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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해태상에서 놀고 있는 두 소년(1903)
 광화문 해태상에서 놀고 있는 두 소년(1903)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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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경복궁 정문인 광화문 해태상을 오르는, 바지저고리를 입은 개구쟁이 두 소년은 누구의 할아버지일까.

또 다른 쪽에는 황소 두 마리가 길마에 장작을 잔뜩 지고 헉헉대면서 무악재 고개를 넘어 서울 장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바로 100년 전 우리나라 서울의 모습이다.

1905년 9월 22일 방한한 미국 제26대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가 무엄하게도 홍릉 석상에 올라 개선장군처럼 포즈를 취했다고 한다.

1894년 외아문(지금의 외교통상부)에서 영국 왕립지리학협회 회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에게 발급한 여권(호조)은 어떤 모양일까.

"이 책에는 새롭게 발굴한 사진도 적지 않다. 이러한 사진들은 아직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110여 년 전, 혹은 더 거슬러 올라가 150여 년 전 우리 조상들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귀중한 가치가 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분야는 물론 민속과 풍습, 인류학적 측면 등에서도 중요한 가치가 있는 사진들이 꽤 있다.

기억과 망각은 종이 한 장 차이로 기억과 망각 여부에 따라 때로는 우리에게 엄청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우리 자신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제대로 살아갈 수 있을까. 우리의 아픈 근대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그 의미를 오늘에 되새기는 일이 어찌 가볍다고 할 것인가." - 장세윤(동북아역사재단 책임연구위원·근대사) 

35년 망국사에 장탄식하다

숭례문(1888~1891)
 숭례문(1888~18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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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진전문 출판사인 눈빛출판사와 함께 1876년부터 1910년까지 35년 동안의 그 당시 우리나라의 정치·경제·문화·생활사·풍속·문물 등을 사진으로 엮은<개화기와 대한제국>(1876~1910)을 대한제국 건국 115주년 기념일에 맞춰 펴냈다.

지난 10월 12일은 고종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한 지 115주년 되는 날이었다. 1897년 10월 12일 고종은 환구단에서 황제 즉위식을 갖고 국호를 '조선국'에서 '대한제국'으로 바꿨다. 하지만 이날은 이제 칼럼 한줄 나오지 않는 잊힌 날이 되고 말았다.

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가 무엄하게도 홍릉 석상에 올라 개선장군처럼 포즈를 취하고 있다(1905).
 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딸 앨리스 루스벨트가 무엄하게도 홍릉 석상에 올라 개선장군처럼 포즈를 취하고 있다(1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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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생 일선 교단에 섰던 훈장으로서 우리 학생들이 우리나라 역사, 특히 근현대사를 잘 모르고 있는 점이 매우 안타까웠다. 그래서 틈틈이 역사의 현장을 더듬으면서 그들을 위해 <항일유적답사기> <누가 이 나라를 지켰을까> <영웅 안중근> 등의 책을 펴낸 바 있다.

나는 2010년 경술국치 100주년 기념일에 맞춰 젊은 세대들이 좀 더 쉽게 근현대사에 접근할 수 있도록 '식민지 통치기 한민족 수난과 저항의 기억'이라는 부제로 <사진으로 보는 일제강점기>(1910~1945)를 펴냈다.

이 책이 발간된 뒤 각계로부터 분외의 격려를 받았다. 그 격려에 힘입어 일제강점기의 전사(前史)라고 할 수 있는 <개화기와 대한제국>(1876~1910)을 기획 발간했다.

일제강점기가 1910년에서부터 1945년까지 정확하게 35년인데, 공교롭게도 개항(1876년)에서 대한제국 멸망(1910년)까지도 꼭 35년이었다.

이 기간은 조선 왕조의 망국사로 나는 문헌을 들추거나 집필하는 동안 여러 번 장탄식을 하거나 책장을 덮고, 치악산 구룡사 계곡에 간 뒤 멧부리나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아픈 마음을 달랬다.

"갑신 이후로 갑오에 이르는 10년의 사이는 그 악정이 날로 심하여 그야말로 큰 고기는 중간 고기를 먹고, 중간 고기는 작은 고기를 먹어 2천만 민중이 어육이 되고 말았다. 관부의 악정과 귀족의 학대에 울고 있는 민중이 이제는 참으로 그 생활을 보존할 수 없이 되었다. 살 수 없는 민중이 혁명 난을 일으킴은 자연의 추세였다." - 이이화 <한국사이야기> 18권 '한국말년사' 158쪽.

그런데 이런 악정의 원인과 부정부패의 근원을 올라가면 벼슬을 매관매직한 데 있고, 그 몸통이 국왕이나 왕비, 아니면 그 일족인데 아연실색할 수밖에 없었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살펴보면 백성의 삶을 도탄에 빠트리거나, 백성을 한낱 수탈의 대상으로 여긴 정부나 정권은 망하기 마련이었다.

자기 나라 백성을 버린 지도층

외아문(지금의 외교통상부)에서 영국 왕립지리학협회 회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에게 발급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권(호조). 1894.
 외아문(지금의 외교통상부)에서 영국 왕립지리학협회 회원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에게 발급한 우리나라 최초의 여권(호조). 1894.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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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 전후, 서세동점의 높은 파도에 나라 안 모든 백성들이 똘똘 뭉쳐도 헤쳐날 수 없는 처지에 매관매직이나 친인척의 연줄로 벼슬아치가 된 탐관오리들은 백성들의 수탈에 여념이 없었다.

전라도 고부 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던 동학 접주였던 전봉준은 인근 접주에게 사발통문을 돌려 '제폭구민(除暴救民·폭정을 제거하고 백성을 구한다)' '보국안민(輔國安民·나라를 돕고 백성을 편안케 한다)'의 깃발을 내걸고 농민군을 조직했다.

동학 농민군이 승승장구로 전주까지 함락하자 조선 정부에서는 앞뒤 생각도 없이 불쑥 청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는 글을 1894년 5월 10일 자로 보냈다.

"저희 나라 전라도 관할에 있는 태인·고부 등의 마을에 사는 백성들은 사납고 성질이 교활해서 평소에 다스리기 어렵다고 일컬었습니다.

근래에 동학 교비(敎匪)들이 무리 만여 명을 모아 십여 고을을 공략하고, 또 북쪽으로 전주성을 함락했습니다. 아직도 발호가 계속되어서 중조(中朝)에 근심을 끼치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저희 나라는 임오군란·갑신정변 두 차례의 내란을 모두 중조 병사의 힘을 빌려 평정하였습니다." - 이이화 <한국사이야기> 18권 '근대중국외교사자료집요' 220쪽.

무악재(1904)
 무악재(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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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정부는 나라 안의 민란을 스스로 수습치 못하고 자기 나라 백성들의 폭도로 규정해 청나라에 원병을 청할 만큼 무능부패하고, 백성을 저버린 지도층이었다. 청나라는 즉각 군사 1500명을 아산만에 상륙케 했다. 그러자 일본도 톈진조약을 구실로 삼아 기다렸다는 듯이 군사를 군함 2척에 실어 조선에 재빨리 파병했다.

그새 농민군과 정부군 사이에 전주화약이 성립됐다. 하지만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는 막무가내로 육전대 420명과 포 4문을 이끌고 서울에 입경했고, 육군소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는 보병 3000명과 기병 300명을 이끌고 인천에 상륙했다. 그런 뒤 일본은 우리 땅에서 청과 한판 붙을 전쟁 구실 찾기에 혈안이 됐다.

1894년 6월, 일본은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를 거두자 조선은 비로소 500년에 걸친 중국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주국으로서 조선반도의 햇볕은 잠시뿐이었다.

조선의 마지막 몸부림으로 건국한 대한제국

조선의 사대부(1895)
 조선의 사대부(1895)
ⓒ The John Murry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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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0월 12일, 조선은 마지막 몸부림으로 고종이 환구단에서 황제에 즉위하고 국호를 '대한제국'이라 선포한 뒤 새 연호를 '광무(光武)'로 정했다. 대한제국의 선포는 500년 동안 이어져온 조선 왕조의 국호를 바꾼 일대 사건이었다. 이제 조선은 대한제국으로 거듭 개국, 국호 명칭으로는 대영제국이나 대일본제국과 동렬에 서게 됐다. 아울러 대한제국은 개국과 함께 여러 가지의 개혁을 추진했다.

대한제국은 무엇보다도 국가의 자주성을 뒷받침하고자 국방력 강화와 재정 개혁, 상공업 육성에 주력했다. 하지만 대한제국은 내부 역량 부족으로 열강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개혁을 요구하는 백성들의 열기를 담아내지 못했다. 대한제국은 국호와는 달리 매우 허약한 나라였다. 대한제국 개국 이후에도 일본·미국·러시아·영국·프랑스·독일 등의 열강은 전과 다름없이 한반도의 이권을 갈기갈기 찢어 나눠가졌다.

1904년 2월 8일, 일본 함대가 러시아 뤼순군항을 기습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이 발발했다. 이 전쟁은 러시아와 일본이 한국과 만주의 지배권을 두고 서로 벌인 치열한 각축이었다. 일본은 러시아의 남진정책을 견제하는 영국과 미국의 도움으로 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1905년 7월, 미국과 일본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는 대신, 미국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양해하기로 몰래 합의했다.

1905년 9월 미국 포츠머스에서 열린 러일강화 회담의 핵심은 한국을 일본에 넘기는 것이었다. 일본은 이 회담의 결과 국제 사회에서 한국의 지배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이로부터 1910년까지 5년 동안 대한제국은 일본의 침략에 반신불구로 신음하다가 마침내 1910년 8월 29일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부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 그리고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함"이라는 한일병탄의 참혹한 일제강점기를 맞았다.

역사는 영원히 반복된다

광화문(1880)
 광화문(18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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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대한제국)이 망한 데는 이웃 일본의 오랜 대륙 진출의 꿈인 정한론에 따른 야만적 침략에 있지만, 이를 미리 경계치 못한 조선 지배층의 무능과 부정부패, 대중화(大中華)에 대한 사대주의에 빠져 소중화(小中華)에 안주한 것도 원인이었다. 결국 지난날 우리 문화의 수혜국인 일본에게 오히려 나라를 빼앗기는 '미꾸라지에게 뭐 물린 꼴'이 되고 말았다.

『개화기와 대한제국』(1876~1910) 표지
 『개화기와 대한제국』(1876~1910)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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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망국 35년의 역사를 들추고 정리·기록하는 내내 탐관오리들의 학정과 수탈에 신음했던 백성들의 아픔에 통분을 금치 못했다.

그런 아픔 속에서도 망해가는 나라를 구하겠다고 죽창과 화승총을 들고 왜적의 침입에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버린 흰옷 입은 의병들과 독립지사들을 문헌과 역사 현장에서 만나 우리 겨레의 강인함과 위대함을 함께 느낄 수 있어 다른 한편으로는 몹시 느꺼웠다.

나는 이런 백성들이 나라를 지켜왔고, 지금 지키고 있고, 앞으로 지켜갈 것이라는 신념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는 조선(대한제국)의 망국 원인을 제1차로 우리 내부에서 찾아야 한다. 그것은 거듭 말하지만, 망국의 원인은 지도층의 무능과 부정부패였음은 역사를 몇 장 넘기지 않아도 불을 보는 것처럼 분명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아직도 이 나라 지도층의 무능과 부정부패는 일본의 압제에서 해방된 이후에도 계속 꼬리를 잇고 있다는 점에 우리 근현대사의 비극이 있다.

역사는 영원히 반복된다. 영국의 역사학자 E. H. 카는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말했다.

우리는 지난 역사를 통해 지도층의 무능과 부정부패가 망국의 지름길임을 깊이 깨닫고, 앞으로 유능하고도 청렴한 나라의 지도자를 길러 나라의 지도자로 내세우는 일에 우리 백성들이 앞장선다면 이 나라 이 겨레는 영원하리라는 평범한 진리를 마무리 말로 남긴다.

덧붙이는 글 | <개화기와 대한제국> (박도 엮음 | 눈빛 | 2012.10.12 | 2만9000원)



개화기와 대한제국

박도 엮음, 눈빛(2012)


태그:#개화기와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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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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