 마치 파노라마사진처럼 좌우로 확장되는데, 활짝 펼쳐진 육각모양의 지붕처마가 시원스레 하늘로 날아오른다.

정자는 높다란 석축기단위에 자리해 연못 가운데 섬처럼 떠있는 모양인데, 연못 속에 노니는 물고기들은 한가로운 가을 오후를 마음껏 즐긴다. 정원 주변에는 오래된 향나무가 사방으로 둘러쳐있고, 앞쪽으로는 특이한 모양의 기암괴석이 양쪽으로 하나씩 놓여있다.

귀래정 연못의 여유로운 물고기들(위)과 웰빙 달래라면(아래)
▲ [그림4] 귀래정 연못의 여유로운 물고기들(위)과 웰빙 달래라면(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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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래정 마당에는 하얀 실타래 같은 연두 빛 달래가 풀꽃들 사이로 삐죽이 머리를 내민다. 이 가을에 달래를 구경하다니, 따뜻한 가을햇살에 저도 봄인줄 알고 착각한 모양이다. 어느덧 점심때가 다 된 모양인지 뱃고동 소리가 요란하고, 때마침 귀한 달래도 얻었으니 서둘러 점심식사 준비에 돌입하였다.

동네 어르신들의 지극한 배려로 정자 옆 문중 고택에서 점심 밥상을 준비한다. 가을여행길에서 만난 오늘의 계절요리는 제철 채소를 이용한 '웰빙 달래라면'이다. 집에서 미리 챙겨온 몇 가지 밑반찬과 김치 그리고 라면국물에 말아먹을 식은 밥과 함께 점심나절의 맛깔스런 귀래정은 오래도록 나의 기억 속에서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400년 전통마을의 옹골찬 내력, 포항 기북 '덕동 문화마을'

허기진 배를 든든히 채우고 난 뒤 다음 목적지를 향해 서둘러 걸음을 재촉한다. 31번 국도를 따라 죽장방향으로 진행하다 921번 국도를 갈아타고 포항시 북구 기북면 오덕리로 깊숙히 들어서면, 1992년에 제15호 문화마을로 지정된 덕동 문화마을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마을 내에는 경상북도민속자료 제80호인 애은당고택과 제81호 사우정고택,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43호 용계정 등이 자리 잡고 있으며, 마을의 저수지와 계곡 사이의 소나무 숲은 '아름다운 마을 숲'으로 지정되어 특별 관리되고 있다. 그밖에 기타 볼거리로는 집성촌 대대로 내려오는 유물들을 보존전시하고 있는 덕동 민속전시관이 있다.

포항시 기북면 오덕리에 위치한 ‘덕동 문화마을’
▲ [그림5] 포항시 기북면 오덕리에 위치한 ‘덕동 문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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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동마을은 여강이씨 집성촌으로, 임진왜란 때 이곳에 피난 왔던 농포(農圃) 정문부(鄭文孚)가 전쟁이 끝난 후 전주로 돌아가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손녀사위인 사의당 이강에게 물려준 것을 계기로 집성촌이 형성되었다. 몇 년 전 문화재반환 문제로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했던 북관대첩비와 정분부장군의 흔적을 덕동에서 잠시나마 떠올려본다.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는 함경북도 북평사 직을 맡고 있던 정문부 장군이 임진왜란 중 의병을 모아 왜군을 격퇴한 공을 기려 조선 숙종 때 북평사 최창대가 함경북도 길주군 임명면에 세운 전공 기념비이다. 높이 187㎝, 너비 66㎝인 이 비석에는 당시 의병들의 활동과 공로가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905년 러·일 전쟁 당시에 일본군 소장 이케다 마시스케가 일본으로 가져갔고, 그 후 반환될 때까지 야스쿠니 신사에서 보관하였다.

2005년 6월 28일, 대한민국 정부는 북관대첩비의 반환을 공식 요청하였고, 2005년 10월 3일, 북관대첩비의 반환이 최종 결정되었다. 그에 따라 한국의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에서 이전 해체 및 보존처리를 담당하였고, 그 후 2006년 3월 1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최종 인도되었다. 400년 전통마을의 옹골찬 내력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해볼 수 있다.

덕동 문화마을 내 ‘민속전시관’
▲ [그림6] 덕동 문화마을 내 ‘민속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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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동 마을 내 민속전시관에는 200년이 넘은 사주단자, 마을의 내력을 담은 고문서 등 전통생활과 관련된 2000여점의 각종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다. 예전 할머니 댁에서나 종종 마주쳤을 법한 오래된 고가구들이 눅눅한 세월의 흔적을 껴안고, 박제된 것처럼 그대로 머물러있다.

전시관 입구의 경비실에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 한 분이 자리를 지키고 계신다. 여느 관광객들과 달리 전시관 내부를 꼼꼼히 살펴보는 우리 일행이 속으로 대견했던지 어르신은 안으로 불러 손수 커피 한 잔을 타주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으신다.

문중의 종반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어르신은 요즘 젊은이들에게 이것저것 당부할 것이 많으셨던 모양이다. 마침 타이밍이 적절했던 우리 일행에게 열변을 토하시는 어르신의 꾸중 아닌 꾸중에 이 시대 젊은이를 대표해서 훈육을 받는 기막힌 꼴이 되어버렸다. 경비실 한쪽에 걸린 묵은 벽시계가 벌써 3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어 서둘러 자리를 파한 뒤 마을을 둘러본다.

덕동 문화마을의 ‘섬솔 밭’ 내에 이름표를 단 소나무들
▲ [그림7] 덕동 문화마을의 ‘섬솔 밭’ 내에 이름표를 단 소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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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동 마을은 2006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경력이 있다. 마을 숲은 들머리의 송계(松契)숲과 마을 앞 용계천 건너편의 정계(亭契)숲, 그리고 호산지당(護山池塘)이라 불리는 연못가에 자리한 섬솔 밭으로 나뉜다.

섬솔 밭은 생태하천을 따라 아담한 산책로가 조성되어있는데, 특이한 것은 솔밭의 소나무들이 저마다 이름표 하나씩을 가슴에 매단 것이다. 가까이 다가서니 나무를 관리하는 사람의 이름들 같은데,  "관리책임자 20, 성명 이동명, 택호 산대댁"과 같이 택호를 그대로 살려 표기한 것이 제법 흥미로웠다. 지금도 몇몇 전통마을에서는 아직도 택호가 주민등록보다 더욱 앞서기도 한다.

덕동 문화마을 내에 위치한 회나무우물
▲ [그림8] 덕동 문화마을 내에 위치한 회나무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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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솔 밭 산책로가 끝나는 곳에는 특이한 우물이 하나 있는데, 약 350년 전에 축조된 회나무우물로 과거에는 마을의 공동식수로 사용했다고 한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덕동 마을은 산강 수약의 형세라, 산새는 강하고 물이 적어서 인물이 배출되지 않는다고 한다. 따라서 이러한 마을의 약점을 풍수로 비보하기 위해 회나무우물을 축조하면서 호산지당이라 불리는 연못을 만들었다고 한다. 늘 조화를 중시했던 선조들의 유연한 사고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겨울 채비에 한창인 덕동 문화마을
▲ [그림9] 겨울 채비에 한창인 덕동 문화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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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질녘의 덕동 마을은 고즈넉하다. 붉은 황토로 벽을 메운 돌담은 부드럽고, 담장너머 통통하게 살이 오른 개암나무 열매가 풍성한 계절의 끝을 다시금 회상시킨다. 오래된 한옥의 용마루아래 초가지붕의 정겨운 곡선과 울긋불긋 천연의 색을 머금은 대자연의 하모니에 산촌의 가을저녁은 더욱 깊어만 간다. 덕동 마을의 겨울은 제법 일찍 찾아오는가 보다. 김장을 담글 배추와 한겨울 아궁이를 지필 장작이 벌써 마당을 한편에 쌓여있다.

덕동에서 하룻밤을 머무를까 하다가 내친김에 경북 북부지역으로 재빠른 걸음을 옮긴다. 무심코 불어 닥친 가을바람에 가지 끝에 막 피어난 아름다운 꽃들을 놓칠세라 백두대간의 심장, 경북 청송으로 발길을 돌렸다. 오늘밤은 '송소 고택'의 뜨끈한 아궁이에 밑불을 넣고 타닥타닥 장작소리를 벗삼아 곤한 잠에 들고 싶다.

청송이 이제 멀지 않았나 보다. 길가에는 붉게 물든 노을보다 더욱 탐스럽게 잘 익은 청송 꿀 사과가 "나그네 양반, 시장하실 터인데 한번 맛보지 않겠소?" 하고 진한 농을 건넨다.

청송 '송소고택' 가는 길에 만난 청송 꿀 사과와 붉은 노을
▲ [그림10] 청송 '송소고택' 가는 길에 만난 청송 꿀 사과와 붉은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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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2012년 11월6일의 경주시 강동, 포항 기북 일대의 문화유산 답사기록입니다.



태그:#덕동 문화마을, #단구서원, #귀래정, #청송 꿀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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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경북지역 대학생문학연합(효가대 난문학회) 동인/ 문화유산답사회 우리얼 문화지킴이간사/ 국립문화재연구소 복원기술연구실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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