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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 동네 어귀에서 항상 만나는 플라타너스, 묵묵히 서 있는 나무를 보며 위로를 얻는다.
 이천 동네 어귀에서 항상 만나는 플라타너스, 묵묵히 서 있는 나무를 보며 위로를 얻는다.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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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 집 앞에 반듯하게 펼쳐진 200여 평의 밭에는 서리 맞은 김장 배추가 시퍼런 기운을 뽐내며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안으면 한 아름 정도 될 것만 같은 배추는 짚으로 묶어놓고, 웬만한 건 그냥 헤벌어진 채로 놨다. 배추가 자라는 동안 당장 배춧국도 끓여 먹고 겉절이도 해먹어서 밭에는 배추가 띄엄띄엄 놓여 있었다.

밭 가장자리에 두 그루씩 심어놓은 사과나무·체리나무는 잎이 다 떨어지고, 가지만 우두커니 남았다. 살구나무는 집에 들어오는 입구에 심었는데,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게 나무인지 물인지 알 수 없었다. 찰옥수수는 심을 때만 좋았다. 아니 이파리가 자라 초록빛깔이 싱싱하게 늘어져 있을 때까지만 좋았다. 알이 들어설 때는 어디서 알고 찾아오는지 온갖 새들의 밥으로 보시됐다.

어디 그뿐인가. 메주콩·서리태도 심는 기쁨만 컸다. 그래도 오이·가지·상추·들깻잎·호박은 먹고 싶을 때마다 즉석으로 따먹었다. 서리가 내리면서 그토록 무성했던 호박잎이 뜨거운 물에 삶아놓은 듯한 모습이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무성한 잎에 드러나지 않았던 늙은 호박이 여기저기서 황금빛을 발하며 나타났을 때 안쓰러운 마음은 감동으로 역전됐다.

'두 해만 지나면 사과를 따 먹을 수 있다'고 했던 묘목 아저씨 말이 떠오르며 내년이면 사과가 정말 열릴까 싶어 나무 근처에서 서성거리고 있을 때, 아들아이가 말했다.

"아, 이제 일 년 남았네!"
"뭐가?"
"수능."

그리고 1년이 지난 오늘, 아들아이는 지금 수능을 치고 있다.

꽃 진 자리에 열매가 맺는다

이웃에게 얻은 푸성귀
 이웃에게 얻은 푸성귀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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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졸업 검정고시를 합격한 날부터 나는 아이가 고등학교에 들어갈 날만 손꼽아 기다렸다. 신학기가 시작되던 2010년 4월 초, 학교서 돌아온 아들아이가 말했다.

"나, 학교 그만둘래."

놀란 가슴은 철렁했지만, 아들아이가 그냥 한 번 해보는 말이겠거니 했다. 누구나 한 번쯤 학교에 가는 걸 싫어하고, 또 한 번쯤은 가출 충동이 일 듯 말이다. 그렇게 학교를 그만두고 싶은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아이는 중학생 때도 이렇게 학교를 그만둔다고 했다.

어스름한 기운이 남아 있는 이른 아침, 말끔히 고등학교 교복을 입고 집을 나서는 아이에게 나는 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그런 날들이 불과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며칠 지나지 않아 아들아이는 오후 11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하루 16시간을 학교에서 보내며 주말에도 꼬박 학교에 갔다. 아이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우리 부부는 아이가 그저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고 있는 줄 알았다.

학교를 그만둔다는 아들아이의 말에 머릿속이 헝클어지듯 어지러웠다. '어떻게 다시 시작한 학교 생활인데...'라는 생각이 피어올랐다. 중학교 때는 아들아이가 사춘기를 맞으며 변화무쌍한 심리 변화를 겪고 있다고만 여겼다. 하지만 아들아이는 잦은 이사와 통학의 불편함, 학교 생활의 부적응 등을 내세우며 자퇴를 고집했다. 우리는 이 고비만 넘기면 되겠다 싶었지만, 아이는 혼자 공부하는 쪽을 택했다.

아이가 중학교를 자퇴했을 때도 처음 얼마 동안은 홀로 애쓰며 공부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아이는 차츰차츰 리듬감을 잃었다. 컴퓨터에 붙어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마우스의 움직임에 따라 난무하는 총칼이 번뜩이고, 인공의 사람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장면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책은 그저 책꽂이에 꽂힌 정물이 됐다. 아침에는 늘어져라 잠을 잤다. 처음의 다짐과 달리 아이는 마치 컴퓨터 게임을 하려고 학교를 그만둔 것 같았다. 규칙적인 생활과 학습 진도를 맞춰가며 자기 할 일을 해나가던 아들아이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컴퓨터에 달라붙은 아이를 볼 때마다 울화가 치밀었다. 아이와 나는 사사건건 부딪쳤다.

그런 와중에 우리는 살던 전셋집을 두 번이나 옮겼다. 뛰는 전세금을 따라갈 수 없어 아파트 평수를 줄이고, 다시 재개발지역의 허름한 다세대 주택으로 이사갔다. 게임 하는 아이에게 검정고시를 통과해야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시켰다. 자퇴한 지 1년이 지나고 나서야 아이는 중학교 졸업자격을 얻었다. 그리고 반 년을 기다려 고등학교에 입학을 한 것이다. 나는 내심 학교생활을 다시 시작한 아이를 보며 해방이 된 듯했다. 그동안 아이와 부딪치던 팽팽한 신경줄이 다소 느긋해지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것도 같았다.

아들아이는 말했습니다. "이렇게 3년 동안 다니면 내가 바보가 될 것 같아"라고.
 아들아이는 말했습니다. "이렇게 3년 동안 다니면 내가 바보가 될 것 같아"라고.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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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학기 초에 담임교사와 면담이 있었다. 담임은 "공부에 대한 열의가 너무 강한 것 같다"며 "그게 좀 걸린다"고 했다. 우리는 그동안 아이 혼자 공부했던 시간을 저 스스로 보상받으려고 하나 싶어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너무 강하면 부러진다고 했던가. 아이는 또 학교를 그만둔다고 했다.

우리는 아이의 말에 신중하게 대하지 않으면 안 됐다. 우선, 아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게 됐는지 충분히 헤아린 다음 문제를 풀어야 했다. 아이는 동네에서 같은 학교를 다니며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또래 친구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런 아이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에도 주변 아이들과 관계를 맺기 쉽지 않았다. 내성적인 성격의 아이는 먼저 다가가지 않는 대신 죽어라 공부에만 파고들었던 것이다. 학교에 다시 적응하기 위해 아이가 참고 견뎠던 시간을 다시 떠올리니 마음 한구석이 먹먹했다.

주말도 없이 학교에 가는 아이에게 "1학년인데 너무 무리하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무슨 오기였는지 아이는 평소와 다름없이 학교에 갔다. 썩 내켜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동아리에 들어가 활동을 시도하기도 했다. 아이가 다니던 학교는 40평대의 고급·고층 아파트에 둘러싸여 있었고 학생 대부분은 그런 아파트에 살았다. 우리 집은 아파트 지역을 벗어난 재개발 지역의 후미진 골목에 있었다.

"네가 학교를 왜 그만둬야 하는지 그 이유를 한 번 말해봐!"
"이렇게 3년 동안 다니면 내가 바보가 될 것 같아."

자기를 아무도 알지 못하는 낯선 학교·동네에 있는 아이에게 중학교, 아니 초등학교서부터 시작되는 보통 친구들의 관계는 적응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학교 안에서는 어느 누구도 아들아이가 지금까지 겪어온 마음의 바탕을 알 수 없었다.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 아이에게 같은 반 친구들조차도 쉽게 다가서지는 못했을 것 같다. 우리는 그것만이 학교를 그만두는 이유가 될까 싶어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애썼지만, 아이는 우리가 모르는 그 어떤 것에 항상 갈증과 허기를 갖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 남편과 아이는 함께 강원도 여행을 다녀왔다. 학교를 그만두기로 결정한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나는 아이가 학교를 그만두고 무엇을, 어떻게 하며 살 것인지 그저 막연하고 안타까웠다.

학교를 그만둔 이후의 날들은 아이에게도 우리에게도 이전의 세상이 아니었다. 중학교 자퇴 후 게임에 빠진 아이의 모습을 우리는 또다시 맞닥뜨리게 됐다. 게임은 더 자극적이었고, 더 빨라졌다. 그리고 더 강한 폭력이 모니터 안에 펼쳐지고 있었다. 아이의 정신은 건조해지고 뭔가에 쫓기는 듯 불안해 보였다. 아이는 밤늦게까지 게임의 늪에 빠져 있었다. 새벽녘에 잠들고 점심 때가 돼 무기력하게 움직이는 아이의 얼굴은 하얘지고 점점 야위어갔다. 손목에는 볼록한 혹까지 생겼다. 출입을 완강히 거부하던 아이는 혹이 점점 커지자 마지못해 병원에 다녔다. 의사가 대뜸 물었다.

"너 컴퓨터게임 많이 하지?"

남편과 나는 밤마다 동네 공원에서 아이 문제를 이야기했다. 그러다 강원도 여행 중에 아이가 말했다던 "시골에 가서 살고 싶다"는 말에 귀촌을 구체적으로 생각하게 됐다. 막연히 귀촌이란 걸 떠올려 보긴 했지만, 막상 우리 현실이 되니 미뤄놨던 숙제를 지금 해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이 됐다. 확실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아이가 도시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이라면 귀촌이 답일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다.

이천 시골에서 자연을 만나 땀 흘려 일하다

아빠와 같이 일하는 어린 농부(엉덩이를 보이고 장화신은 아들아이)
 아빠와 같이 일하는 어린 농부(엉덩이를 보이고 장화신은 아들아이)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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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연고도 없는 경기도 이천에서 살게 된 지 이제 1년 반이 넘어가고 있다. 아이가 학교를 그만둔 그날로부터 4개월이 지난 뒤 우리는 여기다 싶은 곳으로 가게 됐다. 여기에 오기 전, 우리는 도심에서 가까운 천안·논산·안성 등 여러 지역을 주말마다 헤맸다. 그렇게 도시의 전세금의 반값도 안 되는 돈으로 우리는 27평의 주택과 집보다 더 넓은 창고, 그리고 거기에 딸려 있는 반듯한 텃밭까지 구할 수 있었다.

텃밭은 아이의 '학습터'가 됐다. 이웃서 강아지를 얻어 개집을 스스로 짓기도 했다. 토종닭을 사러 장날에 외출을 하면서 닭 집을 어떻게 만들지 인터넷을 뒤지기도 했다. 모종을 사서 심어놓은 고추를 보고 동네 사람들이 하나둘 와서는 한 마디씩 거들었다.

"저거는 비닐을 갈고 다시 심어야 해."
"약을 안 치는 게 좋긴 하지만, 그게 어디 되나? 때 되면 뿌려줘야 그래도 거둘 게 있는 거라고."

여기저기 이웃들이 와서 한 마디씩 거드는 말에도 아이는 자기가 해보고 싶은 자연농법으로 씨를 뿌리고 가꿨다. 텃밭 수준일지언정 막상 농사를 시작하고 보니 비료나 농약·제초제를 치지 않고서는 풀을 관리하기 불가능했다. 그러니 흙을 고르는 일(로터리를 친다고 함)을 위해 트랙터와 같은 기계에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됐다.

아이는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 중 하나가 '식물 궁합'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인터넷 검색 등을 통해 알게 됐다고 했다. 식물들이 자라는 데 궁합이 있다는 것은 아이가 텃밭을 일구면서 알아낸 상식임과 동시에 농사의 지혜가 됐다.

봄이 되면 무성해지는 풀을 제압하기 위해 비닐을 덮는 대신 밭에 물을 조금 준 뒤 상추씨를 뿌린다. 상추는 봄에 잡초를 막아주는 제초제 역할을 한다. 아이는 또 양파와 시금치의 식물 궁합에 대해서도 열변을 토했다. 양파는 마늘과 같은 방식으로 심는데, 씨를 뿌리거나 모종을 심어주고 흙을 덮지 않는다. 아이는 양파 옆에 시금치 씨를 뿌리면 시금치는 마늘에 상추와 같이 잡초를 막아주는 역할을 해 식물들이 상부상조하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이렇게 아이와 우리 부부는 농작물들도 서로 조화롭게 사는 방법을 알게 됐다.

우리집 암캐 '공공이'
 우리집 암캐 '공공이'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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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과 더불어 지내며 아이의 심성은 서서히 바뀌어갔다. 지나친 경쟁과 빼곡하게 들어찬 아파트 정글 속에서 남을 의식하며 화를 잘 내던 성격이 달라졌다. 충동적으로 화를 내거나 자신을 조절하기 힘들어 하던 아이의 모습이 이렇게 바뀌게 된 것은 아마도 흙과 함께, 씨를 뿌리고 가꾸며 닭을 치고 개도 기르면서 자기에게 맡겨진 생명을 책임진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일을 통해 우리 먹거리에 대해서도, 농약이나 비료 그리고 천적을 이용한 농법 등을 더 많이 생각하게 됐다. 우리는 생활과 심성, 먹거리가 막연하게 연결돼 있다는 생각을 했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이 직접 우리의 몸과 마음에도 중대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체감했다.

아이는 이곳에서 자연스럽게 공부를 다시 해보겠다는 마음을 다졌다. 고등학교를 자퇴한 이듬해 4월에는 고등학교 졸업자격 검정고시에 합격했다. 우리는 아이가 조금 늦더라도 자기 스스로 공부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지만, 그것을 강요하거나 말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엄마는 내가 뭘 하고 살았으면 좋겠어?"
"니가 행복해질 수 있는 일을 하고 살면 좋겠어."

지극히 원론적인 대답이었지만, 몸으로 직접 체험했던 시골 생활은 우리 가족이 머리로만 알던 농사의 어려움과 보람도 함께 깨닫게 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학생이면서 선생의 역할을 했다. 아이의 강퍅해진 마음은 흙을 만나던 그날로부터 흙을 통해 부드럽게 치유되고 있었다.

"수능일이 꼭 소풍 가는 기분이네"

시골, 그 널직하고 널널한 공간
 시골, 그 널직하고 널널한 공간
ⓒ 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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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공부에 열중하면서 우리는 올해 봄부터 다시 주거지를 옮기기로 했다. 뜻을 세우니 길이 열리는 것인지 마침 대전에서 남편의 일이 연결됐다. 아이는 책상 앞에 딸린 의자에 붙박이처럼 앉아 공부를 했다. 찬바람이 불기 전까지 흰 티셔츠 세 장과 반바지 두 벌로 계절을 났다. 아이는 미용실에 가는 시간과 비용까지 따지며 머리 깎는 기구를 사기도 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 11월 7일. 이날은 수능 예비소집일이었다. 아이는 교육청에 직접 수험표를 받으러 가기 위해 그동안 걸어뒀던 파카를 오랜만에 입었다. 슬리퍼만 신었던 발은 제 누나가 사준 운동화로 모처럼 호사를 누렸다.

8일 아침, 아이의 수능 도시락을 싸니 감회가 깊었다. 아이가 평탄하게 고등학교 3년을 다녔다면 내가 준비하는 수능 도시락은 그다지 뭉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움직임이 별로 없었던 아이가 소화하기 쉬운 음식으로 흰 쌀밥과 아욱된장국·김치·계란말이·씨암탉 떡갈비를 싸고 따끈한 보리차를 보온병에 넣었다.

"엄마, 오늘 수능일이 꼭 소풍 가는 기분이야."

차를 타러 가는 아들아이는 집을 나서며 웃으며 말했다. 그 어떤 말보다 방금 아이가 한 말은 벅찬 선물이 됐다.

'고맙다. 아들아. 그 말은 네가 그동안 열심히 노력했다는 얘기구나. 너는 소풍 가는 마음으로 시험장에 들어서겠지. 그렇지 않다면 그게 어디 소풍길이겠니? 엄마도 네가 그렇게 말해주니 도시락을 싸면서 한바탕 즐겁고 재미있게 놀고(?) 올 네 소풍밥을 준비하는 것 같았단다. 잘 다녀와. 그리고 저녁에는 소풍 뒤풀이를 하자!'

이천에 두고 온 사과나무의 열매를 지금부터 따야 할 것만 같다.


태그:#수능, #소풍, #고3, #컴퓨터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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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에게 가면을 줘보게, 그럼 진실을 말하게 될 테니까. 오스카와일드<거짓의 쇠락>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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